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화
“푸우….”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니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누구라도 웃음이 나올 거다. 두툼한 체격의 거구의 남성이 ‘친구가 몸을 안 챙겨서’ 우는 경우란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눈물이 날 일인가 싶은 것도 있지만 뭐 어떤가. 진귀한 구경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다.
‘부성애를 자극하네.’
저 심정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다. 리헤로스가 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었고, 그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었을 때 그랬더랬지. 그런데 내가 구하려고 했던 대상이 테네브가 아니었고, 리헤로스를 구하기 위해 팔을 희생한 것인데도 저 정도로 힘들어하니 신비로웠다.
몇 살 차이 안 나기도 하고 서로 존칭이나 서열 없이 친구로 지내곤 있지만 연하여서일까 감수성이 남다른 것 같다. 그에게 다가가 어깨와 등을 느릿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상황이 도와주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만큼 앞으로 조심할게. 그러면 됐지?”
“…….”
“응?”
“자존심 상해….”
참다 참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 웃었다.
“아하하하! 아아… 귀여워.”
“귀, 귀… 귀여워?!”
“비 맞은 강아지 같아.”
“가, 강아지!?”
등을 쓰다듬던 손은 머리 위로 옮겨 쓰다듬어주었다.
“하여튼 너무 걱정하지 마. 난 아프면 아프다고 티 내니까. 너 모르지? 나 엄살쟁이야.”
“…알겠어.”
“옳지.”
“별일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드렉티오 경.”
“…네.”
테네브의 감수성 젖은 발언으로 인해 우리 둘만의 세계에 푹 빠져있었다. 리헤로스가 지켜보고 있단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걸 그의 걱정 어린 문장으로 인해 붕 뜬 공상이 아닌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덕분에 테네브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 아니 그냥 사과도 아니다. 홍옥에 가까워졌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가 테네브의 눈물로 느슨해졌다. 테네브는 달아오른 목덜미를 여러 차례 문질러대는데 그럴수록 더 붉어지는 것 같았다.
“너 괜찮아?”
“무, 뭐가?”
“아까는 부끄러워서 그렇다 쳐도 계속 빨개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해서.”
“아니야. 나는 신경 쓰지 마.”
“젊어서 그런가? 혈액순환 잘 되는 젊은이?”
“놀리지 마….”
“으응 놀리는 거 아니야. 걱정돼서 그런 거지.”
사실 놀리는 게 맞다.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들뜬 목소리만은 감출 길이 없었기에 테네브가 더욱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반응이 재밌긴 해.’
아무래도 리헤로스와 나의 관계에서는 내 쪽이 늘 당하는 처지이었기 때문에 왜 자꾸 놀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고 말았다. 나와 관련된 인물 중 눈물을 보였던 사람은 없어서 더욱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방향의 충격이랄까.
“맞다.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게 아니지. 이곳을 조사해 보자. 어딘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단서가 있을 거야.”
“응.”
리헤로스가 참가한 정규 던전이니까 단서가 없다면 보상 상자가 있을 것이다. 정규 던전이 이어진 걸 보면 한 가지 확신은 들었다.
‘마왕이 사라졌다고 끝난 게 아니야.’
숨겨진 음모가 남아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파헤치면 분명 그 끝엔 진 엔딩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그 와중에 시체를 들여다보던 리헤로스는 의아한 듯 고갤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눈에 익은데 왜지?”
“아?”
머릿속에 펼쳐진 조각 영상들을 하나하나 넘겨보다가 한 장면에서 뚝 멈추었다.
“어, 기억났어. 전에 아이스크림 먹던 날. 너한테 주정 부렸던 사람 기억나? 그 남자야.”
“아, 드물게 적대적인 사람이라 흐릿하게나마 기억에 남아있어.”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그를 말리던 사람 몇이 있는 것 같아.”
─띠링
[단서]
어둠의 종교 신자들
- 얼굴을 확인해 보니 시비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적의를 비추는데 어쩌면 종교 때문일지도?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오직 용사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라는 걸까?”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건물의 구조는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건물보다는 시체 뒤져보면 뭔가 나올지도 몰라.”
“아….”
