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이번 작전에서는 빠져줘.”
“조금 전까지는 나까지 함께 들어야 하는 얘기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계획에서 빼려고?”
“동행했던 너를 포함해서 진척 상황을 보고하는 게 예의니까 한 것뿐이야. 다음 계획까지 네가 합류하기엔… 기사단 내부는 네가 돌아다니기에 너무 위험해.”
“칼리고가 없는데 위험할 게 뭐가….”
“단순히 단장님 얘기가 아니야. 기사단 내부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왔던 것처럼 어떤 위협이 등장할지 미지수니까 확신하지 말라는 이야기지. 어제도… 다치면 곧바로 복귀하기로 해놓고, 다칠 대로 다쳐서는 약속이 무용지물이었잖아.”
테네브는 내 말을 가로채더니 제 의견을 길게 늘어놓는다. 내 의견은 의견도 아닌가 울컥했지만, 내가 다쳤다고 눈물까지 흘린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과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왼팔을 걷어 그에게 내밀었다. 흉터는 남았고, 팔은 검은 반점이 눈에 띄었지만 아파서 못 움직일 정도의 상처는 없었다.
“난 정말 괜찮다니까. 봐.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물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다쳤는데 왜 아무렇지 않은데?”
“어?”
“계속 생각해 봤어. 어쩌면 네가 다쳐도 아무렇지 않은 게, 네 생명을 깎아 회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
다친 이후로 스탯이 급격하게 줄었던 걸 보면, 테네브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게임 기획자로서의 기억이 잊히고 있는 걸까 이리도 간단한 구조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크리스. 경의 말이 맞아. 이번만큼은 둘이서만 갈게.”
“제발 부탁해. 아키.”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오히려 위험하므로 둘만 보낼 수 없다. 불안정한 관계의 두 사람이 협력하는 게 가능한가 싶었다. 두 사람을 연결해 줄 다리, 나의 존재는 이 파티에서 필수였다.
“이 바보들아.”
“어?”
“우리 계획이 뭐였는지 기억 안 나? 기사단과 연루되었을지도 모를 수상한 종교를 파헤치는 거잖아.”
“…그 정돈 알고 있다만.”
“국가 치안을 담당하는 글라디우스 기사단, 그들을 의심하는 기사단원과 용사? 날 잡아가시오 하고 싶은 거지?”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자세히 얘기해야 알아들을 수 있겠는데.”
짧게 한숨을 내쉬고선 최대한 설득력 있도록 낮은 톤의 음색으로 전달했다.
“잘 들어. 너희 둘은 이 사건이 깔끔하게 해결될 때까지 한 톨의 의심 없이 기사단에 호의적인 역할이어야만 해.”
“…….”
“테네브. 지금은 네가 칼리고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그의 동선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
“그렇지.”
“리헤로스. 너는 칼리고가 괜한 트집을 잡지 않는 이상 많은 사람이 도와주고 있어. 그런데 ‘국가의 공식적인 적’이 되어버리면 그들도 더 이상 너를 돕기 어려울 거야.”
“응. 이해했어. 네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만약 기사단 내부에서 시비 걸리게 되면, 너를 방패 삼으라는 말 아니야?”
“…그 말이 사실이야? 아키?”
“맞아. 리헤로스가 잘 이해했네.”
“너…!”
“너희는 내가 다치는 걸 생각할 게 아니라,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
“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란 말이야.”
두 사람은 짠 듯이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테네브는 양손으로 마른 세수하듯 문질러대며 꽤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나는… 비겁하게 아키 네 뒤에 숨지 않을 거야.”
“고집부리지 마. 일을 진행하려면 한 명의 희생은 불가피해. 이게 현실이야.”
“희생이라니….”
“희생 없는 성취는 없어.”
“…….”
잠자코 듣고 있던 리헤로스는 충격받은 듯 입술이 점점 벌어졌고, 테네브의 미간은 사방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워낙에 마음이 여린 두 남자였기에 내가 섬세하지 못한 말을 했구나 싶었다.
“단어 선택이 찝찝하면 등가교환이라고 해둘게. 동등한 가치로 교환을 하는 거지.”
