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저게 아킬라… 라고?”
“아킬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흐으… 으… 나왔다. 키힉.”
“아킬라!”
테네브는 답 없는 그를 애타게 부르기만 했다. 아킬라의 입은 마침내 열렸지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서 집중해야만 들렸다.
“응, 그럼… 난 갈게.”
“어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려는 거야?”
“그래.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단장님이 오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라. 거기 너, 단장님께 긴급 전서구를 보내.”
“아, 알겠습니다!”
나자빠져 있던 병사는 안 움직여지는 팔다리를 가까스로 가동하며 엉거주춤 달려 나갔다. 아킬라는 침울한 목소리로 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갈 거야.”
“아킬라.”
“개벽, 모든 것은 물에서 시작했고, 인류는 구원받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쉬이이…. 피는 가장 진한 증명. 농도가 짙을수록 바다는 어두워진다. 생명, 경외, 찬미.”
“…어이가 없군. 촉망받던 기사가 이리 망가질 줄이야.”
“흐… 흐흐.”
아킬라는 우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별것 아닌 행동임에도 위화감이 든다 싶더라니 손톱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관찰하고 있던 손톱 안에서 긴 더듬이와 반질거리는 표면의 가진 고동색 벌레들이 쏟아져 나왔다.
“으윽!”
“아킬라!”
벌레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다고 여기는 종 중 하나였기에 온몸에 소름이 올랐다.
바닥을 새카맣게 매울 정도로 많은 수의 벌레를 해치고 리헤로스가 가장 먼저 뛰어나갔다.
“하앗!”
그가 지나간 자리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잔상이 남았다.
백금색의 검은 영창 없이도 금색의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가로로 크게 휘두르자 반달 모양의 검기는 순식간에 전방을 향해 뻗어나갔다.
공기를 가르고 지나간 검기는 저공비행하는 전투기처럼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켰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벌레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태워졌고 그 끝에 있는 아킬라의 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잘려 나갔다.
─철퍽
양팔이 잘린 아킬라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 아악! 그아아악!”
“리헤로스 잘했어!”
“히, 킥… 으큭…!”
“고작 그딴 걸로 우리 용사님한테 대항하려고 했냐? 신한테 더 좋은 능력 좀 달라고 하지 그랬냐.”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상황을 종결시켜버린 리헤로스가 그저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거만을 떨 수 있었다. 역겹게 생긴 벌레들도 한꺼번에 처치해버리는 능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이제 어떤 놈이 등장하더라도 리헤로스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경, 일어나세요.”
여전히도 다정한 리헤로스는 아킬라의 어깨를 감싸 일으키려 했다. 리헤로스가 원하는 거라면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반대편인 왼 어깨로 다가가 멱살 잡듯이 쥐고는 잡아당겨 올렸다.
“그래그래. 자, 일어나. 칼리고가 오기 전에 감옥으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또 몸을 구겨서 나오면 어쩌지?”
“아, 그, 뭐 있다지 않았어? 지하 감옥보다 아래에 있는 감옥.”
“물리적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이 맞다면 그렇게 해야겠네.”
“그건 잘 모르겠는데… 테네브, 너도 그거까진 잘 모르지?”
“어… 미안하다.”
“아니야. 일단 가보지 뭐. 아까 그 병사 아직도 안 왔나? 걔도 같이 가면 좋겠는데.”
아킬라는 실실대던 웃음을 뚝 그치더니 퀭한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너.”
초점이 흐린 눈동자는 어딜 보고 있는 건지 모호할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 당연하지만 내 쪽으로 돌리고 있으니 내게 한 말이긴 할 것이다. 어차피 갇힐 놈인데 무슨 변명을 할 생각인지 들어보아야겠다 싶었다.
“뭔데?”
“우리의 신, 카르말록스께서 주신 능력은 어쨌지?”
“…무슨 개소리야?”
“으응, 흠… 하아… 그렇군….”
아킬라는 잘린 팔을 귓가에 가져다 대며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였다.
혹시 아주 작은 소리를 놓치고 있었나, 나 역시 집중해 보았지만, 그 어떤 미세한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 놈을 내려다보니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아직 있어.”
“뭐가 있다는 거지?”
