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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85화 (85/127)

85화

“으아아아악!!”

“불! 불이야!”

“흐익! 히이익!”

내 왼손 끝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불꽃은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그와 달리 내 앞에 펼쳐진 길은 검은 불꽃이 위협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왜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있는 스킬이라곤 워프를 포함해 세 개뿐이었고 그 어떤 것도 검은 불꽃을 발산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우리에게 다가오던 사람들은 멀리 도망치거나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피를 흘리고 있던 리헤로스는 제 로브를 벗더니 사람들 몸에 붙은 불을 꺼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를 조금 전까지 공격하던 사람들인데, 널 상처 입힌 사람들인데!’

내 처지가 불순물처럼 느껴졌다. 누구든 이 모습을 보면 내가 마을에 피해를 주는 극악무도한 악당이었다.

이 상황을 버티는 건 현 상태에선 불가능했다.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헉, 헉!”

골목은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었다. 폐소 공포증이 있지도 않은데 골목길은 점점 좁아지고 어두워져 나를 조여오는 것 같았다.

─턱

“아! 윽…!”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몸 아래에 왼팔이 깔려 고통에 찬 신음이 나왔다.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내 신세가 너무 비참하기도 했고, 신자들을 구하느라 정신없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상한 모습이 원망스럽긴 처음이었으니까.

‘그를 보호하기 위해선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네가 제일 먼저 구해줄 사람은 백성들인 걸까?’

나야말로 이 세계의 이물질인가 보다.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카르말록스가 아직 나를 주시하고 있다면 목숨을 앗아가 주길 바랐다.

“아크리스?”

그 사이에 리헤로스가 쫓아온 걸까. 하지만 나를 부르는 호칭이나 목소리가 전혀 그와 달랐다. 고개만 들어 살피니 그다지 보고 싶은 얼굴이 아니었다.

“테네브…?”

“왜 이런 데에서….”

처량하게 바닥에서 구르고 있느냐 묻고 싶은 거겠지만, 뒷말은 생략한 듯했다. 내 꼴이 얼마나 없어 보이면 더 묻지도 않는 걸까. 비참한 기분은 해소할 데가 없어 애꿎은 바닥이나 부드득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냥…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어.”

“…….”

“…….”

“…어디 봐.”

무릎을 꿇더니 나를 잡아들어 앉혀주었다. 주먹을 쥔 내 손을 억지로 펼쳐서 흉터를 살핀다. 그 외에도 다리 쪽을 만져주었는데, 조금 쓸려서 찢어진 걸 제외하곤 상처는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손길을 눈으로 좇기만 했다.

“크게 다친 덴 없어 보이네.”

“…….”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용사는 어디에 가고 이런 데에 혼자 있는 거야.”

“이제 너랑은 상관없는 일 아니야?”

테네브는 숨을 들이마시다 말고 호흡을 멈추었다.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히 조여 들어와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래. 놔줘.”

“나는… 절교한 적 없어.”

“뭐?”

“너한테 절교한다고 말한 적 없다고.”

“허….”

관계가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는 건가. 아무리 절교 선언을 하지 않았을지언정 나는 여전히 화난 상태인데 태연히 말을 걸어오고, 내 상태를 걱정한 건 그쪽 아니던가. 테네브에게 나와야 할 말들이 한참 남았으리라 생각해서 기다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턱의 근육이 도드라졌다. 불쾌한 감정을 표정에 드러냈다. 그러자 테네브는 한참 뻐끔대기만 하다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 그땐 홧김에 그랬던 건데… 그냥, 네가 켕기는 게 없단 걸 확신하고 싶었던 거야.”

“무슨 확신을 사람을 악당으로 몰고 가면서 하는 건데”

“네가 리헤로스 옆에 무조건 남아야 한다고 하니까… 나와 리헤로스가 다른 게 뭐가 있어. 널 생각하는 내 마음도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

“내가 리헤로스보다 못해?”

어쩜 사람을 이렇게 맥 빠지게 하는 걸까.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을 것 같은 거구의 남성이 읊는 호소문은 저항할 수 없게끔 했다.

“네가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냥… 사정이 있는 거라고.”

“나한테 말 못 하는 사정이 있어?”

“…그래. 친구라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비단 너에게만 숨기는 게 아니라 리헤로스에게 숨기는 게 있기도 해. 그러니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에 서운해하지 마.”

마침내 단단히 붙잡고 있던 팔목을 놓아주어 자유로워졌다.

“그래. 그건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 같다. 언젠간 네 마음이 열리길 바라.”

그리 말하고 자리를 뜰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내 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은 내 눈동자에 고정된 채로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 할 말 있어?”

“지금 네가 이러고 있는 상황도 무슨 일인지 말 못 하는 거야?”

“아… 그건.”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잊고 있던 죄책감이 떠올랐다. 내가 처한 상황을 다시 되짚어야 했다.

대책 없이 도망쳐 나온 나, 그리고 그것을 수습하고 있는 리헤로스.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히고, 다치게 하는 자들을 돕고 있다.

‘내가 책임지고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처가 완전히 잘못되었다. 유자현의 삶을 살 땐 어떤 잘못이든 빠르게 수긍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점이 협업하는 기획자의 자세가 잘 되어있다는 평을 받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내가 저지른 일을 눈앞에 두고도 회피한, 비겁한 겁쟁이였다.

“아크리스? 안색이 안 좋아졌어. 괜찮은 거 맞아?”

“내 잘못으로 시민들이 다쳤어.”

“뭐라고?”

그에게 털어놓으면 마음의 짐이 덜어질까 싶어 물꼬를 텄다. 한시적 고해성사였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 언제 해도 정말 뼈아픈 일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불길이 솟아올랐고 그걸 수습한다고 리헤로스가… 아직 거기에 남아서….”

