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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07화 (107/127)

107화

「….」

“리헤…로스?”

「그는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아…… 녹화 영상인가?”

어째서 당연하게 영상통화라고 생각했던 걸까. 되돌아오지 않는 영상에 대고 말을 거는 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가 무릎을 기대고 있는 바닥은 이곳과 완전히 다른 모양새였다. 아마 이 석상이 있는 곳이면 자유롭게 기록이 가능한 저장 장치이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의 행색을 자세히 살펴보니 입고 있는 옷과 때 묻지 않은 얼굴이 지금의 리헤로스와 아주 달랐다. 오래전, 고행의 길을 걷기 전의 모습이었다.

‘와, 세상에… 엄청 풋풋해.’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치가 없었으므로,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나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이렇게 많이 변했던가 새삼스러운 감상이 관자놀이에 윙윙 맴돌았다.

「그런데… 그걸 물으시는 이유가… 여기에서 바라면 이루어지는 겁니까?」

「그저 마음을 털어놓는 것뿐이라면… 우선 루미가 무사히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들리는 것은 리헤로스의 목소리뿐이었는데, 마치 질문에 답하듯 말을 잇는 것을 보니 그에게만 들리는 어떤 목소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답변에서 불명확한 시간대를 추측할 수 있었다. 루미를 구출하고 왔을 때인 듯했다.

‘그때도 교회당을 들렀었나… 몰랐네.’

리헤로스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임무를 받거나 보상을 받았었다. 그때마다 번거로우니 혼자 다녀오겠다며 나를 두고 간 적이 종종 있었다. 개인행동을 할 때의 기록했던 모양이다.

「루미는 너무나도 어린 생명입니다. 겪지 않아도 될 힘든 일을 겪어버렸지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조속히 치유할 수 있길 바랍니다.」

「곁에 있어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어쩔 수 없죠.」

「이제 가야겠습니다. 아직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 덕분에 하나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크리스를 제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상이 끝나도 가만히 멈춰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리헤로스가 튜토리얼 NPC 취급하는 게 불편했었고 한시라도 빨리 떨어질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늘 리헤로스를 타박하고 툴툴대지 않았던가. 신에게 감사를 올릴 정도로 나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구나, 내가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구나,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가슴 가장 깊은 곳이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댔다.

‘착해 빠져서….’

불의를 보면 참고 넘어가지 않으며 나의 도움을 늘 고마워하던 보기 드문 남자. 그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신경이 쓰여 떠나지 못하고 그의 곁에 머물렀더랬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나도 리헤로스를 통해 어딘가 마음이 흔들려서 그런 게 아니었나 싶었다.

거창한 세계관의 단서는 아니었지만, 다음 데이터를 열어보고 싶을 만큼의 호기심은 충족했다. 아홉 개의 리헤로스 생각이 담긴 데이터라니 이보다 귀한 게 따로 있을까. 그래서 다음 데이터 목록으로 손을 옮겨 재생했다.

[시스템]

두 번째 기록입니다.

「…마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마군과 첫 조우를 했습니다. 대치하던 중에 무기도 부서져서, 하마터면 원점으로 돌아갈 뻔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 강한 마군단장이 나타날 텐데 과연 제가 대항을 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됩니다.」

「크리스에게 기대지 않고… 동료로서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이 영상은 처음 스킬북을 얻고 첫 마군단장 페르킨을 격파한 이후 같았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이내 들어 올린 그의 얼굴에서 눈동자가 반짝였다.

「크리스는… 정말 큰 의지가 됩니다.」

영상이 끝난 줄 알았다. 이 뒤로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멈춰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스로 벌어진 입에서 고통에 찬 사람같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데.」

「그는 전투에서 충분히 실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하얗고 가는 몸을 보면… 혹여 부러질까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그의 가능성을 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있는 것일까요?」

겨우 망설이고 있던 말이 고작 저거라니, 소리를 내 웃다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싸고돌았다 이거지?’

왜 그리도 나를 감싸지 못해 안달이 났나 했는데, 얼마나 가냘파 보였으면 그랬을까. 과보호하는 리헤로스 때문에 입가에 머무른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늘 싸울 수밖에 없는 제 곁에 남아있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제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크리스뿐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놓아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에 동생을 투영해서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한심하게도.」

두 번째 영상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의 말이 이해됐다. 이맘때 즈음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었다. 자기보다도 유약해 보이는 존재가 부서지는 걸 손 놓은 상태로 두고 보는 게 힘들었겠지. 이때까진 날 연애적 감정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저 ‘보호해 주어야 할 존재’였다. 이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대도 서운하진 않았다. 그보다도 언제 나의 시선을 피해 데이터들을 기록해왔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스템]

세 번째 기록입니다.

