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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04화 (104/127)

104화

고민스러웠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고 어쩔 줄 몰라 고통에 몸부림을 쳤건만, 스피나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탈출했다는 말에 울렁거리던 이성이 돌아왔다.

아마 내가 탈출했다는 소식이 칼리고에게 전해진다 해도 스피나와 함께 있는 한 그는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겠지.

지금은 나를 직접 탈출시켜준 테네브의 안위를 걱정할 때였다.

‘얘는 대책 없이…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물론 사슬에 묶인 채 피를 뽑히다가 처형당하는 것보다는 자유의 몸인 게 훨씬 낫다. 그런데 중범죄를 저지른 내가 사라졌다는 건 금방 들통날 텐데 어떤 눈속임도 없이 빠져나갔다면 가장 친밀한 최측근들이 의심받기 좋다.

“갈 거면 같이….”

“아니. 안 갈 거야.”

“정말?”

가까스로 혐의에서 벗어난 리헤로스에게 돌아가 혐의를 씌울 미친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무사히 풀려났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욕심부리지 마. 칼리고가 찾지 않으면 쥐 죽은 듯이 살아.’

과연 칼리고가 바람대로 움직여줄지 미지수이긴 했다.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있으니 테네브가 머뭇대며 나를 불렀다.

“아키… 괜찮아?”

“아, 으응. 그보다도 너는 괜찮은 거야? 내가 여기 있어도….”

“당연하지.”

“내가 풀려났다는 걸 알면 네가 가장 먼저 의심당할 텐데.”

“…기사단은 그만뒀어.”

“뭐?”

“네 말대로 나와 그들은 완전 다른 것 같더군.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어. 나도 아킬라의 일로 추궁을 받았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신임을 잃어버려 더는 그곳에 있지 못할 것 같았지.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미안해. 너까지 끌어들여 버려서.”

“아니야.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네가 책임을 느낄 필욘 없어.”

아무리 당사자가 괜찮다고 해도 책임을 떨쳐내는 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고민을 마치고 결정을 내렸다.

“……그럼 미안하지만, 신세 질게. 아까 날카롭게 말한 것도… 미안해.”

“그건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었으니 더 이상 사과하지 마. 내 집이라 생각하고 지냈으면 해. 난…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 숨어있을 수 있을까. 나는 너무 눈에 띄어.”

“…….”

“아니다… 지금 걱정해 봤자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들킬 것 같으면 거처를 옮기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쉽겠어?”

“내가 평생… 너와 함께 도피해 줄게.”

“어…?”

“거처를 옮기기 전에 내가 한번 둘러보고,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함께 움직이면 돼.”

“…….”

“내가 너와 쭉 함께한다면… 그러지 않을까.”

“바보야. 그게 가당키나 해?”

여전히 가까이 붙어있던 그의 어깨를 쭉 밀어내자 힘없이 밀려났다.

“네 가정을 꾸리고 삶을 찾아야지. 언제까지 도망 다닐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기약 없는 도피여도 괜찮아.”

“네, 네가 괜찮아도 안 돼. 무엇보다 나는 네게 더는 빚지기 싫어.”

“왜 빚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아니라고 생각할지라도 나는 빚이야…. 못 갚은 빚이 아직 많기도 하고.”

“그럼… 너도 날 위해 뭔가 해줄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해봐.”

테네브는 고민에 빠진 듯 시선을 떨구더니 입술을 우물댄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게 무리한 부탁을 한 적이 없어 정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심각하기만 했다.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큰일이라면 당장 답해주기도 어려울뿐더러,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질 것 같았다.

‘보답을 골라서 한다니 정말 무례한 그림일 것 같은데.’

겨우겨우 벌어진 그의 입술에선 애처롭다고 느껴질 만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입…… 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봐. 못 알아듣겠어.”

“네 입… 맞춤… 이면… 될 것 같은데…. ”

“므, 에?”

턱관절이 풀려 발음이 뭉개지는 이상한 소리나 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나 뜸 들인 이유가 이해되었다.

“미, 미쳤어?”

“미쳤다는 소리를 할 만큼 심한 부탁이었나….”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입… 맞추는 게 무슨 널 위한 일이야! 더 생산적인 일인 줄 알았는데.”

“난 그거면 돼…. 많은 걸 바라진 않아….”

“하아….”

“내 생각과 달리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건가.”

“정말 그걸로… 돼?”

테네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차라리 돈이나 물질적인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테네브에게 여러 신세를 많이 졌지만, 보답이랄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성의에 답할 수 있는 길이란 게 고작 입맞춤뿐이라면, 그 행위에 크게 의미 부여만 하지 않으면 출처 불분명의 죄악감도 덜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미치겠다… 그냥 눈 딱 감고 저질러?’

결심하고선 밀려있던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자 테네브는 가느다란 호흡으로 바뀌었고 눈꺼풀이 조금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은 애달아 보이기까지 했다. 내 쪽에서 먼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눈은 완전히 감겼다.

머릿속에 다시금 곱씹었다. 입맞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행위의 일종이다. 그에게 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되놰야 했다.

‘스킨십은 그저… 인간들끼리 의미 부여한 얄팍한 규정일 뿐이라고. 그저 살덩이가 맞닿는 행위일 뿐이야.’

하지만, 당연히 테네브는 그 의미 부여를 받고 싶다는 이야기겠지.

이 어색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자니 닭살이 돋았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쪽

“아….”

