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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03화 (103/127)

103화

기사단 건물 뒤로 향하는 작은 문을 빠져나오자 마차가 보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차에 비해 아주 작은 크기였지만, 지붕이 있어 몸을 숨기고 이동하기엔 적합해 보였다.

“아키, 답답하겠지만….”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테네브는 내 물음에 입을 닫았다. 처형장으로 가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애초에 테네브가 날 처형시키기 위해 이 새벽에 달려왔을 리는 없고, 칼리고라면 누구보다 요란스레 죽이려 했을 테니 테네브만 보냈을 리 없다. 그의 손을 떠나 리헤로스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테네브가 겨우 꺼내주었는데, 또다시 내 마음대로 행동했다가 벌어지는 상황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미 저질러놓은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기에 멍하니 그가 몇 겹씩 감아주는 모포를 얌전히 받아들였다. 마차 뒤 칸 구석에 앉아선 둘둘 감긴 모포에 얼굴을 묻고만 있었다. 덜그럭덜그럭 낡은 바퀴들이 가까스로 움직였다. 머리통은 중심을 잃고 짐칸을 감싼 나무판자를 쿵쿵 찧으며 힘없이 흔들렸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더 이상 저항할 수 있는 정신력이 남아있지 않은데,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나를 포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저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인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리헤로스가 아닌 나인 것처럼 모든 게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대체 왜.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이젠 신을 원망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기력했다.

짐칸에서 마차가 지나온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은 어둠은 걷히고 천청색의 하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금색의 구가 찬란히 떠오르며 시야를 가리는데, 이는 가까스로 잊으려 했던 한 사람을 계속 떠올리게 했다.

왜 너는 내 주변에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지. 아니다. 네가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잊지 못하는 걸까.

‘그래, 그게 정확하겠지.’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 꼭대기에 다다르기 전에 마차는 멈추었다. 테네브는 짐칸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절뚝거리며 마차에서 내리니 보이는 것은 어느 마을 동산 위에 있는 목장이었다.

목장의 규모에 비해 키우는 짐승은 적었고, 수도 라이오펠이나 세르뷔에보다 훨씬 조용한 마을이었다.

“여기에 있으면 아무도 찾지 못할 거야.”

“…….”

“올라가서 한숨 잘래?”

“…….”

“하아… 일단 올라가자. 여기에 있으면 누군가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그는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생활감이 많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친척이 운영하는 목장인데, 지금은 내게 맡겨두고 멀리 떠났어. 그러니 당분간은 누가 찾아오진 않을 거야.”

“…….”

“그러니까 아키, 기운 차리는 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자.”

“살아갈 방법….”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네브는 작은방으로 안내해 주었고, 나는 모포를 두른 상태 그대로 구석에 가 앉았다.

그리고서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문 밖에서 들리는 짐승들의 울음소리, 바람 소리만 들으며 앉아있을 뿐이었다. 방 밖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테네브는 곧이어 식사를 가져왔고 내 쪽을 힐끔 쳐다보다가 조용히 식사를 두고 나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식사. 먹어본 지 오래되어 이젠 어떤 맛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입안은 모래알을 자근자근 씹는 것처럼 깔끄러웠다. 리헤로스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입맛이 없었다. 모포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젠 꿈에 ‘아크리스’가 찾아와도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계속 잠들려고 노력했다. 죽음을 이토록 원하는데 이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지겨워….’

흐려진 초점은 방의 아무 곳에 던져두었다. 사물 아래에 거뭇거뭇 그려져 있던 그림자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샛노랗던 자연조명은 어느덧 주홍색으로 변했다. 테네브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아키… 괜찮아?”

“…….”

“약 사 왔어. 상처 좀 보….”

테네브는 차갑게 식어버린 식사를 본 듯했다. 그는 조용히 식기를 달그락대며 정리했고 내 쪽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아키, 아파?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아니.”

“그런데 왜 굶고 있어? 이러면 약도 못 먹는데….”

“내가… 먹을 자격이 있나.”

“그게 대체…!”

테네브의 높아진 목소리에 눈만 굴려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을 가까스로 삼키는 것 같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생존에 자격 같은 게 어디 있어.”

“…온 세상이 나더러 죽으라고 종용하는데, 내가 살아남으면 많은 사람이 고통받아. 너도…… 리헤로스도….”

“…….”

리헤로스를 생각 속에 담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정신적으로 더욱 벅찼다. ‘아크리스’에게 목을 졸렸던 것처럼 점점 숨이 차올랐다.

“리헤… 로스….”

“아키.”

“리헤로스… 아아아… 나 때문에….”

“아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없다. 오로지 그것은 지독한 악몽에서만 존재해야 했다. 나에게 보여주던 꿈들, 그게 모두 예지몽이었던 건가.

‘그게 미래를 예측한 것이었다면… 결과가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피하지 못했어. 내 욕심 때문에!’

왼 가슴도 왼팔도 욱신거렸다. 고통이 가중되어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윽… 으…! 흐윽… 아…!”

“아키! 아키! 정신 차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누구를… 누구를 용서 못 하는 거야 난…!”

“아키 제발! 나 좀 봐!”

테네브는 나를 잡아 일으켰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슬픈 것인지, 화난 것인지, 놀란 것인지 모를 복잡한 얼굴이었다.

“리헤로스… 그 남자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는 거야?”

“…….”

“그가 돌아올 수 있다면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지만….”

“…….”

“리헤로스… 죽은 거 아니야? 어떻게 됐는지 말해주지 않았잖아… 그러면… 그러면 죽은 거 아니야? 아니었어?”

테네브의 입술은 앞니 안으로 말려 들어갔고 피가 날 듯 잘근잘근 짓씹고 있었다.