“힘.”
“미칠 거면 곱게 미치지, 그래?”
“신께서 주신 힘. 아직 남아있다고 해.”
“누가 그래? 이 망상증 환자야. 힘 따위 없어진 지 오래라니까?”
오히려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힘을 앗아가 버린 바람에 내 딴에는 심히 억울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미지의 존재가 원망스러웠다.
“으응…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더 들어주기도 지친다. 가자.”
“말씀해 주셨다. 네 의지가 약해져서 못 쓰는 것일 뿐이라고.”
“뭐?”
“흐킥! 크크큭…! 멍청이, 나라면 그렇게 안 쓸 거야.”
칼리고도 모자라 미친 졸개도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인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 놈을 한 대 쳐버릴 뻔했는데, 리헤로스가 아킬라를 잡아당겨서 나를 떨어트려 놓았다.
“경! 그만하십시오.”
“안 쓸 거면 나에게 줘.”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X발 못 들어주겠네!”
“으아아악! 나한테 달라고!”
아킬라는 몸을 괴상하게 비틀며 리헤로스의 포박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내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왼팔을 들어 놈을 막았고, 놈의 치아는 정확히 왼팔을 물었다.
“큭! 이… 미친 게…!”
“크리스!”
“아키!”
분명 이전에도 이랬었는데, 불길한 상황의 반복이었다.
팔목 위를 덮는 가죽 장갑을 뚫고 파고들 정도로 놈의 턱 아귀의 힘은 엄청났다. 고통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섬유 위로 붉게 스며 나오는 피를 보고 있으니 눈앞이 어지러웠다. 오른손을 들어 뼈를 도드라지게 세운 뒤, 놈의 턱을 내려쳤다. 그런데도 팔에 대고 쯔웁 하는 빠는 소리를 냈고,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속이 울렁거렸다. 대여섯 번이고 내려치니 턱 근육이 헐거워져 힘이 빠진 듯했다.
가까스로 떨어진 아킬라는 뒷걸음질 치며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내 피인지 놈의 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흥건해 있었다.
“으윽, 엿 같네…! 죽고 싶냐!”
“크리스! 괜찮아?”
“어… 아프진 않아.”
리헤로스가 나를 품에 가두듯 꽉 끌어안자 날뛰던 분노가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섭게 사그라들었다.
“미안해. 내가 제대로 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야, 네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워낙에 순식간이기도 했고.”
나름대로 나를 보호해 주려고 했었으니 그를 원망하진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짓거리를 저지른 아킬라의 잘못 아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곤죽이 될 정도로 패고 싶었는데 리헤로스에게 안겨있다는 명목으로 참았다.
“아킬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제발 조용히 감옥으로 돌아가!”
테네브는 아킬라의 앞에 서 다그쳤다. 그런데 아킬라는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갤 돌려 물끄러미 보는 것이었다.
“으…… 에….”
“뭐… 야?”
또다시 위화감이 들었다.
이번엔 눈이었다.
그의 탁하고 검은 홍채는 점점 붉어지더니, 동그란 홍채의 정중앙이 점점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너! 눈이…!”
“에…… 윽… 게에…….”
“아키! 뒤로 물러나!”
나누어진 반원 형태의 홍채는 완전한 원형이 되었다.
두 개가 된 홍채는 또다시 갈라졌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하니 흰자위는 붉은 홍채로 빼곡히 채워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것도 모자라 아킬라의 잘린 양 팔에 근육 섬유 같은 것이 가닥가닥 뻗어 나오며 꼬이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자리에 생겨난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두 쌍이 더 자라나면서 총 여섯 개의 팔이 만들어졌다.
형태조차 인간의 것이라 볼 수 없는─
“벌레… 아니야?”
놈이 쏟아냈던 벌레와 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돌기처럼 솟아있는 털들은 각자 자아가 있는 듯 불규칙적으로 흔들려댔다.
─쩍
새하얀 피부는 네 갈래로 금이 가며 벌어졌고, 그 아래엔 붉은 살 대신 검고 번들대는 표면이 드러났다. 인간의 구조라곤 다리를 제외하고 남아있지 않았다.
