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눈을 뜨자마자 붕대를 풀어 치우고 반지를 왼손으로 옮겨 끼웠다.
검지에 끼인 붉은 알의 반지를 온종일 이리저리 돌리며 들여다보았다. 분명 버릴 때와 같은 모양의, 같은 의미의 반지임에도 프로포즈라도 받은 것처럼 멍했다. 나를 얼마나 생각해 주었는지, 그 마음이 너무나도 기특하고 갸륵하던지 마음 같아선 품에 안고 잔뜩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행복해. 이대로 행복하기만 하고 싶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라는 것이었다. 그저 아무 탈 없이 이대로 행복하기만 한 것. 신에게 기도하거나 누구에게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하기만 하면 깨어지지 않을 꿈이었으니까.
마음속 간절한 소망을 마치자마자 왼 팔목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윽…!”
통증을 견디기가 힘들어 자동으로 몸을 움츠러들었다. 통증이 익숙해졌을 때 고갤 들어 팔목을 살폈다. 흉터가 거의 남지 않은 왼 팔목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처음에는 벌레가 앉은 줄 알고 내려쳤는데 비명이 나올 만치 아프기만 했다.
‘이게 뭐지?’
검은 반점을 꾹꾹 눌러 문질러도, 침을 묻혀도 지워지지 않았다.
“딱지는 아닌데… 점인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흉터가 아물던 중에 그 안으로 화약이 들어갔다던가 색소 침착이 되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잠깐의 환상통이었겠거니 생각하니 더는 아프지 않았다.
“크리스. 준비 끝났어?”
“응. 나갈게.”
장비를 덜어놓은 그의 평상복은 지극히 평범했으나, 평범하다는 감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심…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조로운 의상임에도 시원시원한 팔다리, 쭉 뻗은 몸매로 인해 옷이 고급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은 단추 안 뜯어지게 조심해.”
“아하하. 그래서 로브도 챙겨가잖아.”
또 시각적 공격을 할까 봐 신신당부했다. 그런 모습을 또 보았다간 다른 의미로 실려 갈 것 같으니까.
집을 나선 후, 동네에 잘 깔린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시장도 열었겠네.”
“그러게. 아무래도 시장이 볼 게 많겠지?”
현실에서도 특별한 일 없이 심심하면 X마트나 롯X마트를 돌곤 했다. 시식 코너에서 신제품도 맛보고, 맛본 김에 하나둘씩 손에 들려 집으로 돌아오는 재미가 있었다.
‘시장 구경이 대화 주제가 안 떨어져서 좋긴 하지.’
리헤로스와 다니면서 대화 소재가 떨어져 소통이 단절된 경우가 없긴 했다. 그는 나나 본인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색상이 보이면 무심코 닮았다고 하질 않나 사소한 것에서 공통점을 찾으려 하고 편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으니까. 그런데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려면 ‘주제’가 필요하긴 했다. 그에게 조금 더 적극적인 대화를 하기 위함이랄까. 내 나름의 노력이었다.
“이 마을의 빵집은 어때?”
“아? 음… 수도 빵집만큼 맛있진 않은 것 같더라.”
“그쪽이 마음에 들었구나?”
“수도 빵집은 사람이 바글바글한 이유를 알겠더라니까. 아무래도 수도에서 살아남으려면 맛으로 경쟁을 해야 하니 그런가.”
“으응 그렇구나.”
“아, 이쪽 빵집은 초콜릿 들어간 크루아상이 맛있긴 하더라. 그게 제일 잘 팔려.”
“그랬어? 오늘 나도 먹어볼까.”
리헤로스는 초콜릿 맛을 좋아해서인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유유자적 길을 거닐던 중, 어느 가게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다른 가게의 앞마당까지 침범할 정도로 긴 줄이었다.
“아, 여기는… 기름, 집이네?”
“세르뷔에 특산물이 올리브 나무더라. 그래서 기름집이 잘 된다고 했어.”
“오호.”
올리브기름을 사기 위해 줄 선 인파 중, 낯익은 얼굴이 시선을 당겼다. 어디서 보았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먼저 알아본 리헤로스가 불쑥 그녀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웰라.”
“어머머! 리헤로스님, 아크리스님! 오랜만이에요. 절 기억해 주시다니 기뻐요.”
“잊을 리가요. 목걸이 사건 이후로는 잘 지내고 계세요?”
“서먹할 애들이랑은 여전하긴 해도, 두 분 덕분에 무사히 잘 지나갔지 뭐예요. 이런 곳에서 뵐 줄 꿈에도 몰랐네요.”
“저희 세르뷔에에서 살고 있거든요.”
“어머나! 그랬구나. 세르뷔에는 조용하니 살기 좋지요?”
왜 이런 곳에서 퀘스트와 연관된 인물을 만났을까. 웰라의 성향을 떠올렸다.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소문에 민감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종교에 관해 물어보면 아는 게 있지 않을까?’
