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네가… 공주님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크리스…?”
충동적인 말이었다. 왜 이런 말을 하게 됐는지 변명할 말도 꾸며내지 않은 채 지른 객기였다.
그가 누구와 사랑을 나누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지 않은가.
“내 곁에 남겠다고 말해놓고… 공주님과 혼약했으면 왕성으로 가게 되잖아.”
“…….”
“그럼 난 혼자가 될 텐데 네 친절에 익숙해지기 싫어. 그럴 거면 나한테 잘해주지 마.”
“그건….”
“왕성으로 같이 가자는 얘기할 거면 하지 마. 나는 안 갈 거니까.”
말에 살을 붙일수록 부끄러움은 증폭되었다. 마음 같아선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었는데 불편한 몸이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아 고갤 돌려 리헤로스의 시선을 피했다.
허나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걸 계속해서 지켜보는 건 고문이 따로 없다. 그래서 울컥하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줄줄 쏟아내었다. 직설적인 말이 그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걱정스럽긴 했다. 이것도 내 이기심일까. 그러지 않길 바랐다.
리헤로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손 등을 천천히 감쌌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크리스.”
“…….”
“나 좀 봐줘.”
천천히 얼굴을 들어 마주했다. 신이 빚은 작품이 인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중에도 신이 자랑할 만한 잘생긴 얼굴에 약하다는 걸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공주님의 연세라고 할까… 나이를… 몇 세로 알고 있어?”
“몰라. 얼굴도 모르는데 나이라고 알겠어.”
“그렇구나, 음… 공주님은 성인식도 안 마치신 11세 셔.”
“엑?”
이상하다. 왜지. 머릿속엔 대답해 줄 사람도 없는데 묻고 있었다.
공주님이 어린 소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따위의 질문이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다. 이성적 판단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럼… 그럼?”
“사려 깊고 좋은 분이시긴 하지만, 혼약까지 할 사이는 아니야. 그러면 큰일 나기도 하고.”
“아…!”
녹틸이 왜 소문을 믿지 말라고 말했는지, 신빙성이 없다고 한지 인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두 사람의 결혼은 불가능했으니까. 그런 거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빙빙 돌려서 오해하게 만드는 건가? 녹틸에게 당장 달려가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소문 퍼트린 놈들은 무슨 생각인 거야?’
공주님과 용사님의 결혼은 서양 판타지 RPG에선 일반적인 것 아닌가. 당연하게도 그쪽이 진 엔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문을 의심할 여지가 한 톨도 없었다.
“내가 공주님과 결혼하는 줄 알았어?”
“아… 소, 소문을 들어서….”
“어디서 그런 소문이 돈 걸까.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물어보지 그랬어.”
“그런 일이 있으면 네가… 먼저 알려줄 줄 알았… 그런데 아니었으니 말을 안 한 게 당연하네… 아… 미치겠다….”
“아하하.”
“왜 웃어!”
“아까 ‘그럴 거라면 나한테 잘해주지 마’라는 말이 귀여워서.”
“읏.”
미치겠다. 아무리 분위기에 취했어도 그렇지, 무의식적으로 쏟아낸 말들을 복기시켜주는 건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지 않을 거니까 잘 해줘도 되지?”
“마, 맘대로 해…!”
“그래. 내 마음 가는 대로 할게.”
“그, 근데 너는 그렇다 쳐도… 공주님은 널 좋아하는 거 아니야? 혹시 모르잖아…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실 수도.”
“왜 그런 것까지 걱정해?”
“아니 그야… 공주님이 어린 마음에 서운해하시면….”
확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면서 솔직하지 못하게 굴었다.
“그럴 리가. 그분에게 있어 나는 이야기꾼 정도일 거야. 바깥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시거든, 당연하지만 네 얘기도 많이 했어. 아마 널 보면 반겨주실 거야.”
“진짜…?”