「크리스는… 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번에는 시작부터 침묵이 길었다. 리헤로스는 흔히 말하는 ‘웃는 상’이어서 늘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는 시무룩한 듯 내려가 있는 입꼬리가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멈추고 고뇌에 빠졌으며, 이리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이전 영상으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이후인듯한데, 이제는 의상으로는 어느 시점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페르킨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지? 아, 칼리고?’

군단장을 처치하고 돌아왔을 때, 금의환향했다고 생각했건만 칼리고가 꼽줬던 기억이 선명하게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악연이지. 당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과거의 발자취를 되짚으면서 다음 문장을 여유롭게 기다렸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왜. 뭐가?”

영상 두어 개 봤다고 이제는 화면 속의 그에게 말을 던지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꼭 다른 세계에 있는 리헤로스의 고민 상담을 들어주는 것 같아서 재밌기만 했다.

「크리스가…… 하아아….」

「좋아져서… 아니, 그러니까….」

“아하하!”

리헤로스는 늘 예상치도 못한 것으로 놀라게 한다. 그의 말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기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틀어막으며 경청했다.

「그를 원래도 좋아했습니다만… 조금 다른 의미로 좋아졌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까요….」

「처음에는 잘 도와주는 친구 같고, 그저 든든하기만 했는데… 자꾸만 신경 쓰이게 만드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건 이해가 됐다. 나 역시도 나한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 싶을 때가 왕왕 있었으니까. 지나치게 히로인이 된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지 않나, 메인 격 등장인물과 마찰이 생기곤 했었다.

「대단한 의미를 두고 하지 않았던 칭찬도… 점점 그를 깊게 관찰하게 되어서 그런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이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에게 예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니 괜찮긴 합니다만… 그게… 예전처럼 능청스럽게 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신이 구체적인 걸 물어본단 말이야? 어이없네.’

꼭 가십거리에 흥미가 있는 인간 같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그가 내 외모를 칭찬하고, 치댔던 것은 아주 초창기 막역한 사이부터 그래왔다. 어느 순간부터 물끄러미 본다던가 조금 더 느끼해졌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긴 했었다.

「이러면 안 되겠죠. 제게 주어진 사명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영상 속의 리헤로스는 양손을 모으더니 이내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 모습이 퍽 고심스럽고 인생 최대의 고통처럼 느껴지기까지 해서 어쩐지 마음 한쪽이 짠해졌다.

「그래서 그에게 마음을 표현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이 마음이 조용히 흘러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티 안 내려고 애썼던 건가?’

고백하기 전의 리헤로스의 태도는 나만의 착각인지 모호할 때가 많았다. 당시에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자제하려는 태도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애석하게도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과거의 그는 모르겠지. 고백해오던 그날의 리헤로스가 떠올랐다. 분명 덤덤해졌다고 생각했건만,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 호흡, 온도를 떠올릴수록 심장은 대형 스피커 앞에 선 것처럼 쾅쾅 울려댔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한껏 올라간 광대뼈가 아플 지경이었다.

[시스템]

네 번째 기록입니다.

「크리스를 좋아하지 않으려… 하아아아….」

「노력해봤는데 마음이 쉽게 움직이질 않습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 물론 이런 시련을 준 운명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나약한 의지의 탓이겠죠.」

「사실 그래서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제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한 걸까.

「그런데 저는 겁쟁이인 것 같습니다. 혹여 제 고백으로 크리스가 부담을 느껴 떠날까 봐 무서워졌습니다….」

「제가 그를 생각하는 것과 그가 저를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면…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 저를 떠나고자 한다면… 고백하지 않아서 생기는 답답함보다 더욱 괴로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참아보려 합니다.」

그에게도 이런 고충이 있는 줄 몰랐다. 워낙 머릿속에 꽃밭이 가득한 청순한 남자라고 생각했기에 이렇게까지 골몰하는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풀죽은 그의 얼굴, 정확히는 반투명 스크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를 위로하듯이 뺨을 천천히 쓰다듬듯이 굴었다.

‘보고 싶어….’

나 역시도 좋아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눈앞에 놓인 목표만을 쫓았었다. 서로에게 조금은 솔직했다면 덜 아팠을까. 아쉽지 않을 만큼 솔직하게 표현했다면 지금보다 덜 힘들었을까.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솔직해지리라 과거에 약속하고 싶었다.

울컥울컥 치솟는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이러다간 리헤로스가 보고 싶다며 온 동네를 들쑤시며 그를 찾아 나설 것 같았으니까. 차분히 다음 데이터로 손을 옮겼다.

[시스템]

다섯 번째 기록입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이 일어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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