테네브와 헤어진 마당에 종교의 정보를 처음부터 얻어야만 했다. 관련된 이야기를 얻을 수 있는 NPC이길 바라며 불쑥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웰라. 저희가 라이오펠 쪽에서 활동하지 않아서 그런데, 혹시 최근에 수도 안에서 도는 소문 같은 거 없나요?”
“소문이요? 으음 그런 게 있던가?”
“라이오펠의 마당발이시니까. 뭔가 아실까 하고요.”
“후후! 제가 그런 편이긴 하죠.”
눈을 굴리며 짧게 고민하던 웰라는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사이에서 조그맣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녀를 따라 자연스레 허리를 숙이고 귀를 모았다.
“최근 종말론을 신봉하는 종교가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종말론이요? 요즘같이 살기 좋은 때에 왜 그럴까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제 마왕도 죽었고, 그 어느 때보다 풍작이고 행복한데 이상하죠?”
“아….”
그 마왕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이미 한참 지난 일이지만 그 말에 웃을 수가 없었다. 내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직접 보게 되면 누구든 공감하게 될 것이다.
‘나도 내가 죽길 바라긴 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찝찝하네.’
예전에는 ‘마왕’의 껍데기를 입었다는 느낌이어서 이 역할로부터 분리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마왕과 혼연일체 되어버린 걸까. 웰라는 말을 멈춘 우리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수상한 낌새를 지우기 위해 바로 질문을 이었다.
“아하하… 그렇죠. 그렇다면 혹시 그 종교들의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어휴! 그건 저도 몰라요. 끔찍하잖아요. 종말론을 믿는 종교라니!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부정 탈 것 같다고요.”
“모르실 법도 해요. 워낙 위험한 단체니까 가까이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뒷골목이나 외진 곳으로 가시면 포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가요?”
“제 추측이긴 하지만요. 보통 그런 사람들은 떳떳하게 포교하지 않잖아요. 그도 그럴 것이 창조신 크레아누스를 믿는 국교가 떳떳하게 있는데 어찌 감히 종말을 운운하는 종교를 들이밀겠어요! 미친 거죠!”
웰라는 말을 이을수록 감정이 고조되는 것 같았다. 주신 크레아누스라는 존재는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의지가 되는 절대적인 존재인 듯했다.
“고마워요. 웰라.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별말씀을요! 두 분이랑 오랜만에 뵈어서 너무 들떴네요.”
“다음엔 백작님 저택으로 찾아뵈러 갈게요.”
“헤헷 좋아요. 백작님도 좋아하시겠어요. …꺅! 맞다. 얼른 심부름 마쳐야 하는데! 그럼 먼저 인사 올릴게요. 이만.”
웰라는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고선 우리의 인사는 보지도 않고 헐레벌떡 뛰어간다.
“결정했어. 우리 라이오펠 뒷골목 순회 가자.”
“흐음….”
“왜 그래?”
“오늘은 그냥 동네 산책하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아… 그렇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잖아. 이런 중요한 단서를 듣고도 그냥 지나쳐 가기엔 아깝지 않아?”
“흐으음…….”
“응? 그냥 뒷골목에 가서 조사하기만 하자. 별일 없을 거야.”
리헤로스의 표정은 최근에 본 것 중에 가장 갈등이 심해 보였다. 숨죽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눈빛을 피하려는 듯싶더니 힐끔힐끔 본다.
“조심해서 다녀오자. 싸움에 휘말릴 것 같으면 바로 자리를 뜨는 거야.”
“그래!”
“너는 아직 환자니까. 무리하면 안 돼. 우리 약속했었지? 나으면 가는 거였는데 조금 이른 감이 있잖아.”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반지도 이미 이쪽에 끼웠어.”
“아… 그러네?”
“진짜 다 나았어. 그러니까 반지도 무조건 왼손에 끼울 거야. …음, 어… 오른손에 끼우면 불편해서 그런 거니까 오해하진 마.”
“알겠어. 뭐가 됐든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 그럼 가자! 수도로.”
리헤로스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는 좀처럼 좋다는 이야기를 일반적으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민망한 반응이 나오기 전에 못 들은 척 앞장섰다.
…
수도 라이오펠까지는 금세 도착했다.
한번 오려면 마음을 먹어야 하는 거리이긴 한데 오늘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맞겠다.
“뒷골목…이라고 했지? 아무 데나 괜찮은 건가?”
“글쎄, 워낙 건물이 많아서 골목도 많긴 하지.”
“그럼 발이 닿는 곳은 일단 가보자.”
“응. 해지기 전까지만 움직이자.”
번화가의 도로에서 여러 갈래로 뻗친 길을 굽이굽이 들어가서 무작위의 골목에 들어서게 되었다. 대낮임에도 건물의 골목골목은 그늘이 드리워 한층 스산했다.
“뭔가 나올 것 같긴 하… 윽…!”
“크리스?”
