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현 상태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아킬라는 리헤로스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뒤쪽에 자리 잡은 나와 테네브에게는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우리는 무력함을 느끼고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모조리 부숴버릴 기세로 찍어대는 아킬라와 지면에 가해진 충격을 이용하여 공중 공격을 시도하는 리헤로스의 싸움은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점점 리헤로스가 디딜 바닥은 사라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리헤로스가 빠르고 벽을 타고 공격을 시도하려고 한들 그것을 구사할 수 있는 체력은 한계가 있었다. 완전히 고갈되기 전에 뭐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큿!”
그는 집중력이 분산되고 있는지 팔의 공격이 여섯 개가 들어온다고 하면 두 개의 공격을 입게 되었다.
옷이 찢어지고, 살갗에 얕게 피가 밸 정도의 상처이긴 했으나 상처는 중첩될수록 약점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 쪽과 달리 부상을 아파할 여유도 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피하기 바빴다.
멀찍이 후방 점프를 한 후에도 아킬라는 재빠르게 움직여 순식간에 리헤로스의 앞으로 다가가 휘둘러댔다.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리헤로스에게 실내, 그것도 이리 좁은 공간은 불리했다.
‘내가 던전 공략 파훼법을 찾을 게 아니라, 당장은 리헤로스를 지원사격해야겠어.’
뒤쪽에 바짝 붙어서는 쉴 새 없이 난사해대는 굵은 가닥의 팔 중 하나를 단검으로 막아냈다.
─까드드드드득
단단한 표면을 긁으며 힘 싸움을 했지만, 돌기가 후두두 잘려 나갈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윽… 테네브! 팔을 최대한 막아줘!”
“알겠어!”
여섯 개 중 두 개의 유효타였으니, 두 사람이 각각 하나만 맡아도 훨씬 수월할 것이라.
“성가시다. 성가셔.”
공격이 막힌 아킬라는 감정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이어 등껍질이 벌어지더니 부와아앙 굉음을 내며 날갯짓했다. 그저 벌레의 애교스러운 바람이 아닌 돌풍에 가까운 바람을 일으켰다.
덕분에 측면, 후방에서 버티고 있던 나와 테네브는 약 10m가량을 구르며 날아갔다.
“으윽…! 젠장!”
“큭! 아키! 괜찮아?”
“응, 이 정도쯤이야. 가볍게 넘어진 것뿐이야.”
몸을 일으키던 그때─
─텅!
리헤로스 검의 궤도 끝에 검고 번들거리는 무언가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이내 부양하던 그것은 흡사 양철 주전자를 떨어트린 것 같은 요란한 소음을 동반하며 바닥에 구른다.
눈을 가늘게 만들어 물체를 살피니 아킬라의 팔이었다.
“먹혔어!”
“그 단단한 팔이 잘리다니, 어떻게 한 거지?!”
리헤로스의 미간은 좁혀졌고, 턱의 근육은 도드라졌다. 그가 던전 파훼법을 간파했을 때 나오는 초 집중 상태 중 하나였다.
리헤로스는 자세를 고쳐 잡더니 팔의 끝부분부터 돌기를 깎아내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왜 팔을 자르지 않고 표면만 다듬는 거지?”
“아, 아니야! 이유가 있어.”
팔꿈치까지 돌기를 깎아내면, 깎인 곳까진 둔탁한 소리와 함께 힘없이 잘렸다.
‘그렇구나! 돌기가 약점이었어. 몸을 보호해 주는 보호막 역할이었던 건가!’
세 개의 팔을 깔끔히 절단하자 리헤로스는 움직임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전신에 난 돌기를 언제까지 일일이 깎아낼 수 있을까. 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그전에 지쳐버린다면?
‘이래서 인원수 제한을 안 둔 건가. 더러운 프렉탈 놈들은 언제까지 이딴 꼼수를 쳐 부릴 생각이야.’
나와 테네브도 돌기를 깎아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놈은 주기적으로 날개를 펼쳐 우리를 날려버렸다.
구르면서 어딘가는 삐끗하고, 부딪히고, 10m의 거리를 반복해서 뛰어가려니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크으윽… 젠장! 이래서는…! 답답해!”
“그렇다고 셋 다 전방에서 깎기에는, 리헤로스의 전투 공간이 좁아져. 힘들어도 우리가 여기에서 지원해줘야 해.”
