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이 가까스로 정리되나 싶었는데, ‘아크리스’로 인해 다시금 헤집어졌다. 엉망진창 덧씌워지기만 하는 이물질은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언제까지 리헤로스의 잔상에 휘둘릴 거야? 너도 이기적으로 살 필요가 있어.”
“…….”
“너도 네 자리, 네 이익을 취해야지.”
“나는… 충분히 이기적으로 살아왔어.”
내게 호감을 느끼는 남자들,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하는 두 사람에게 고집을 부리다가 위험에 빠트리기만 했다. 늘 경고했지만, 괜찮다며 한사코 강행했었다. 이것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게임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는 나의 오만과 이기로 인해 잘 흘러가고 있던 메인 스토리가 엇나간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아, 아니라니까. 이런 말 하는 놈치고 이기적인 놈 한 명도 없었어. 너도 그렇지. 철저히 이용당하기만 했으면서 네가 저지른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 죄책감을 느끼잖아.”
“아니야. 오히려….”
“정신 차리라고! 이 머저리 새끼!”
“…….”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건 뭔데? 이대로 처형대 올라가서 눈물 없이 못 보는 서사라도 읊고 싶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뭔데?”
“내가 얻는 것은 없겠지만… 꿈속의 너와 해결을 볼 게 아니라 저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야.”
“…….”
“끝맺음을 이렇게 하면 안 돼.”
“안식할 기회를 줘도… 하아.”
아크리스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으며 콧대를 구겼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라도 결심은 변치 않았다. 내가 시작한 일은 내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기사단에서 선택한 처형 방식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떤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래야만 했다.
내가 처형대에 올라 해야 할 것은 그는 무고하다는 것을 증명한 뒤, 희생하기였다.
‘리헤로스가 날 어떻게 생각하게 되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이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만이라도 안온한 삶을 영위하길 바라는 것 아니겠는가. 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 줄 몰랐다. 누구보다 내 안위가 가장 중요하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면 리헤로스가 나를 바꿔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를 만난 뒤로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너랑은 말이 안 통해.”
“……그러게, 너와 나는 가치관이 너무나도 달라서 대화해도 끝이 없어. 그러니 포기해. 아크리스의 몸으로 곤란하게 만든 건 미안하게 됐어. 그래도… 네가 원하는 것은 안식이고, 그 안식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참아줘.”
“…하.”
“어차피 네가 나만큼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니잖아. 그 고통은 온전히 나만 느끼니까….”
“또 위선 떠는군.”
“…….”
“어쩔 수 없지. 강제로 하는 수밖에.”
“강제라니….”
“지금 당장 끝을 내자.”
“뭐라고?”
놈은 순식간에 내 목을 졸랐다. 턱 막히는 숨통, 덮쳐오는 힘으로 넘어졌고 조여드는 손을 잡아떼어내려 애썼다. 핏대가 선 팔뚝은 파드득 진동할 정도로 온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찍어 누르고 있는 팔을 떼어낼 재간은 없었고, 그저 놈의 손목만 애처로이 긁어대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발, 애먹이지 말고 죽어.”
“컥…! 큭!”
“제기랄, 수치스러워!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그극… 헉, 컥…!”
“너 때문에 모두 엉망이야. 원래 죽었어야 할 육신이 여전히 머무르고 있을 때부터 잘못된 게지. 그러니 애초에 제거해 버렸어야 했어.”
“극, 너헉…!”
순간 그의 말에 이질감을 느꼈다. 왜지?
무언가 ‘아크리스’라면 하지 않을 말이 섞여 있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려 애썼지만, 온몸의 핏줄이 터져버릴 듯이 조여 들어오는 목덜미로 인해 뇌에 산소 공급이 어려워졌다. 기억의 동아줄은 단칼에 잘려 나갔고 오로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이었다.
“컥…! 컥!”
막힌 목 끝에 고인 타액이 거품으로 일어 뺨을 타고 흘렀다.
정말 이대로 꿈속에서 죽어버리고 마는가. 꿈에서 죽는다고 육신이 죽을까 싶었지만, 무의식의 형상을 통해 죽지 않으란 법은 없었다. 놈이 목을 조르는 것은 죽음에 이를 수 있겠단 생각이 미칠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니 말이다.
눈앞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니 놈의 팔을 긁어대던 손도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리헤로스….’
주마등 속에 건져낸 단 한 장면은 햇살처럼 눈 부신 리헤로스의 모습이었다. 날 안정케 하는 그의 미소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때─
“크윽! 뭐야…!”
바닥에서 흰 손이 쑥 올라오더니 몸을 감싸 안았다. ‘아크리스’의 살의가 담긴 손길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마치 보호하려는 듯 끌어안는 움직임으로 느껴졌다. 손에 이끌려 투명한 바닥 속으로 나는 천천히 스며 들어갔다. 꼭 따뜻한 진흙 속에 들어가는 듯한 포근한 기운이 몸 전체를 뒤덮었다.
