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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83화 (83/127)

83화

내가 들은 게 진정 환청이 아니란 말인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듣는 의심. 머리가 띵해진다는 말이 그저 비유일 줄 알았는데, 정말로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목덜미가 찌르르르 울렸다.

“진심이야?”

“…….”

“네 생각이 그럴 줄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의도로 말한 건데?”

“…….”

테네브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네가 아픈 동안 그 집단의 움직임이 잠잠해지긴 했어.”

“하…!”

의심하는 게 맞는데도 왜 아닌 척하는 걸까. 나를 떠보는 모든 단어가 비겁하다고만 느껴졌다. 정말 저지른 일이었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텐데 모든 걸 걸고 결백하니까 더욱 불쾌했다.

“지금은 불가피하게 지시를 못 내리니까 잠잠해졌다고 생각한 거 맞네.”

“내 말 좀 들어봐.”

“오로지 심증만으로, 내가 마족이니까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로서는 의심해 볼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하! 정말 그게 네 최선이야?”

“…….”

“다른 이유를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마족의 핏줄부터 의심하는 거, 참 편리하네.”

“아크리스!”

“소리 지르지 마. 네가 화낼 상황이라고 생각해?”

억울한 감정은 차치하고,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배신감이 컸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는 두 번째 배신감.

‘유자현, 짜증 나게 질척거려.’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전 남자친구의 잔상이 다시 피어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친구라는 녀석에게 악의 주축인 게 아니냐는 말을 들을 줄 몰랐다.

“하하… 이럴 거면 그냥… 살려주지 말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죽게 내버려 두지. 그 혼란 틈에서 왜 나를 살렸어? 왜?”

역시 나는 환영받지 못한 존재인 걸까.

“그냥 죽어갈 때, 내 시체를 끌고 칼리고에게 가지 그랬어!”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럼 모든 게 해결됐을 텐데. 그렇지? 그게 네가 원하는 거 맞지?”

“아니야….”

“네 말은 앞뒤가 안 맞아. 이미 의심할 대로 해놓고 아니라니.”

“그냥 난…! 난 확신하고 싶어서….”

“내가 확신을 준다고 해도 네 마음속에 자리 잡힌 의심이 완전히 거둬질 수 있을까?”

“하아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분명히 아닐 거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 생기면 계속해서 증명해 보이라고 날 시험대 위에 계속 올리겠지.”

테네브는 대답하지 않는다. 기가 차니 무어라 말하는 것도 벅찰 지경이었다. 욕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걸 난생처음 체감했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줄래. 더는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

제 손을 어찌나 억세게 쥐는지 손가락 관절에서 두두둑 소리가 났다. 팔자로 그려진 눈썹은 이전까지만 해도 그저 귀엽게만 했는데 오늘은 나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게 왜 마족의 피를 타고나서, 왜 인간이 아니어서 이런 골치를 썩이게 만드냐는 그런 얼굴 같았다. 테네브에게 묻진 않았기에 진위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내가 느낀 바는 그랬다.

굳게 닫힌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내 변명이나 추궁을 할 용의가 없는지 몸을 돌렸다.

“경고하겠는데 내가 마족이란 걸 나불대고 다니면 넌 죽는 거야.”

그의 등에 대고 협박을 던졌다. 테네브는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일언반구 없이 방을 나섰다. 길게 늘어뜨린 붉은 휘장은 제 주인의 뒤를 따라붙었다.

“하아아아….”

리헤로스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너지고 나서부터 방심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선 나와 리헤로스에게 적대적인 존재가 너무나도 많은데도 테네브는 예외라고 생각했던 건지 어떤 경계심도 없는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역시 그는 글라디우스의 사람이다. 아무리 다른 기사단원과는 다르다고 할지언정 나는 그곳에 절대 섞여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의심받고, 검열당하며 내 존재를 숨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겠지.

‘리헤로스는 그러지 않았어….’

