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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93화 (93/127)

93화

“난… 너와 달라. 너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예상하지 마.”

“그래? 뭐가 어디가 얼마나 다른데? 들어나 보자.”

“정확히는… 리헤로스는 너와 이어졌던 용사와 달라. 그는 네 정체를 알고 떠났지만, 리헤로스는 내 정체를 알고도 떠나지 않았으니까.”

녀석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두 사람과 우리가 다른 결정적인 이유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떠나지 않을 거란 자신인가?”

“내가 아는 리헤로스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

“…….”

“…….”

“푸흐…….”

“웃어?”

“푸하하하하! 순진해 빠져서!”

“뭐가 순진해?”

놈은 내 코끝에 닿으리만치 바짝 다가온다. 눈꺼풀 하나 깜빡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형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사랑을 철석같이 믿는다는 게. 꼭 아둔한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뭐라고?”

“이런 주인공은 반드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던데, 너는 어떠려나?”

“이 새끼가!”

불쾌한 감정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놈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주먹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흰 공간을 두리번거리며 놈을 쫓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녀석의 목소리만 무한한 공간에 왕왕 울려댈 뿐이었다.

“하하하하. 무서워라.”

“이 새끼 어디 갔어!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

“그 누구도 떼어낼 수 없는 불멸의 사랑을 한다 쳐. 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야?”

“…….”

“계속 이 세계에 남아있으려고? 그 몸으로?”

“그건….”

“이야, 진짜인가 보네.”

어느 사이 ‘아크리스’는 내 뒤에 서서 속삭이고 있었다.

“네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 몸을 빌리고 있는 주제에.”

화들짝 놀라선 뒤를 돌자 녀석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이었다.

“아, 리헤로스가 정말 너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네가 그랬잖아. ‘내 성격은 어디에 갖다 붙여도 감점 요소’라고. 그런데 정말 네 알맹이를 좋아하고 있으리라 생각해?”

“…….”

“어쩌면, ‘내’ 외모를 좋아하고 있는지 모르지. 늘 외모를 칭찬해 줬으니까. 안 그래?”

그냥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긴 했지만, 그의 앞에선 민망해서 겸손을 떤 것뿐이었다. 리헤로스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놈은 계속해서 나를 자극하고 이간질하려는 속셈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냥 상대하지 않는 게 나았다.

‘꿈에서 깰 방법이나 찾아야겠군.’

허벅다리를 세게 꼬집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저번에 ‘아크리스’가 나를 절벽으로 밀어 넘어뜨렸을 때 깨어났던 것이 기억나 그와 같은 구조물이 없는지 눈으로 찾고 있었다.

“도망치려고 하네.”

“오, 잘 아네.”

“네가 내 몸에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을 쭉 읽을 수 있었어. 분명 네놈, 처음에는 용사를 이용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단 말이지. 그래서 난 간섭하지 않았던 건데 지금은 내 몸을 가지고 늘어 붙어살려고 하잖아? 이건 아니지.”

“자꾸 내 몸 내 몸 하는데, 독약 먹고 나서 영혼 분리된 거 아니었어? 나는 이미 죽은 몸에 들어온 것일 뿐이야. 더 이상 네 몸이 아니라는 말이지.”

“뭐라고?”

“그러니까 끼어들지 마. 네 연애가 실패한 거로 내 관계까지 파투 내려 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이제 이 영역은 네 소관이 아니야.”

‘아크리스’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의 몸은 서서히 투명해졌고 뿌연 안개처럼 자각하지 못할 사이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X발….”

그와 동시에 눈이 떠졌다. 아직 아침 해는 절반 정도 걸린 상태였다. 잠은 거의 자지 않은 것처럼 피곤했지만, 더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몸을 일으켰다.

‘반박하고 싶은 만큼 하긴 했는데, 기분 더럽네.’

자기가 뭘 안다고 훈수를 두고 앉았나. 나는 알아서 잘 해결해 나갈 것이다. 당장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결정적인 루트를 아는 것도 아닌데,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리헤로스와 각별한 사이가 된 게 뭐가 나쁜가? 그저 본인이 이루지 못한 관계를 이룬 것에 대한 질투심이 아닐까 싶었다.