“안 돼! 돌아와!”
‘아크리스’는 바닥을 세차게 내려치며 포효했다. 일그러진 얼굴엔 그늘이 져 더욱 험상궂었다.
이 순간 이후로 ‘아크리스’와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 만날 수 있다면 놈이 저렇게 절규하지 않을 테니까.
“…….”
흰 공간에 들려오던 불쾌한 웅웅대는 소리가 아닌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백색 소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곳과 대비되는 어둠 속으로 깊게, 더욱 깊게 끌려들어 가고만 있었다.
그런데 두렵지 않았다. 이 공간에 채워진 온기는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들어?”
소음 사이를 가로지르고 귓전에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는 몽롱한 정신을 들게 했다.
“…정신이 들어? 눈을… 떠….”
흔들림 없는,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귀에 익어. 그런데… 누구였지?’
진창 속을 헤치고 달려와 주는 사람, 그런 모습이 연상되는 익숙함이었다.
“눈을 떠.”
…
그 말을 듣자마자 홀린 듯 눈이 번쩍 뜨였다. 여전히 눈앞은 칠흑 같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금속 방어구만은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해주는 장치였다.
“아윽…! 헉… 헉….”
"아키! 정신이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이 부르는 호칭으로 알 수 있었다.
‘테네브.’
요란스레 잘그락대는 소음은 포박한 사슬을 풀어내는 반가운 소리였다. 몸무게로 인해 팽팽히 당겨져 있던 팔이 축 늘어졌다. 이미 관절이고 근육이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난 것만 같아 제 기능을 할 수 있을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아키, 괜찮아? 지금 네 상태가….”
“…너 혼자… 온 거야?”
“…….”
“…리헤로스는?”
“하아아….”
그의 한숨은 어딘가 모를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이곳에 끌려오기 전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안 좋은 일을 당한 게 아닐까. 최악의 전개가 번개처럼 머릿속을 내리꽂았다.
“테네브…?”
“…….”
“테네브…!”
“…….”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줘…!”
“우선은… 나가자.”
“…….”
망설이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경고했던 아크리스의 말이 맞았구나.
내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구나.
나 때문에 리헤로스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고 말았구나.
충격을 금치 못했다.
“아… 아아….”
“아키, 나한테 기대.”
“내가… 나는….”
“후우우….”
공황에 빠져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나를 테네브가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짊어졌다. 한 손엔 횟대를 잡고 감옥을 박차고 나왔다.
‘내가 이리 쉽게 들어 올려질 정도로 가벼웠던가.’
어찌 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리헤로스의 안위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무사히 살아남길 바라서 여태 살아있는 것인데, 애초에 전제 조건이 다르다면, ‘아크리스’ 손에 죽는 게 훨씬 편했을 것이라.
나를 짊어진 상태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 테네브에게 미안했다. 삶의 의지가 없는 사람을 살리려는 노력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려줘.”
“뭐?”
“나… 그냥 내려줘.”
“…안 돼.”
“난…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
“살아있는 데에 이유가 필요해?”
“……필요해.”
이유가 없으면 무엇 하려 생고생을 하겠나 싶었다. 툭 치면 무너져내릴 정신을 지지해줄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테네브는 나를 내려주지 않았고,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그저 계단을 오르는 데에 열중했다. 계속해서 흐느끼듯이 내려달라 애원했다. 그의 등에 매달려 징징대는 것뿐이지만, 몸이 흔들릴 때마다 상처가 눌리는 바람에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
본인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왜 사과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의 사과를 듣고 나서 내려달라고 떼쓰기를 멈추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생리적으로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나마 지상으로부터 가까운 지하 감옥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죄수들의 설움과 분노가 섞인 고성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조용히 중얼대는 소리뿐이었다. 반지하 창문으로부터 보이는 하늘은 짙은 남색의 빛깔이었다.
“새벽… 이네.”
거칠어진 기도가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니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카랑카랑해져 마치 마물의 목소리 같았다. 그런데도 테네브는 큰 반응 없이 나의 혼잣말에 다정히 대답해주었다.
“…그래. 그날 이후로 사흘이 지난 새벽이야. 막 경비가 줄어들어서 널 데리고 나올 수 있었어.”
“사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흘이라니. 간혹 잠이 들 때면 시간이 점프 되는 경우가 있었다. 사흘 동안 잠들어 있었다면, 리헤로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긴 했다.
“아윽… 크흑….”
물밀듯 밀려 올라오는 감정은 견디기 벅찼다. 억지로 내는 것이 아니라 가까스로 삼키고 있는 기도를 비집고 흘러나온 울음소리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테네브는 낮게 읊조리듯 내게 말했다.
“아키, 네 곁엔… 내가 있어 줄게. 내가… 네 삶의 이유가 되도록….”
테네브는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유독 오늘 새벽 공기는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