늘 인간의 생김새와 거리가 먼 마물형 몬스터만 처치하던 리헤로스는 실제 인간의 모습을 한 시체를 뒤지려니 거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려운 건 아니니 내가 도와주는 게 빠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꺼림칙하면 내가 할게.”
“아니야. 내가 하는 게 맞지.”
“괜찮겠어? 그러면 나눠서 확인하자. 그렇게 하면 훨씬 빠르니까.”
“저는 저쪽 복도에 있는 것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고마워 크리스, 감사합니다. 드렉티오 경.”
각자 건물 안의 구역을 나누어 조사하기 시작했다. 테네브는 가장 먼 쪽의 복도부터 차근차근 살피며 들어오고 있었고, 나와 리헤로스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체를 뒤집어댔다.
─띠링
[시스템]
‘어둠의 종교 신자들’의 단서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단서]
어둠의 종교 신자들
- 얼굴을 확인해 보니 시비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적의를 비추는데 어쩌면 종교 때문일지도?
- 글라디우스 기사단 마크가 새겨진 열쇠가 신자의 소지품에서 발견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말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나는 테네브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테네브는 묵묵히 시체를 뒤지고 있는 것을 보니 알림창이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잠깐, 잠깐….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
“음… 글라디우스가 연루되었다고 생각해?”
“이 중요한 단서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면 이상하지.”
“우연히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않아?”
게임을 설계할 때 ‘우연한 소품’ 따위는 없다. 모든 소스가 철저한 계획하에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신자에게 글라디우스와 관련된 소품이 나왔다면 분명히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글쎄, 내 생각은 안 그래.”
“그래도 드렉티오 경에게 이걸 이야기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어.”
“엑! 이야기할 생각이었어?”
“그래야지 않을까. 동료인데.”
“끄으으응… 동료라고 생각해 주는 건 테네브가 감동할 만한 일이긴 한데… 섣부르다는 건 정보를 더 모아서 이야기할 생각인 거지?”
“응. 열쇠 하나 가지곤 단정하기 일러.”
“그래. 그럼 더 생각해 보자.”
“열쇠니까. 문이든 상자든 열게 있을 거야. 그걸 찾으면 될 것 같아.”
“알겠어.”
테네브가 눈치채지 않도록 수색 방향을 전환했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단서를 찾고 테네브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게 좋긴 할 것이다.
‘나였으면… 말 못 해.’
바로 직전에 테네브의 눈물을 봐서일지도 모른다. 이 이상의 충격을 그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글라디우스를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다른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길 바라며 조용히 발길을 옮겼다. 열쇠를 사용할 공간이라 하면 탁 트인 공간보다는 방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작은방으로 들어가니 책상과 책장이 눈에 띄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어도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은 개인적인 공간으로 보였다.
‘교주의 방 같은 느낌인데.’
가장 먼저 책상을 살폈다. 책상 위 가로로 길게 펼친 보랏빛 벨벳 천이 눈에 띄었다. 서랍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손잡이는 없고 중앙엔 어떤 장식물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책상 아래로 들어가 살펴보아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방 어딘가에 비밀공간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지.’
뒤에 자리 잡은 책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물건을 모두 걷어내고 뒤에 공간이 없을지 두들기고, 밀어보았는데 그 어떤 낌새도 없었다. 다른 곳을 조사하고 있던 리헤로스가 들어오더니 조용히 물었다.
“크리스. 찾았어?”
“아니, 그쪽도 없었어?”
“응. 그런데….”
리헤로스는 앞에 있는 책상을 유심히 살피는 눈치였다.
“책상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그럼 책상 안에는?”
“책상 안? 서랍 자체가 없던데.”
그는 내 쪽으로 돌아와 보통이라면 서랍이 있을 부분을 매만졌다.
“그렇지? 서랍 손잡이가 없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헤로스는 책상에 붙은 작은 장식물을 옆으로 툭 밀었고, 그 아래에 열쇠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뭐야 열쇠 구멍이네!”
“네 눈을 속일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비밀 장치라면 아주 중요한 걸 숨긴 모양인데.”
“내 눈이 뭐라고… 약 올리는 거야 뭐야?”
“평소엔 네가 관찰력이 좋으니까 하는 말이야.”
전혀 칭찬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나를 향해 씨익 웃으면서 아까 주운 열쇠를 끼워 돌렸다.
