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나는 금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분명 테네브에게 치료받고, 밥과 약을 먹은 뒤, 침대에 누웠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렇다는 건… 여긴 꿈이구나.’
늘 흰 공간만 보다가 완전히 생소한 공간에 놓이니 어색했다.
‘아크리스는 정말 나타나지 않을 건가 보네.’
제 말로는 내 안에 쭉 남아있으며,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어떤 선행 조건이 있어야 가능한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죽은 영혼이 남아 정신 간섭을 할 수 있다는 게 사기급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아크리스’를 비웃으며 공간을 무한히 걸었다. 찬란한 금빛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부신 게 아니었고 온열 등을 켜놓은 듯한 안온함이었다.
‘기분 좋아.’
굳이 비유하자면 토요일 정오에 친구를 만나러 갈 때의 따사로운 햇살과 흡사했다. 여기에 드문드문 그늘막 역할을 해주는 나무만 몇 그루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치 숲속을 걷는 것처럼, 싱그러운 녹음을 연상하며 깊게 심호흡했다.
그때─
“윽!”
비릿한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역한 내가 훅 치고 들어오니 저절로 헛구역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
냄새의 근원을 찾기도 전에 아름다운 금빛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천천히, 섬유에 스미는 붉은 액체처럼. 기존의 악몽과 달리 끔찍한 장면이 놓인 것은 아니었으나, 눈앞이 온통 새빨개지자 눈이 급격히 피로해졌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이곳은 어차피 꿈이다. 내가 자각하고 있으니 마음껏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
눈을 질끈 감으니 어떤 미세한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워낙 작은 소리로 중얼대듯 말했고 파문이 인 것처럼 왕왕 울려대 알아들을 수 없었다.
“…….”
무어라 말하는 것인지 도통 추측하기 어려워 귀를 더욱 쫑긋 세웠지만, 집중하면 할수록 울림은 더욱 심해졌다.
…
“뭐라고? 잘… 안 들려.”
목소리에게 말을 걸며 눈을 떴다.
금빛도 핏빛도 아닌 통나무의 결이 늘어서 있는 천장이 보였다.
‘눈을 뜬다고 잠에서 깨버리다니.’
여태껏 꾸었던 꿈과 달리 큰 이벤트는 없었지만, 명치가 몹시 울렁거렸다. 아름다운 금빛 공간이 피를 연상케 하는 색상과 냄새로 물든 것 하며, 수상쩍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 다시금 떠올려보아도 고개를 갸우뚱 기울게 했다.
그리고 생각에 끝에 자연스럽게 리헤로스가 떠올랐다.
‘젠장… 누가 봐도 리헤로스를 연상할 수밖에 없잖아.’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간혹 그런 날이 있다. 불길한 기운을 떨칠 수가 없는 날. 인간도 동물이지 않던가, 간혹 동물적 감각이 깨어날 때가 있다.
‘불현듯 스치는 불길한 감각을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 생각을 마치자마자 저지른 행동은 충동적이었다.
오랜만에 허공에 손짓하여 검푸른 색의 포탈을 열었고 곧장 몸을 던지려 했다.
─띠링
[시스템]
스킬 이동이 불가한 지역입니다.
포탈 입구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고창이 뜨며 튕겨냈다.
‘어째서?’
스킬 창을 열어보았지만, 잠든 사이에 특수한 제한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제약이 생긴 것도 아닌데 우리 집, 아니 리헤로스의 집으로 이동이 불가하다니. 역시 불길한 꿈과 감각은 기우가 아니었던 것일까. 리헤로스와 페로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직접 이동이 불가능하다면 우선은 마을로 가보자.’
다행히 세르뷔에 골목길을 떠올리니 포탈은 경고창 없이 정상적으로 생성되었다. 조심스레 발을 들여 도착한 곳은 햇빛이 들지 않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무능한 왕족을 몰아냅시다!”
큰 고함에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골목 바깥 상황을 살필 수 있을 만큼만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수도만큼 사람이 모여있진 않았지만, 열댓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무능한 왕정에 대한 규탄 시위인 모양이었다. 후드를 최대한 푹 눌러쓰고 골목길에서 나왔다. 인파의 제일 끝에서 상황을 살피자 앞에 있는 주민 둘이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국왕 폐하는 폭정을 하지도 않고 굉장히 자애로운 분이시지 않나?”
“에그, 이 사람아. 왕이 착하기만 하면 뭐 하냐고, 흐지부지 넘어가려고만 하니까 마족이 우습게 보고 뒤를 치러 오는 거 아니겠어?”
“그런가….”
“차라리 칼리고 기사단장이 왕이었으면 잘할지도 모르지. 국왕이란 자가 어찌나 겁이 많은지 매일 칼리고의 뒤에 숨어서 말만 전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공식 석상에서도 얼굴을 비출 법도 한데 왕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칼리고가 그냥 기사단장이 아니라, 국왕의 신임을 받으며 권한이 상당히 많은가 보네.’
놈이 제멋대로 판결을 하던 것이 생각났다. 기사단이 제아무리 국가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이라고 해도 절차라는 것이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는 건… 혐의에서 풀려난 리헤로스도 아직 위험해.’
집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도 익숙해서 어느 쪽으로 가면 사람들의 눈에 안 띄고 갈 수 있는지 알았다.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목마다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은 오늘따라 유독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멀리에서부터 보이는 하얀 집. 가상의 공간이어서인지, 전에 심었던 침엽수는 무럭무럭 자라 2층의 창가까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잘 자라있는 것을 보니 리헤로스의 정성이 쏟아진 게 분명했다. 무사히 집에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기사단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자.’