“너 설마…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는 거야?”

“…….”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는 살아 있어.”

“…뭐?”

시간이 완전히 멈춰버린 듯한 정적이었다.

“왜 숨겼어…?”

“…난 그가 죽었다고 말 한 적 없어.”

“그러니까 왜… 리헤로스 행방을 물었을 때 대답을 안 했잖아.”

분명 죽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연중에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 아니던가. 그렇기에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리헤로스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기도 전에 테네브에 대한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울분이 향할 곳이 정해지니 온몸을 축축 늘어뜨리던 무기력감은 사라져버렸다.

“너를 믿고 의지했는데…! 내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지금?”

“…….”

“정말 질리게 한다….”

“나로는 안 되는 거야?”

“뭐?”

“난… 너에게 있어 리헤로스의 발끝도 못 미치나? 그가 없을 때 대용으로도 못 쓰는 그런 존재란 말이야?”

내 양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현재의 내 상태론 그를 뿌리칠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혹여나 가해질 폭력이 두렵기도 했다.

“윽…!”

내동댕이칠 줄 알았던 걱정과 달리 갈비뼈가 눌릴 정도로 와락 끌어안아 버린다.

“네 마음을 온전히 갖지 못한다면, 그와 공유라도 하고 싶었어. 그게 불가능하다면…! 날 이용해 줬으면 싶었어….”

“테네브…! 이거 놔!”

“그조차도! 내게 허용되지 않는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널 이용하지 않아…!”

“날 이용해 줘. 차라리 그래 주었으면 좋겠어…. 네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갖지 못하면 파괴해버린다는 것도 아니고, 리헤로스의 다음이어도 괜찮다고, 그저 어떤 감정이든 자신에게 향해달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분노가 가시니 얼떨떨해졌다.

이렇게나 감정이 순식간에 휙휙 변하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테네브를 보니 더욱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의 어깨는 조금 가늘게 흔들렸다.

“테네브.”

“…….”

“울지 마. 나는….”

“…싫어. 말하지 마.”

“…….”

“네 대답을 들으려고 한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면 안 될까.”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눈치를 챈 걸까. 어깨는 테네브의 눈물로 축축해져 있었다.

어디를 찾아보아도 나의 모난 성격을 좋아해 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두 사람에게 잘해주려 애썼고, 그것이 다행히도 마음을 관통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두 마음을 한꺼번에 욕심내는 한심하고 저열한 인물은 아니다. 더군다나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여주인공 롤을 취할 생각도 아니었으니까.

“……테네브.”

“…….”

“고개 들어봐.”

테네브는 내가 봐온 어떤 남자보다도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우직한 생김새의 남성이지만, 내 앞에서는 감정과 눈물을 숨기지 않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의 모습은 보호본능을 자극하여 화를 내기 민망할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을 자아냈다.

어쩌다가 상황이 역전되었을까.

“너를 다그칠 생각은 없었어. 단지… 리헤로스는 나뿐만 아니라 너의 동료이기도 하잖아….”

“흐으…….”

“그가 난처한 상황에 닥쳐 있다면, 우리가 힘을 합쳐 구해야 하지 않을까.”

“…….”

“그러니까… 리헤로스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내렸다. 떨림은 점차 잦아들었고, 고개를 들어 젖은 얼굴로 마주 보았다.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몰라.”

“어째…서?”

“어디 있는지 모를 뿐이야. 리헤로스는 단장… 칼리고와 조금 치고받았을 뿐이지, 너처럼 심한 일은 당하지 않았어. 네가 뇌옥에 갇혔을 때… 리헤로스의 죄를 묻는 재판이 열렸었는데….”

“그런데?”

“이드랑제 백작이 찾아왔어.”

“스피나… 이드랑제가?”

“백작은 얼굴만 잠깐 비추긴 했지만, 리헤로스를 변호해줄 사람들을 꾸려서 왔어. 아… 그리고 이드랑제 기사 중 고위 마법사를 데리고 와서 무척 인상적이었지.”

“…….”

왜 스피나가 리헤로스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가 생각하기 무섭게 이유는 금세 떠올랐다.

‘이드랑제 가문의 이미지를 위한 것이겠군.’

우리를 적극적으로 원조해 주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연회에 초대해서 스폰서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았던가. 아마 명실상부 알리엔토 대륙의 군수산업을 선도하는 이드랑제 가문이 입는 손실은 치명적일 것이다. 자칫 수틀린 칼리고가 다른 귀족 가문을 끌어들여 밀약해 몰락시키고자 한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스피나까지 피해 볼 줄이야….’

그녀를 볼 낯이 없었다. 리헤로스와 스피나는 절대 무결한 사람이건만, 나의 출신성분 하나로 인해 평화에 이바지한 사람들이 절벽 끝까지 몰려있는 상황은 모로 보나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용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금언 마법을 걸어버리더라고. 불리한 진술을 뱉을까 봐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리헤로스의 숨김없는 성격이라면 변호에 불리한 말만 늘어놓았을 게 뻔했다.

‘테네브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나쁜 마족이 아니라고 설득을 한다던가….’

이제 그 논리로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칼리고는 이미 나를 구속할 때도 잠재적 위험성만을 가지고 죄를 묻지 않았던가. 그래서 내 피를, 심장을 완전히 뽑아 갈아치우지 않는 이상 죄의 무게는 덜어지지 않을 것이라.

“그 덕에 추궁도 없이 잘 빠져나갔어. 칼리고는 어떻게든 그에게 죄를 묻겠다 했지만… 이드랑제의 가세가 기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거야. ”

“그렇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갈 건가?”

“어딜…?”

“세르뷔에에 있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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