‘내 영혼이 빠져나가면, 설마 본체의 영혼이 다시 돌아오는 건가? 그러면 리헤로스와의 관계는? 나 대신 그놈과 이어지게 되는가?’

어쩌면 자꾸 나를 현실로 보내려는 이유가 그걸 노리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끔찍했다.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놈에게 그의 옆자리를 넘겨줘야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러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주방으로 내려가 물 한 컵을 입안에 들이부었다. 이어서 계단을 딛고 내려오는 다른 이의 발소리는 내가 있는 주방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크리스, 일찍 일어났네. 좋은 아침이야.”

“아, 좋은 아침.”

항상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그와 아침에 자연스레 깬 상태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리헤로스의 좋은 부분을 꼽으라면 끝도 없을 거야.’

어떤 면에서든 완벽함, 그 자체였다.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 컵을 집어 들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침이라도 흘리고 잤나, 제 뺨을 여러 번 문질러 닦아냈다.

“나, 뭐 묻었어…?”

─쪽

리헤로스는 내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 앗…! 깜짝이야!”

“오른쪽 뺨에 점 있는 거 알아?”

“…너?”

“아니, 너 말이야.”

“아? 그랬나?”

“점 있는 부분이 꼭 여기는 뽀뽀해도 된다는 것 같이 생겨서. 귀여워.”

“뭐, 무, 무슨 소리야!”

“크리스는 본인 얼굴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무…… 뭐어 그렇긴 하지. 자세히 볼 필요가 뭐가 있어? 네 얼굴이라면 모를까.”

그보다도 본체 ‘아크리스’가 말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네 알맹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하필 이런 대화 주제로 꿈을 꾼 날에 외모 이야기를 하니 영 찝찝했다. 꼭 본체의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갑자기 팍 서운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얼굴은 자세히 볼 만해?”

“…응, 잘생겼잖아.”

리헤로스야 스쳐 지나가도 뒤돌아보게 만드는 객관적인 미남이었고, 남의 몸을 빌린 것도 아니고 본인의 몸이니까 이런 소릴 들어도 찝찝하지 않겠지. 그리 말하며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서운한 마음은 순식간에 날아갈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조형이었다.

“네 눈에 차면 다행이야.”

“흐응, 내 눈에만 차면 되는 거야?”

“응. 오로지 너만 만족하기만 하면 돼.”

“…바보.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널 잘생겼다고 생각할 텐데.”

“그럼 얼굴 가리고 다닐까?”

“내가 진짜 그러라고 하면 어쩔래?”

“네가 원하면. 기꺼이 그럴 수 있어.”

컵을 내려놓은 그의 손은 내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내려가고 있었다. 등줄기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고,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물론 전투적 본능의 긴장감보다는 연인 사이에 있을 법한 찌릿한 긴장이었다.

‘평소 같으면 징그러운 짓 하지 말라고 밀어냈을 텐데…. 이제는 이래도 되는 사이니까.’

‘이래도 되는 사이’라니 내가 생각했지만, 미친것 같았다. 척수를 거치지 않고 든 생각이라 민망했다. 그에게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혼자 상상하고, 혼자 부끄러워하고 난리다. 남이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딘가 정서가 불안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리헤로스의 팔은 내 허리 굴곡에 딱 맞춰진 것 같았다. 제 쪽으로 가볍게 당기는 힘은 찌릿하기만 했던 긴장감을 극대화했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장치였다.

“…크리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연애 세포들은 깃발을 들어서 내게 신호했다. 다정히 부르는 목소리, 얼굴의 각도, 조금 들뜬 숨소리는 한 가지 행위로 향하는 분명한 표현이었다.

‘이번엔 진짜다.’