“크리스의 말은… 이해했어. ”
“이해했다면 다행이다. 벌써 지레 겁먹지 마. 설마 죽을 고비가 또 생기기야 하겠어?”
“그런 말 하지 마. 말이 씨가 되니까….”
사망 플래그를 날카롭게 세우는 대사이긴 했다. 짝사랑 상대와 가까스로 이어진 직후,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라는 대사를 읊는 조연. 내가 시나리오 라이터여도 다음 장면에서 죽이기 좋은 캐릭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아 리헤로스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안겨줄 것이다. 그전까지는 절대 눈 감지 못한다.
아주 오랜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관찰했다. 둘은 애꿎은 바닥만 한참 노려보다가 각자 한숨을 뿜거나 찻잔을 기울이는 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화두를 던지진 않았지만 각자 마음의 준비가 끝났으리라 추측했다.
“음음, 기사단 건물에서 조사할 곳을 정해볼까. 아무리 칼리고가 없다 하더라도 다른 기사단원들의 눈을 피해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일 테니까.”
“그래야지.”
“그럼 하나씩 체크해 보자. 비밀 서랍이 있는 책상은 기사단 전원이 받은 비품이야?”
“나는 받은 기억이 없으니 전원이 받은 건 아니야. 아마… 아킬라의 것이 맞다면 간부급만 받은 물건이겠지.”
“간부만 받는 책상….”
단서의 출처를 들으니 자연스레 리헤로스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발언했다.
“그렇다면 살펴봐야 할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킬라 경의 집무실이라든지 말이죠.”
“맞아. 간부만 받는 책상이라면 아킬라가 가지고 있던 비품이 사라졌는지 확인을 해야 해.”
“아킬라의 개인 집무실… 있긴 했었습니다.”
“으응? 왜 과거형이야? 설마 지금은 없어졌어?”
“글쎄, 쫓겨난 이후로는 공실일 거야. 물건을 다 치웠는지는 확인해 보질 않아서 모르겠어.”
“불확실하다면 우선 가보는 게 좋겠군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외에 특별히 갈만한 곳은?”
“비품 창고도 있어.”
“아킬라의 책상이 사라진 게 아니면, 아마 비품 창고에서 책상을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아킬라의 집무실은 기사단 건물 4층에 있고, 비품 창고는 지하 1층에 있습니다.”
“지하 1층을 먼저 가야 동선이 깔끔할 텐데, 아킬라의 방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 어쩔 수 없겠네.”
“음, 동선을 짜는 게 무의미하겠어.”
“그럼 첫 번째로 아킬라의 구 집무실을 갔다가 두 번째로 비품 창고로 가는 걸로 확정?”
셋은 서로를 번갈아 보며 고갤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착수하자.”
우리는 찻잔을 들어 부딪히며 조사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했다. 테네브는 어디의 누가 꽃 차로 건배를 하냐며 툴툴거렸지만, 두 사람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 비해 굳었던 분위기는 많이 풀어진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는데.’
테네브가 내게 보이는 미묘한 기류는 친구에게 보내는 서툰 감정이라 생각했고,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 믿었으니, 앞으로는 셋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좋아질 거라 믿었다. 그는 이 세계에 있어 중요한 협력자 중 하나이니 그래야만 했다.
“이만 가야겠다.”
테네브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배웅할게. 리헤로스는 잔 좀 치워줄래?”
“그럴게. 드렉티오 경,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둘은 정중히 묵례하고는 멀어졌다. 테네브를 따라 문 앞에 섰고, 그는 나를 곧게 쳐다보았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아니야. 라이오펠에 있어. 우리가 갈 테니까.”
“데리러 올게.”
“안 귀찮겠어?”
“당연하지.”
“나는 오지 말라고 했다? 엇갈려도 몰라?”
“온다고 말했다?”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테네브도 배시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는 듯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 있었다.
“그럼, 조심히 가.”
“응.”
손수 열어준 문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멈추더니 그는 내게 다가왔다.
“왜? 뭐 잊어버린 거라도….”
테네브는 내 이마 위에 소리 없이 입을 맞추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 몰랐고, 간신히 이마에 손을 올린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뭇, 무슨?”
“크레아누스의 은총이 깃들길.”
“아, 으응… 그거? 아하하….”