리헤로스도 후방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우리의 사정을 눈치를 챈 모양인지, 끝도 없이 팔을 잘라내는 공격은 멈추었다.
아마 내가 겪어온 그의 전투 스타일을 추측하자면, 단번에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공략 요충지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내 추측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헤로스는 놈의 배를 향해 검을 앞으로 질렀다.
─까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득
앞에서 보는 모습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마 같은 방법으로 깎아내는 중일 것이다. 나와 테네브는 리헤로스가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모두 베어낼 수 있도록 밑 작업을 계속했다.
“아… 아아아! 성가셔! 성가셔 성가셔!”
옆에서 보았을 때, 놈의 배가 양옆으로 활짝 열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성공했나?!’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있는 리헤로스의 안색은 전혀 성공한 표정이 아니었다. 아킬라의 몸이 뒤로 크게 반동하며 흰 점액으로 뭉쳐진 무언가를 바닥에 왈칵 쏟아냈다. 끈적이는 점액은 바닥 아래로 스르르 스며들어 사라졌고, 그 안에 있던 검은 벌레가 수백, 아니 수천 마리가 일제히 날아올라 리헤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시야를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크고 검은 구체처럼 보였다. 아킬라를 막을 새도 없이 남은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 ‘구체’ 안으로 뛰어들어버렸다.
“리헤로스!”
섣불리 안으로 뛰어들 수 없었다. 테네브가 구체를 향해 검을 던지려고 하자 나는 만류했다.
“리헤로스가 맞을 수도 있으니까…! 기다려보자. 괜찮을 거야.”
“아키…!”
“정말… 정말로 괜찮을 거야….”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울렁거려 토기가 올라왔다.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여전히 피가 죽죽 흐르고 있는 왼손을 쥐락펴락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찬란한 금빛의 아우라가 쾅! 하며 발산하였고, 검은 벌레 떼는 모두 증발하여 사라졌다.
그 수라장 사이에 눈에 띄는 그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니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리헤로…!”
하지만 벅차오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차마 끝까지 뱉지 못했다.
리헤로스의 검은 놈의 배를 깊게 관통하지 못했지만, 아킬라의 긴 팔 두 개는 리헤로스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둘이 구체에 들어간 지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리헤로스의 옆구리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쿠윽, 헉….”
가까스로 숨소리를 내뱉은 리헤로스의 입에서는 붉은 줄기가 흘러내렸다.
“아… 아아…. 안….”
귓가엔 사이렌 소리 같은 이명이 들렸다.
눈앞은 점점 새카매졌다.
충격으로 인해 신체는 활동하기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뇌를 통째로 들어낸 것처럼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당장은 멈춰버린 숨을 다시금 쉬고 싶었다.
“아킬라!!”
─이 와중에 붉은 휘장이 옆 시야를 치고 지나갔다.
‘안 돼, 너까지 가면…!’
그리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통에 찬 신음에 가까운 음성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아킬라는 리헤로스의 몸통에 꽂힌 팔을 쑤욱 뽑아내고는 곧바로 테네브의 검을 올려쳤다.
─쩡!
그의 검은 이미 닳고 닳아버린 탓인지 두 동강 나버렸다.
테네브는 짧고 뭉툭해진 검으로라도 대항하려 하는 듯했지만, 아킬라는 테네브를 가볍게 번쩍 들어 올리더니 벽과 바닥에 쉴 새 없이 내리쳤다.
“감히! 누구에게 감히 대항하려는 것이냐! 미개하고! 더러운!”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인지 몇 번이고 몸을 찔러댔다.
선혈은 공중에 나풀대듯 휘날렸다.
스너프 필름을 보는 것 같은 충격적이고 잔혹한 모습이었다.
‘난… 왜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내 손에 있는 것은 얇아 빠진 단검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왼손은 만신창이로 적극적인 공격을 취하는 것이 어려운 상태였다.
아킬라는 테네브에게 분풀이하는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쓰러진 리헤로스와 푹 패인 구덩이 속에 생사가 불분명한 테네브까지 당장 달려가 두 사람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다.
“성가시고 미개한 인간들 같으니!”
“리헤로스…! 테네브…!”
“아직도 도망가지 않았나?”