왼팔 속 근육에 바늘이 수천 개 꽂힌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갑작스러운 통증은 무릎이 풀릴 정도의 충격을 일으켰고 리헤로스가 당황할 만도 한 반응이었다.
주체할 수없이 바르르 떨리는 왼손을 보니 근육 경련의 증상 같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이미 겪은 후유증이었으니 처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금방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 찰나의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크리스! 아직도 많이 아파?”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야. 정말 괜찮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역시 멀리 나오기엔 너무 일렀어. 돌아가자.”
“진짜 괜찮다니까? 일시적인 환상통…이었을 뿐이야.”
“환상통이면 심리적인 문제랑 연결된 거라 더더욱 쉬어줘야 해.”
“내가 괜찮다니까? 고집불통아!”
“고집은 네가 더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리헤로스는 내 무릎 뒤를 팔뚝으로 받치더니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신장이 크다 보니 아주 높이 몸이 떠올랐고,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밧! 바보야! 내, 내려줘!”
“떨어질라 가만히 있어.”
다리를 버둥대니 오히려 꽉 끌어 당겨버려서 완전히 밀착되었다.
‘미치겠네….’
그를 멍하니 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진짜 괜찮은데… 내려줘.”
“하나도 안 무거워. 깃털 같은데?”
“이렇게 무거운 깃털이 세상 어디에 있냐! 이제 조사할 수 있어!”
평소처럼 투닥대던 중, 리헤로스 걸음이 멈추었고 어딘갈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어떤 남자가 두리번거리다가 샛길로 빠지는 것이 보였다.
“따라가 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저 남자?”
“응. 급하게 어딜 가는 것 같아서.”
아마 리헤로스가 직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고, 리헤로스는 나를 내려주었다. 우리는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조심스레 다가갔고, 벽을 등진 상태로 소리만을 주워 담았다.
“심판의 날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모두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준비는 되었습니다만 아직 한 종의 성체를 불러내지 못했습니다.”
“그건 때를 기다리십시오. 우리를 추격하는 자들이 있어 그들의 동향을 살핀 후에 움직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마족을 소환하려는 이유가 종말론을 믿어서인 게 분명해졌지?”
“응, 그렇지만 굳이 마족을 소환해가면서까지 종말을 바라는 이유가 이해 안 되긴 해.”
“진상이 드러나면 차차 알 수 있게 될 거야.”
현실에서도 종말을 기다리는 종교가 심심찮게 있었다. 이곳과 다른 점은 마족 같은 걸 소환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일까.
─띠링
[시스템]
한 구역에 오랜 시간 머물러
‘신자’들의 경계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이건 또 뭔 시스템이야?’
난생처음 보는 시스템 메시지는 당혹스러웠다. 리헤로스를 팔을 잡고 골목을 벗어나려는데 신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누구냐!”
“음? 용사잖아.”
“왜 여기에 온 거지?”
신자들은 우르르 달려 나왔다. 저들끼리 웅성대기 시작했다.
“훔쳐보고 있다니. 음침하군.”
“실례했습니다.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못 들었나?”
“못 들었습니다.”
“듣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용사가 온 뒤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고요.”
“그건 그래. 저놈 때문에 라이오펠 백성들이 와해하는 거 아니겠어.”
“맞아. 라이오펠은 모두 하나였는데, 저 녀석이 모두 망쳤어.”
“진정하세요. 저와 리헤로스는 이만 가볼게요. 여러분을 해코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점점 말이 얹어질수록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오로지 탈출에 대한 욕구에만 몰두하여 초기 목적도 모두 잊게 했다.
“저 녀석 때문에 결국 왕국은 멸망하고 말 거야!”
“오오… 신이시여!”
“쫓아내자!”
“꺼져!”
“이봐요! 갈거니까 너무 화내지….”
─딱!
“윽…!”
─탁, 도르르륵
발치에 손바닥만 한 돌멩이가 굴러떨어진다. 구르는 소리 이전의 둔탁한 소리, 신음의 근원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어?”
내가 맞은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래서 설마 하는 심정으로 리헤로스를 올려다보았는데, 이마에서부터 붉은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화내기는커녕 이마를 짚으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짓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왜 이 세상은 그를 괴롭히는 걸까?
‘왜.’
무얼 그리 잘못했길래.
대체 무슨 자격으로 리헤로스에게 돌을 던지는 건가.
「우매한 인간에게 파멸을─」
머릿속에 여러 가지 소리가 어지러이 울렸다. 갖은 울림 속에 뚜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비열한 인간에게 고통을─」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는 나를 부추겼다.
「인간은 지배당해야 마땅한 미개한 족속─」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저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있을까?
“명중이다!”
비열한 웃음소리가 섞인 신자들의 외침은 분노로 몸이 떨리게 했다.
‘죽이고 싶어.’
‘저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어.’
뒷덜미 어딘가에 놓인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신자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죽어 버려!!”
─콰아아아앙!!!
내 외침과 동시에 검은 화마가 폭발하듯 전방을 향해 뻗어나갔다.
화마는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