─드르르륵
열쇠를 끝까지 돌리니 서랍이 부드럽게 밀려 나왔다. 안에는 수첩 한 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기대한 것보다 단순한데.”
“그래도 중요 정보가 있으니 이런 장치에 놓고 관리하는 것일 거야.”
“그거야 그렇지.”
리헤로스는 수첩을 펼치더니 친절하게도 내 쪽으로 기울여주었다.
글을 보니, 예전에 본 적이 있던 주술식, 주술진에 대한 내용이 쭉 적혀 있었다. 그때는 물론 일부만 볼 수 있었지만, 이 주술식으로 특정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별 소득 없이 쭉 넘기다가 맨 뒷장에 수첩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서명이 눈에 띄었다.
“아킬라…….”
“…….”
칼리고의 오른팔이었지만, 칼리고에 의해 기사단에 쫓겨난 기사였다. 오래된 기억과 관련된 인물이 이렇게 드러날 줄은 몰랐다. 우리는 한참 그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도 없었고 입술을 떼기도 어려웠다. 리헤로스는 서명이 적힌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버렸고, 수첩의 커버 안쪽엔 글라디우스 기사단 마크가 박혀있었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네.”
“하아아… 어떻게 해야….”
고민스러웠다. 테네브가 아무리 현재 기사단의 체제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제 소속이 의심당하는 것은 불쾌할 수도 있었다. 인간이 느끼는 소속감이란 특수해서 본인까지 싸잡혀 ‘공격’당한다고 느낄 수가 있지 않은가. 나를 척지는 것은 상관없지만, 글라디우스에서 리헤로스에게 그나마 우호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인물이 등을 돌린다면 공식 적대 세력이 될 게 뻔했다.
“리헤로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나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음… 대충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상하고는 있는 거지?”
“응, 진지하게 의심을 함께해 주거나, 아니면 불쾌해하겠지.”
“반반의 확률인데도 괜찮다고?”
“같은 집단을 수색하는데 그에게만 정보를 안 알려주고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기도 하니까. 이 단서가 나온 이상 우리는 글라디우스 기사단을 필연적으로 의심해야 하잖아.”
“맞는 말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몫이라고 생각해.”
“하아아… 그런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역시 리헤로스가 미움받는 걸 참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차라리 미움받는 역할이 익숙한 내가 하는 것이 덜 불편하지 않을까.
“내가 테네브에게 가지고 가서 물어볼게.”
“아니야. 내가 할게. 드렉티오 경과 크리스는 친하니까… 널 방패 삼아 숨고 싶진 않아.”
“이럴 땐 숨어도 돼…!”
리헤로스는 망설임 없이 방 밖을 성큼성큼 나섰다. 빠르게 뛰는 쫓아 나왔다. 테네브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리헤로스의 저의를 오해하지 않도록 사회생활의 필수 덕목으로 익혀놓았던 쿠션어를 잔뜩 생각해냈다.
“드렉티오 경.”
“무슨 일이십니까?”
“이 문양. 알고 계시죠?”
“이건….”
테네브는 열쇠의 문양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제 왼쪽 가슴에 손을 움직였다. 그가 짚고 있는 곳에 같은 문양의 배지가 달려있었다.
“신자의 유해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이 열쇠를 연 곳에서 이 수첩이 발견되었습니다. 수첩의 끝에도 같은 문양이 발견되었죠.”
“그럴 수가…….”
“아킬라 경을 알고 계십니까?”
“네, 기사단에 있으면서 아킬라 경을 모를 수는 없죠. 그런데 그는 이미 기사단의 사람이 아닙니다. 무언가 오해가….”
“테네브. 그 수첩이 들어있던 책상은 기사단이 만든 특수한 책상인 것 같았어.”
이어진 단서는 그의 실낱같은 희망을 뭉개버렸다.
“그 큰 걸 아킬라가 기사단을 나오면서 독단적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지 않을 것 아니야.”
“아키… 그럼 네 말은… 기사단 내부에 이 종교를 돕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의심해 볼 만하다는 이야기야.”
테네브는 눈썹을 구부리더니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한곳에 두지 못했다. 어찌나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그냥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알겠어.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그 말에 나는 리헤로스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으면 내가 주도해서 이야기할 텐데 이번에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게 됐다.
“기사단 내부를 조사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