예전에 리헤로스도 이런 적이 있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종교적인 의미라고 했으니 삐그덕 거릴 필요가 없음에도 쥐어 짜내는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테네브는 활짝 웃으며 문밖으로 휙 나가버린다. 어떤 인사말도 더 붙이지 않고 본인의 용무는 끝났다는 듯이 훌쩍 사라져버렸다.
‘아니 대체….’
혹시 리헤로스가 보진 않았나 뒤를 돌아보았는데, 다행히도 주방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의미 부여하지 말아야지.’
친구여도 할 수 있는 행위 아니겠는가. 분명 리헤로스가 보았어도 이해했을 것이다.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뇌세포를 쓸 필요가 없었다. 내일의 일을 예측하고 대비해야 했다.
그동안 구체적인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휘젓고 다녔다면, 앞으로는 기사단과 칼리고의 경계 수치가 오르지 않도록 동향을 살피며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아니길 바라지만, 글라디우스 기사단이 어두운 음모, 새로운 어둠의 세력과 연관이 있다면 굉장히 골치 아파질 테니 말이다.
***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하루가 지나 약속의 날이 도래했다.
─잘그락
두꺼운 가죽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무거운 몸통 갑옷과 견갑, 팔 전체를 덮는 금속 장갑까지 착용하였다. 이 정도로 몸을 둔하게 만드는 착장은 알리엔토에서 살아온 이래 처음이었다.
‘이렇게라도 입고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야지.’
내색하진 않았지만, 글라디우스 기사단의 건물로 잠입해야 하는 일은 꽤 긴장되었다. 기사단만 생각하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작열감이 떠올라 왼손에 경련이 도질 정도였다. 나를 조사에서 배제하려고 했던 두 남자에게 이 사실을 밝혔다간 뒤집어질 게 뻔했으니 숨기고 있지만.
‘좀 과한가?’
둔한 움직임으로 거울 앞에 서서 내 꼴을 감상하였다. 체형에 맞춘 갑옷이긴 했지만, 천 쪼가리만 걸치던 이전에 비해선 꽤 두툼한 몸의 형태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잔뜩 쫄아있다는 사실이 이로 인해 들통나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똑똑
“크리스. 드렉티오 경이 오셨어.”
“라이오펠에서 기다리라니까 벌써 왔대? 알겠어. 준비 다 했으니까 나갈게.”
“응, 일 층에 있을 테니까 내려와.”
무릎 밑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뒤, 단검을 허리띠에 묶는 것까지 마치고 방을 나올 수 있었다. 계단은 평상시와 다를 게 없었으나, 아직 중심점을 파악하기 어려운 묵직한 착장 때문에 어색하게 주춤거리며 내려왔다.
“어, 아키.”
“테네브! 라이오펠에 있으라니까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내가 좋아서 온 건데 뭘. 네가 불편한 게 아니면 신경 쓰지 마. 그보다 너…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했네.”
“이거? 누가 너무나도 걱정이 많아서 이렇게라도 입어야지 싶었지.”
“어찌 걱정을 안 할 수 있어.”
리헤로스는 옆에서 은은하게 미소 지었고, 테네브는 입술을 꾹 물고 있었지만 부루퉁한 느낌이 있었다.
“알았다고 알았어. 그러니까 든든하게 챙겨 입었다는 얘기야. 걱정하지 마.”
“그래. 노력해 보지.”
“준비 끝났으면 가자.”
“모두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제는 집을 지키고 있는 게 익숙해진 페로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섰다.
“기사단 눈에 띄지 않게 수도의 서쪽 문으로 들어갈 겁니다.”
“많이 돌아가겠군요.”
원래 세르뷔에에서 수도 라이오펠로 향하는 주도로는 남쪽 문이 가장 가까웠다. 항상 라이오펠로 갈 땐 남문으로 갔기에 다른 문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였다.
“네. 그래서 길을 잃으실까 제가 동행하러 온 거고요.”
“테네브, 고마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몰려드는 감사 인사에 테네브는 입을 꾹 다물더니 잰걸음으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부끄러운가 보네.’
어쩜 저렇게 얼굴이고 행동에서 제 기분이 노골적으로 티가 날까. 클래식한 연하의 모습이 썩 귀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