“하… 하아… 허억….”
“신의 뜻을 거역한 너도 죽여주마. 카르말록스께서 널 심판할 기회를 주시는구나!”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아닌 놈이 나를 통해 각성해놓고 누굴 심판하겠다는 것인가.
‘분한가?’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나자 분노가 치미기 시작했다.
‘넘볼 수 없는 힘의 차이를 보여주어라.’
주제도 모르는 것은 아킬라인데, 왜 내가, 리헤로스와 테네브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너는 이 힘이 필요할 것이다.’
‘너는 이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킬라는 날개를 펼쳐 내 쪽으로 훌쩍 뛰어왔다.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다. 너도 잘 알지 않은가.’
두 사람을 해치웠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아킬라가 휘두르는 팔은 놈의 날갯짓만큼이나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내 머리 쪽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너덜너덜한 왼손으로 놈의 팔을 덥석 잡았다.
“으? 뭐지? 어째ㅅ….”
놈의 의문 섞인 말은 끝맺기 전에 팔을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꺾어버렸다.
놋쇠를 한숨에 꺾어버리는 금속이 늘어나는 것 같은 기묘한 소리를 냈다.
“크에! 에에엑!”
놈은 꺾여버린 팔을 꼬리 자르기 하듯 몸에서 분리해버렸다.
얼떨떨한 신음을 내며 멀찍이 떨어지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둘 수 없어 나는 곧바로 놈에게 따라붙었다.
양옆으로 갈라지던 배를 보니 세로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아마 이 모양대로 벌어지는 것이리라.
왼손으로 그 절개선에 꽂아 넣었고, 오른손을 보태어 양손으로 찢어 벌리듯 개복했다.
놈은 더 이상 성대를 사용한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컥, 컥 하는 무언가에 막힌 듯한 소리만 반복했다.
─투투툭
벌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배 껍데기가 붙지 못하도록 완전히 떼어 던져버렸다.
그리곤 그 안에 있는 흰색의 알 주머니를 잡아 뜯어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던졌고, 발로 짓밟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점액이 사방으로 튀겼다.
‘너는 이 힘을 잊지 못할 것이라.’
뱃속에 자리 잡은 뜨겁고 뭉클한 살덩이들을 맨손으로 해체했다.
난자하는 선혈은 눈으로 들어가 시야가 완전히 붉어졌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놈의 몸은 어느샌가 축 늘어져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리헤로스와 테네브에게 가해진 폭력이 떠올라 여전히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몸통에 붙어있는 머리를 떼어 바닥에 내던졌고, 왼 주먹으로 완전히 으깨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헉… 헉….”
힘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일까, 양손을 내려다보니 손뿐만 아니라 전신이 덜덜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옷의 원래의 색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팔뚝으로 얼굴에 흐르는 핏줄기를 닦으려 했지만, 전부 젖어있어 도움 되지 않았다.
“리헤로스…! 테네브…!”
복수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두 사람의 상태가 중요했다. 리헤로스가 죽었으면 어쩌나. 당장 가지고 있는 회복약도 없는데, 엉금엉금 그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즈이이이잉
코앞에 붉은색의 포탈이 열렸고, 그곳에서 나온 검은 부츠 앞코가 내 턱을 아주 강하게 걷어찼다.
“으윽!”
일반적인 사람이었으면 턱이 빠졌을 정도로 아주 정확히 노렸으며, 살의를 담은 공격이었다. 힘이 완전히 빠졌기에 옆으로 나자빠진 나는 턱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드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늘 이런 때에 등장하는 붉은 눈의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고…!”
“그 더러운 입으로 이 몸의 고귀한 이름을 지껄이는군.”
칼리고는 짐승 다루듯이 내게 채찍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속도를 눈으로 좇지 못한 걸까 어두운 곳에서 점멸하는 탓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차례 내 전신을 찢어내듯이 갈겨댔다.
아마 칼리고가 쥔 채찍은 마 도구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채찍도 아프지만, 저것은 뼈까지 울리는 고통을 동반하였다. 그랬기에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는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고 바닥을 기는 것밖에 못 했다.
“역시, 살아있었군. 마왕.”
“윽…! 아악…!”
“나 글라디우스 기사단장 데반레르 델 칼리고. 아크리스를 1급 국가 치안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