오히려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던 것은 리헤로스와 지냈던 초창기의 일이었다. 용사도 아니고 일반 기사 NPC에게 의심을 받고 목숨이 위태로워질 줄이야. 이 케이스는 나의 ‘예측, 예방, 대처’ 매뉴얼에 없었다.

정체를 알고 난 후에도 함께 돌아가자고, 다른 사람의 눈치 볼 것 없이 머물 집도 지어준 리헤로스가 얼마나 대단한 결심을 했고, 나를 위하고 있는지를 절절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에겐 역시 리헤로스뿐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허전해.’

리헤로스를 제외하고 마음을 터놓을 사람은 전혀 없었다. 페로를 친구라 지칭하기엔 여전히 나를 높게 우러러보고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테네브를 만난 기간이 짧긴 했어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으로 친밀감을 느꼈건만 너와 나는 다른 존재임을 상기시켜서 공통점은 완전히 부서져 버려 더욱이 배신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생각하지 말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차갑고 적적해진 공기는 누군가의 품을 연상케 하는 포근한 이불로 파고들며 해소했다. 왼쪽 팔이 아려왔다. 차라리 팔이 아파서 다행이었다. 마음이 더 아팠다면 오늘 밤도 지독한 악몽을 꾸었을 것 같으니까.

***

그날 이후로 테네브는 며칠이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아침 일찍 눈을 뜨면 저택 앞에 비치된 우체통이 삐그덕 소리를 내는데, 그때 창밖을 내다보면 익숙한 갈색 머리가 보였다. 그가 다녀가고 나면 뒤늦게 문을 열고 나타난 리헤로스가 우체통을 열어 본다. 그의 손에 들리는 건 흰색의 약통이었다. 매일 같이 약통을 우체통에 넣어주고 가는 것이었다.

‘미련하기는….’

테네브가 지내는 곳은 수도이고 여긴 옆 마을인데도 귀찮지도 않은가 보다. 며칠 전의 말다툼으로 그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된 것 아닌가. 그런데 뭐 하러 약을 두고 가는 친절과 수고를 베푸는지. 나를 의심했던 것에 대해 속죄하기 위함인지도 모르지.

새벽안개 사이로 그의 뒷모습이 멀찍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자면 내가 너무 매몰찼던 걸까 싶었다.

‘죽인다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아무리 화가 났어도 말은 가렸어야 했을까. 단전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한숨이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

─똑똑똑

“크리스. 일어났어?”

“아, 들어와도 돼.”

“응.”

아까 우체통에서 꺼낸 흰 약통을 들고 들어온다. 내 옆에 앉으면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기에 침 자국이라도 있어 보는 건가 싶어 괜스레 문질러댔다.

“크리스. 요 며칠 동안 멍해 보이는데 괜찮아?”

“아하하, 내가? 그랬나?”

“응.”

불미스러운 오해로 절교하게 되었지만, 모처럼 생긴 친구인데 안 좋은 일로 싸우니 역시 마음이란 게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는 표정을 숨기는 데에 재주가 없기도 했다. 우울한 감정을 리헤로스에게 전이시키지 않았으면 해서 애써 웃었다. 더욱 과장된 목소리로 밝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혹시 드렉티오 경과 싸웠어?”

“어…? 어, 어떻게 알았어?”

“다른 게 아니라 늘 찾아오던 분이 어느 날부터 안 오시니까. 그날 이후로 너도 계속 멍해 있기도 했고.”

요즘 관찰력이 늘었다 싶더라니 이젠 나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기라도 하는 건가. 원래 섬세한 스타일이긴 하여서 놀랍지는 않았다. 단지, 테네브와 싸웠다는 걸 들켰다는 자체가 더러운 사회적 인격이 드러난 게 아닌가 민망했다.

‘리헤로스는 너무 착해서 이런 거로 싸운 걸 이해 못 할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런데 어쩌다 싸웠는지 묻기보다는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응… 뭐어 난 괜찮아.”

“내가 몇 배 더 노력해서 그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해줄게.”

“…….”

서슴없이 파괴력 높은 대사를 읊는 건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이런 확신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큰 위로가 되었다.