인간의 탈을 모두 벗어낸 뒤, 몸집이 거대하게 불어난 아킬라는 끈적거리는 점액을 뚝뚝 떨어트리며 젖은 날개를 펼쳐 흔들어댔다.
완전히 변태를 마친 성체의 모습이었다.
“맙소사….”
─띵
[던전] 변신 : 변절한 아킬라
[시스템]
던전 인원 제한 없음
지긋지긋한 던전. 원래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또다시 싸움으로 끌려들어 오고 말았다. 평화로운 방식으로 결말을 취할 순 없는 걸까.
“아아… 아아아…! 이거야! 이 힘을 주기 위해 신께서 놈을 저에게 보내주신 거로군요! 감사합니다…! 이 아킬라, 카르말록스께 영혼을 바치겠나이다!”
악신 카르말록스는 악의 추종자를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하는 것 같건만, 알리엔토를 수호하는 주신 크레아누스는 리헤로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만 했다.
‘리헤로스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뭐라도 해보란 말이야!’
그를 통해 진정 평화를 얻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NPC들이 타락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지극히 악인 입장의 생각이 번쩍 미치기도 했다.
신을 탓하고 있는 나와 달리 리헤로스는 곧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파즈즈즈
공중으로 뛰어올라 머리 쪽을 내리찍으려는 것 같았다.
여태껏 공략했던 던전 보스들이 대체로 머리, 목 쪽이 약점인 경우가 많았기에 최단 루트를 공략해보려는 것일 것이라.
나도 그와 같은 생각으로 머리 쪽 어딘가 유효타가 먹히는 곳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중추 신경계를 파괴하면 전투 불능으로 이어지는 것이 게임 생태계, 아니 현실 생태계에서도 불가침의 이론이지 않던가.
─끼기기기기… 캉!
하지만, 리헤로스의 금빛 검기는 놈의 빗장뼈를 꿰뚫지 못했다. 오히려 금속이 마찰하는 듯한 소리를 발산하며 튕겨내 버린다.
공중에서 착지하기 직전인 리헤로스를 향해 뾰족한 여러 개의 다리가 배, 옆구리, 목을 겨냥했다.
“리헤로스! 조심해!”
“크윽!”
다행히도 몸을 회전하여 무게중심을 변경하는 데에 성공했고, 다리들은 허공을 갈랐다. 측방 낙법으로 무사히 회피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전투에 합류할 수 있었다.
“테네브! 우리가 뒤쪽을 맡자!”
“아, 알겠어!”
새로 돋아난 팔이라면, 이음새가 부드러울 수 있다. 그쪽을 공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오른손에 단검을 고쳐 잡고 놈의 뒤로 돌아갈 경로를 탐색했다.
테네브가 먼저 반대쪽 겨드랑이로 파고들기 위해 뛰어들었는데, 수많은 팔이 매섭게 몰아쳤다.
돌기가 잔뜩 솟아있는 날카로운 팔을 피하려고 구르고, 벽에 부딪히며 가까스로 뒤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팔 사이로 들어가는 건 힘들겠어.’
현실에서 혐오스럽게 여겨지던 벌레가 사람보다 거대해진 상태로 더듬이나 팔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어떤 마물보다도 큰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도 해야만 해.’
놈에게 직접 부딪히는 대신 벽으로 달려 도약했다. 튀어나온 벽돌을 밟은 뒤, 아킬라의 팔을 계단처럼 빠르게 타고 올라 마지막으로 어깨를 밟고 뛰어내리며 완전히 반대편으로 넘어왔다.
착지한 앉은 자세 그 상대로 아킬라 쪽으로 몸을 돌렸고, 겨드랑이 사이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끄드드득
검신은 몸속으로 파고들지 않고 겉돌았다.
“이게 안 먹힌다고?”
한 손으로만 찔러 힘이 부족했던 것인가. 피가 줄줄 흐르는 왼손으로 받친 뒤, 다시 같은 자리를 힘껏 올려 찔렀다.
─까각
너무나도 단단해 단순한 물리 공격으로는 꿰뚫지 못할 것 같았다.
테네브도 가세하여 이곳저곳 베거나, 찔러보고 있었지만, 스파크만 튀기며 눈에 보일 정도로 날이 닳고 있었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