논리정연하게 전달하기 위해 말을 또박또박 느리게 하고 있음에도 점점 목이 멨다. 마왕의 능력을 잃어버린 내게서 마법이 터져 나올 줄 꿈에도 몰랐으니 벌어진 일을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신의 장난이라는 말 밖엔 형용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말을 힘겹게 꺼냈고 드문드문 마른침을 삼키며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애써 숨겼다.

“어쩌면… 마의 징조가 드러나고 마족을 섬기는 종교가 나타나는 건… 정말 나 때문이 아닐까?”

“…….”

“내가…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나? 그랬으면 어떡하지?”

“아크리스….”

“내가 역시 죽어야 했을….”

“그런 말 하지 마…!”

마지막 말은 동정을 사기 위한 게 아니라 정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깊은 내면엔 역시나 죽음을 상정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테네브는 제지할 틈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갈비뼈가 지그시 눌려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강한 포옹이었다. 아프다고 밀어내려 했는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네가 죽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

어째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지 꽤 혼란스러웠지만 맞닿은 몸통에서 느껴지는 거센 심박은 규칙적으로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박동에 맞추어 호흡하고 있었다. 서운한 감정은 아직 가시지 않았어도 누군가 내가 생존했으면 한다는 말을 듣는 게 혼란스러운 현재에선 정신적인 지탱이 되었다.

“아크리스….”

너무나도 서글픈 목소리로 나를 애처롭게 부른다. 한 번도 아니고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기는 것처럼 나지막이 불렀다.

“아크리스… 아크리스….”

“내 상태를 짐작할 수 있어. 분명 나는… 또 누군갈 다치게 할 거야.”

“아니야. 사람들이 문제라면 수도와 떨어져 멀리 지내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

“수도엔 발도 들이지 말고 세르뷔에에서 쥐 죽은 듯이 살면 되는 걸까.”

“…세르뷔에는 바로 옆 마을이잖아. 너무 가까워.”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데?”

“내 친척이 듀스리아에 살고 있어.”

듀스리아면 시작 마을인 프린치피움의 옆 도시였다. 따지자면 수도와 꽤 떨어진 곳이긴 했다.

“그런데?”

“…….”

“테네브?”

“…나랑 같이 그곳으로….”

“크리스!”

테네브를 밀어내고 뒤를 돌아보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리헤로스가 있었다. 철렁했다. 나의 죄를 물으러 온 신의 사자로 보였다.

“리헤로스…!”

“드렉티오 경과 같이… 있었구나. 다행이다.”

“…….”

“불은 다 껐어. 불이 사그라들자마자 모두 도망쳐 버렸어.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걱정 안 해도….”

“용사. 그 자리에서 멈춰.”

테네브의 단호한 어투에 천천히 다가오던 리헤로스의 걸음은 당연하게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테네브는 나를 천천히 일으켜주고 나서 홀로 리헤로스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아크리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리헤로스는 놀란 얼굴로 테네브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왜인지 그 시선을 보고 있기 벅차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왜 아크리스 홀로 도망치게 둔 거지?”

“…조금 전의 사건을 이야기하시는 거라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사고를 수습하고 그들을 추궁하는 게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다른 사람은 중요하고, 그가 어떤 마음일지 전혀 생각지 않았다? 아크리스가 차순위라는 말을 돌려 하는군.”

“…….”

“아크리스는 당신을 위해 항상 애쓰고 있는데. 어찌 이리도 무심할 수가 있지?”

순전히 비겁하게 도망친 건 나의 선택이었을 뿐인데, 상황이 이리 흘러갈 줄은 몰랐다.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리헤로스 쪽에서 답이 치고 들어왔다.

“아닙니다.”

“거짓말. 대의를 위한다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소홀한 거지. 당신에게 아크리스는 과분해.”

“테네브…!”

테네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테네브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제발 멈춰달라고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테네브는 한풀 꺾인 분노를 다잡고 다시 리헤로스를 노려보았다. 둘을 떨어트려 놓는 것이 우선이었다.

“리헤로스, 잠깐 테네브랑 이야기하고 갈게. 미안해.”

“크리스….”

테네브의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 도착할 때까지도 테네브는 분에 찬 숨소리를 내쉬는 것이 노골적으로 들렸다.

“대체 왜 그랬어?”

“뭐가.”

“그렇게까지 나를 변호할 필욘 없었잖아. 순전히 내 잘못으로 커진 일인데.”

“…열받잖아.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동안 용사라는 녀석은 네가 아픈지도 모르고. 나는… 네가 얼마나 외로운지 알고 있는데.”

“리헤로스 잘못이 아니야… 그냥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고.”

“…끝까지 리헤로스를 감싸는 거야?”

“감싼다기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거야.”

“나라면… 나라면 널 혼자 두지 않아.”

“…….”

“난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내가 네 곁에 있는다면 나는…!”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 있어.”

워낙 여러 가지 상황들이 몰아닥치고 있어 느끼지 못했던 왼팔의 통증이 다시금 지끈거렸다. 소매를 걷자 본래의 피부색과 차이 나는 울긋불긋한 새살이 드러났다. 그것을 테네브에게 보였다.

“너라고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난 너와 있으면서 이런 상처도 생겼는데.”

“그건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으니 대처하지 못했던 것뿐이야. 네 비밀을 알고 있다면 진작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서 빼냈을 거야.”

“…….”

테네브에 말은 허황한 자신감이 아닌 확신에 가까운 힘이 느껴졌다. 그의 어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펜촉을 바짝 쥐어 꾹꾹 눌러 적은 느낌이었다.

“아크리스.”

“…….”

“네가…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아.”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테네브의 표정은 세상에서 본 그 어느 것보다도 절절했다. 내 나약한 마음을 비집어 열고 들어오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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