숨을 고르고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침 햇살은 그의 눈꺼풀 위로 올라가 반짝였다.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매혹적으로 느껴져 현혹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세상에 이리도 완벽한 남자가 존재할 수 있는지, 그의 반쪽이 ‘나’라는 사실도 모두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본체 ‘아크리스’가 그토록 질투하는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아! 안 돼요!”

산통을 깨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리헤로스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주방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그 소리는 우리 쪽을 향해 지른 것이 아니란 걸 깨닫고 귀를 기울여보았다.

거침없는 묵직한 발소리가 점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외부인? 첩자? 강도?’

손에 잡히는 무기가 없어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한번 높은 목소리가 빽 들려왔다.

“지, 지금 들어가시면 안 돼요!”

“어째서?”

“으, 우아아!”

“아키, 나왔어.”

나란히 붙어있는 상태로 테네브를 맞이했고, 우리의 위치를 발견한 테네브의 눈썹은 점점 한쪽만 올라가고 있었다.

“아키?”

“엑! 테네브?”

“그 반응은 뭐야?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구네.”

못 올 곳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온 주거침입 아닌가. 달콤한 분위기가 깨어져서 화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정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드렉티오 경.”

리헤로스의 정중한 인사에 테네브는 고개만 까딱였다. 그리고 눈동자만 굴려서 나와 그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재빠르게 굴러가는 시선으로 보였다.

“말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라니… 말했었잖아.”

“무슨… 말?”

“기사단 건물 내부를 조사할 수 있게 단장님의 일정을 확인했어.”

맞다. 테네브에게 협력을 요청한 건이 있었다.

“아아, 정말? 빠르네. 고생 많았어.”

“그보다 두 사람….”

“아! 밥은 먹었어? 차라도 내올까?”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도 제 발 저린 바람에 그의 말을 재빠르게 저지했다.

“…응 고마워.”

“크리스. 앉아있어. 내가 할게.”

“아니야. 둘이 이야기… 그러니까 작전 세우고 있어. 내가 내올게.”

어차피 이야기의 주인공은 리헤로스이니 중요한 이야기는 둘이 먼저 나누고 있는 게 맞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열을 식힐 시간이 매우 필요했다. 그래서 차를 내어오겠다고 하는 리헤로스와 얼떨떨하게 서 있는 테네브를 거실로 밀어 넣었다.

“후우…. 식겁했네.”

주방으로 돌아와 불을 땐 아궁이 위에 양철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마른 나무를 태우면서 몸집을 키우는 불꽃을 보며 아침부터 피를 펄펄 끓게 만들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리헤로스의 행동에 그저 몸을 흐르듯 맡겼던 그때.

‘은근히 능숙하다니까.’

워낙 평소에 적극적인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치고 들어올 줄 예상도 못 했다. 김을 뿜어내는 주전자의 꼴이 꼭 나를 보는듯했다. 만화적 표현을 빌리면 이런 느낌으로 묘사되겠지. 그저 웃음이 픽 나왔다.

찻잎을 넣어둔 찻잔에 물을 채우고 나니 날뛰던 마음도 진정되었다. 차분히 다기를 트레이에 옮겨 담고 거실로 향했다.

“차 내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삭막했다.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줄 알았던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마주 보고만 있었다. 그 사이에서 페로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내가 있을 걸 그랬나 싶었다.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니, 아키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먼저 얘기하라니까…!”

“다 같이 있을 때 해야지.”

둘은 왜 이리 친해지지 못하는 걸까. 언젠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만한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내어놓고 운을 띄웠다.

“그래서… 음, 기사단으로 들어갈 수 있는 때가 언젠데?”

“내일.”

“오, 생각보다 빠르네.”

“때마침 다른 지역의 영주들과 만나서 병력 충원에 관해 이야기할 게 있다고 들었어. 아마 수도에서 마물이 나온 일로 인해 대책을 세우려는 모양이야.”

“잘 됐네. 칼리고가 없으면 엄청 수월할 거야.”

“응. 그렇겠지.”

가벼운 답을 마친 테네브는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기 직전에 멈추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았다.

“아키,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뭔데?”

“…이번 계획에선 빠져주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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