“그, 그러면…….”

“응?”

“그러면… 확실히 약속해….”

“어떻게 약속할까?”

리헤로스가 먼저 새끼손가락을 들어 까딱댔다. 내가 자주 하던 행동이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건 들뜨게 했다. 손가락을 얽고 살래살래 흔들고 놓아주었다.

“그럼 이제 약 바르자.”

팔에 감긴 붕대를 천천히 풀어냈다. 징그럽게 갈라져 있던 딱지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붉은 새살은 피부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약 안 발라도 괜찮을 것 같아.”

“그건 크리스 생각일 뿐이지.”

“그러니까 당사자인 내가 안 아프대도?”

“그래도 더 지켜보자.”

“끄응….”

처음에 약을 발랐을 때의 작열하는 고통과 달리 지금은 긁은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르는 느낌이었다.

“다 발랐어. 어때 괜찮아?”

“응, 고양이가 긁은 상처 정도의 따가움이야.”

“엄청 아프겠는데.”

“그럼 햄스터가 긁은 정도.”

“음… 햄스터에겐 안 긁혀봐서 잘 모르겠네.”

“아하하.”

진지하게 햄스터에게 긁힌 상처를 골몰 중인 리헤로스를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처도 아무 탈 없이 낫고 있고 분위기도 풀렸겠다 바깥공기가 쐬고 싶었다.

“나… 내일은 밖에 나가고 싶어.”

“많이 답답해?”

“응. 멀리는 안 바래. 동네 산책이라도 하고 싶어.”

“동네라면… 조심하면 되겠지. 그러자.”

“신난다. 그럼 내일은 목욕도 해야지. 상처 때문에 물수건으로만 닦아서 끈적거려서 씻고 싶었거든.”

“씻는 거….”

“응?”

“내가 안 도와줘도 괜찮아? 등에 손 안 닿지 않아?”

“뭇, 무… 무슨 소리야! 혼자 할 수 있어!”

“정말? 그러면 말고.”

“이익….”

간혹 튀어나오는 은근한 능글거림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하염없이 베풀기만 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떠오른 것이 있었다.

“리헤로스… 혹시 그거 기억나?”

“어떤?”

“다치고 오기 전날 나한테 줄 거 있다고 했잖아.”

“아!”

리헤로스 답지 않게 완전히 잊고 있었나 보다. 하긴 상대방이 죽다 살았는데 뭘 전해 주는 게 대수이던가. 나도 꼭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은 건 아니었다. 준다고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을 뿐, 이미 지나버려서 줄 수 없는 것이라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잠깐만.”

“지금 가지고 있는 거야?”

“응. 손 줘봐.”

왼손을 내밀자 리헤로스는 웃으면서 반대쪽 손을 가볍게 쥔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내 오른손 검지 위에 끼워졌다. 반지의 붉은 알이 아침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건….”

“늘 가지고 있었어. 너랑 헤어지고 난 이후부터 쭉.”

그와 헤어질 때 바닥에 내던져버렸던 반지였다. 워낙에 작으니 굴러 굴러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리라 생각했건만.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고?’

나와 재회하는 것을 상정하고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놀라운 것은 둘째치고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바닥에 구른 충격으로 보석에 금이 가고, 링이 조금 찌그러졌었거든. 있는 그대로 끼워주는 게 의미가 있지 않나 싶었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완전한 게 좋잖아. 보석 세공사에게 가서 복원 요청했어.”

“너….”

“으응.”

“너어어…! 나 모르는 사이에 뭘 이렇게 많이 했어…?”

“하하, 놀랐지?”

나 몰래 무언갈 늘 부지런히 하고 있다. 새집 이후로는 놀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거늘 우정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물건을 여태껏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테네브 때와는 다른 의미로 울컥했다. 목울대가 꽉 막힌 것 같았고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우는소리가 나올 것 같아 힘겨웠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향해 말을 했다.

“……고마워.”

그와 있으면 어떤 고민도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이렇게 행복하기만 해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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