무작정 들이닥칠 게 아니라 혹시 모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동태를 살폈다. 리헤로스의 집이라고 해도 아직은 마족과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을 테니 누군가 감시할 수 있었다. 한참을 밖에서 지켜보았지만, 다행히 수상한 사람이라거나, 집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기에 대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 위에 손을 얹었다.
─웅, 우웅
자세히 보니 통과할 수 있고 어떠한 피해도 보지 않는 투명한 막이 둘러싸여 있었다.
‘오호라… 이것 때문에 포탈을 쓰지 못했나 보군.’
그제야 담장을 살펴보니 붉은색 띠가 몇 군데 걸려있었다. 기사단의 짓이 분명했다. 혹여나 리헤로스가 아직 죄를 씻어내지 못하고 근신 처분을 받은 것일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대문을 박차고 한달음에 뛰쳐들어갔다.
“리헤로스! 페로!”
집은 늘 조용했지만, 유독 생기가 느껴지지 않은 적막감이 낯선 곳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가장 먼저 리헤로스의 방으로 올라갔지만, 빛에 반사된 먼지만이 둥둥 떠다니며 나를 반겨주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 위로 가서 앉았다. 침구 속에 들어있던 공기가 빠지면서 은은한 세제 향기가 풍겨왔다. 리헤로스와 가까이 붙어있다 보면 나는 그 향기였다. 자연스럽게 그 위에 엎드려 숨을 들이마셨다.
‘보고 싶어….’
아무리 이성을 되찾았다고 해도 리헤로스를 향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리헤로스는 어디에 있지?’
불현듯 내 생각인지 누군가의 목소리인지 분간 못 할 문장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게, 리헤로스가 집에 없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혹시 잠깐 시장에 간 걸까. 의혹에서 풀려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집에 없다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혹시 떠났나? 역시 내가 보인 모습이 괴물 같아 보였을까?’
그가 깨어난 이후에 현장 상황을 되짚으며 변호해야 했다면,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았겠지. 내가 아킬라를 산산조각 내버린 괴물 같은 모습을 알게 됐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떠난다면 그 이유일 것이리라.
‘정말… 내가 약했었으니까 곁에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충분히 제압이 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분명 리헤로스와 대치했을 때엔 그를 죽이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은 맞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폭발적인 힘이 솟구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모두 앗아가 놓고, 스탯은 줄였으면서 이상하리만치 ‘어떤 목소리’가 들리고 나면 엄청난 힘이 쏟아져 들어왔었다. 마왕이었던 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벌어진 상황인 걸까.
‘아직도 그 힘은 이해가 안 돼.’
내 의지도 아닌 행위로 인해 리헤로스가 날 떠났다고 하니 괴로워졌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곁에 남을 사람은 없을─
‘테네브는 내 곁에 남아주었는데.’
나를 치열하게 살리기 위해 노력한 테네브를 떠올린 순간, 리헤로스를 향한 그리움이 고통으로 변했다. 역시 사랑이란 영원불멸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라고 믿었건만,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상황들이 아크리스가 말한 대로 흘러가니 불쾌하기도 했다.
─쾅!
그때, 1층 현관에서 굉음이 들렸다.
내가 아는 그 누구도 이런 조심성 없는 소음을 낼 사람은 없었다. 분명 불청객이었다.
“누군가 결계를 건드렸어! 그놈일지도 모른다! 너흰 2층, 나는 1층을 수색한다.”
“네! 알겠습니다!”
추측하건대 아래층에서 들리는 불청객은 글라디우스 기사단인듯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칼리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두르자.’
손을 허공에 그었지만, 포탈 대신 상태 창이 떠올랐다.
[시스템]
공간 이동 | 쿨타임: 130초 남음
‘젠장, 젠장! 아직 쿨이 안 지났다고?’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는 건물 전체를 쿵쿵 울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놈들을 대항할 만큼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고, 대문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고로 퇴로는 단 한 곳뿐이었다. 창문을 열어 내려다보니 바깥에서 지키고 있는 기사는 없는 듯했다. 다만, 2층 높이가 이리도 높았나 싶게 아찔했다. 무사히 떨어진다면 삐끗하는 정도일 테고, 불행하다면 어딘가 부러질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기사들에게 금방 추격당할 것 같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빠르게 생각을 마치고 눈앞에 보인 것은 길고 곧게 자란 침엽수였다. 생각을 더 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나무로 뛰었다.
얇은 가지는 내 무게를 못 버티고 부러졌지만, 가까스로 굵은 가지를 잡아 매달렸다. 아래 가지를 딛고 지상에 무사히 안착했다.
“방금 무슨 소리지! 근처에 있는 것 같으니 어서…!”
건물 안에서 쩌렁쩌렁 소리 지르는 기사의 목소리를 끝까지 들을 여유는 없었다. 대문 밖을 황급히 빠져나오며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발을 재빨리 움직였다. 긴장감 때문인지 발이 더욱 무거운 것만 같았다.
‘판단력이 흐려졌나? 왜 예상하지 못했지. 바보같이!’
그저 마법을 쓰지 못하는 방해막일 줄 알았지, 경보를 울리는 보안 장치일 줄 꿈에도 몰랐다.
부상으로 인해 만신창이인 몸을 이끌고 멀리 달아나는 것은 무리였다. 포탈 쿨타임이 돌아오는 2분간 잠깐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갑옷이 요란스럽게 절그럭대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골목 사이에 바짝 붙었다.
“모든 길을 막아!”
“너는 마을 어귀에서 대기해!”
마을 인근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몰려온 모양이었다. 식은땀이 전신에 쏟아지듯 흘렀다.
또다시 잡히면, 그때는 두 번의 탈옥은 없을 것이다.
정말 그곳에서 죽는 수밖에 없다. 테네브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었다.
‘젠장…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기사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뒤편에 햇살이 눈부시게 드는 건물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크레아누스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교회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