그가 기대했을 만한 부위가 아닌, 뺨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테네브의 표정을 보니 기묘한 죄책감이 밀려 올라왔다.

‘아무리 리헤로스가 없다고 해도… 도저히 안 되겠어.’

입맞춤이 이 세계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제 양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이미 긴밀히 정을 나눈 관계가 있음에도 홀로 연심을 품은 사람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 행동처럼 느껴질까 봐. 그렇다면 어장 관리하는 희대의 나쁜 놈일 테니까.

‘테네브에게도, 리헤로스에게도 못 할 짓이야.’

내 신념이자 도덕적인 선을 지켜야겠다. 그걸 지키지 못할 정도로 사지에 몰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키….”

“이것도… 괜찮지?”

“응, 좋아.”

테네브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수줍은 사춘기 소년이 힘겹게 참는 미소에 가까웠다. 이 남자가 연하라는 사실을, 때 묻지 않은 풋내가 난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 같았거든, 네가 날… 혐오하게 될까 봐…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을 잠깐이지만 후회했어.”

“이 정도야 뭐….”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두, 두 번은 못 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라.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여전히 가까이 붙어있는 통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굴려댔다.

“이, 이제… 할 일 할까.”

“그래. 아키… 상처부터 보자.”

“상처는 이미 늦지 않았을까.”

몸을 감고 있던 모포를 걷어내자 보이는 것은 참담했다. 너덜너덜해진 소매는 핏물에 절여졌을 뿐만 아니라 팔에 바짝 말라붙어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테네브는 손을 뻗어 내 겉옷을 벗겨내려 하다가 멈추었다.

“그… 윗옷만 벗어볼래?”

“…너 불순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 그럴 리가. 어디까지나 치료 목적이니까….”

“그런데 왜 고개를 돌려? 치료 목적에 같은 남자 끼린데 뭐 어때.”

“…조금 달라.”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안다. 나도 고작 리헤로스의 벌어진 앞섶을 두고 난리 친 전적이 있었다.

“하하… 네가 이상한 짓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래, 믿어주니 고마운데. 자존심은 상하지만.”

“자존심 상해?”

“…아키 네가 나를 남자로 봐주는 게 아니라는 소리잖아.”

“풉.”

직설적으로 말할 줄 몰랐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냐….’

그런데 테네브와는 이런 이야기를 해도 이상하게 피하고 싶을 만큼 낯부끄럽진 않았다. 민망함보다는 미안함이 커서일까. 돌려받지 못할 애정을 쏟아주고 있고, 나는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양심에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건조한 반응을 보이면 언젠간 정이 떨어질 거라 믿었다.

“그래서 서운해?”

“그냥 그렇다는 거야.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러면 다행이야.”

“……자, 이제 상처 좀 보자.”

넝마가 따로 없는 윗옷을 벗어 내리자 온몸이 핏자국이 눌어붙어있었고, 그가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어 주었다.

팔에 검이 찔렸을 땐 그렇게 아프지 않았지만, 빗장뼈 사이에 꽂혔을 땐 죽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떠오를 정도의 고통이었기에 가장 먼저 더듬어 보았다.

“아직 얕게 흉터는 남았어. 그래도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러게, 당시에는 심장까지 찔린 줄 알았어. 그 정도로 아팠어.”

“아팠어?”

“아… 어리광 부린 거 아니야.”

“어리광 부리면 어때. 너는 늘 괜찮다, 상관없다, 안 아프다 이러잖아.”

반박할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어 다시 입술이 굳게 닫혔다. 아프다고 누군가에게 말한 것이 꽤 낯설긴 했다.

테네브는 수건을 내려놓은 뒤, 얇은 거즈에 투명한 액을 잔뜩 묻히고 환부에 천천히 눌렀다. 다행히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다.

‘아무리 회복 속도가 더뎌졌다고 해도 역시 현실보다는 빠르구나. 현실이었으면 몇 주를 앓아누웠을 텐데.'

몸이 심히 무겁긴 했다. 어디론가 급히 도망쳐야 한다면 과감하게 나를 버리라고 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일이 없는 게 최고의 상황일 것이다. 완전히 검게 변해버린 왼팔부터 어깨까지 붕대를 꼼꼼히 감아주었다. 팔을 굽히는 것은 불편했지만,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에 안정적이었다.

“테네브, 고마워. 그럼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다니?”

“기사단을 그만두고서 어떻게 먹고살려 그래?”

“퇴직금이 나와서 당분간은 버틸 수 있어.”

“그다음은?”

“이곳 목장 일을 도와줘야지.”

“그렇구나.”

“다른 일을 찾아볼까?”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내가 너를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니까.”

“……아서라.”

“진짜 그럴 생각이야.”

어디까지 책임질 생각인가. 칼리고의 눈을 끝까지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의 말은 사실상 환상에 가까웠지만, 어쩐지 웃음 나오게 만든다. 늘 그랬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웃음이 터지는데, 항상 그는 진지했다.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첫인상보다 더했다. 인질로 잡혔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왜 그 집단을 쫓았었지?’

이유가 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리헤로스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아키, 이제 밥 먹을 거지? 약 먹어야 더 빨리 나을 수 있어.”

“아, 으응. 그럴게.”

테네브의 권유에 곱씹던 생각은 완전히 멈춰버렸다. 심해처럼 깊은 무의식에 잠겨있던 목표를 찾아내는 데에 실패하였지만, 이상하게도 답답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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