“공주님과 가까워졌을 때, 함께 뵈러 가자고 권하고 싶었는데 근래 네가 워낙 바빠서 물어볼 수가 없었어.
“아… 그래?”
‘당연히’ 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 우쭐해지게 했다. 함께 뵈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마저도 그를 보조하는 부품이 아닌 진정 동반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아, 물론 네 탓을 하는 건 아니야. 최근 왕궁도 어수선해서 통 뵐 수 없긴 했어.”
“그렇구… 어? 왕궁이 어수선하다니. 무슨 일 있어?”
“의뢰가 들어온 게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긴 한 것 같아. 경비가 삼엄해져서 공주님을 알현하려면 뚜렷한 목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러 가는 건 불가능할 거야.”
“설마… 내가 조사했던 마법진이랑 연관 있는 걸까….”
“조사? 마법진?”
그가 솔직히 이야기해 준 것처럼 나 역시 겪어온 이야기를 해줄 때가 됐다.
“사실… 녹틸을 돕는 일이 끝나면 테네브와 함께 마족과 관련된 모종의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어.”
“아아….”
“마족 소환 주술을 하는 집단이 있어. 놈들은 마왕의 부활을 원하는 것 같은데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는데 언데드만 소환하더라고. 내가 마왕일 당시의 마물은 아니었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네가 걱정할 것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제 더는 숨길 수도 없으니… 이야기하는 거야.”
“말하지 않는 게 훨씬 더 걱정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다쳐서 오기도 하니까.”
“정작 조사할 땐 안 다쳤거든? 이건 순전히 기사단의 무기에 휘말려서 다친 거란 말이야.”
“나 드렉티오 경에게 다 들었어.”
“…….”
“조사하고서 칼리고 경에게 묶인 거 아니야?”
“그건 맞지.”
“그럼 연관이 있네.”
“그런가….”
“내가 서운할 만한 거 맞네.”
“윽… 그, 그렇지만 네가 바빠 보이니까 신경 쓰이게 하기 싫었단 말이야.”
“크리스는 바보야.”
평소라면 내가 리헤로스에게 바보라고 하는데 역할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완전 범죄를 꿈꿨으면 들키지 않아야 하는데 결국엔 들켰으니까. 리헤로스는 내 왼손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을 잃는 게 더 두렵다고 했던 거 기억나?”
“어…… 아! 아주 예전에 그랬었지.”
그 얘기라면 책을 훔쳐 간 루카를 쫓던 날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그 이야기를 짧게나마 해줘야 네가 나를 이해할 것 같아서.”
드디어 이야기해 주는구나. 기대감 만발이었다.
“응, 나한텐 세 살 아래 남동생이 있어.”
“진짜?”
조금 작은 버전의 리헤로스로 떠올리자 흐뭇해졌다. 상상하는 것까진 즐거웠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삼 년 전에 동생을 사고로 잃고 나서 강박감이 심해진 것 같아.”
“뭐…?”
“많이 힘들었었나 봐. 내게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동생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고 있었거든. 그저 잘 지낸다고 생각하고… 괜찮은 줄 알았던 거야.”
해맑고 모난 것 없는 성격은 어떤 사건 사고도 없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라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이런 부류의 아픔이 있을 거란 생각은 상상도 못 했다.
“바보 같은 형이지.”
“아….”
나도 가족을 잃어보았기에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사고였는지 물을 수 없었고, 탄식에 가까운 소리뿐이었다. 질타 받거나 위로받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까.
‘이럴 수가 있나….’
나, 테네브, 리헤로스는 각자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각기 다른 성격과 생활 양식을 하고 있었다. 리헤로스나 테네브는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을까. 게임 캐릭터여서일까? 궁금증을 넘어서 동경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니 크리스.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라면…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물론 내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거라도 이야기해 줘. 함께 헤쳐 나가보자.”
“…….”
“또다시 손도 못 써보고 잃고 싶진 않아.”
그 누가 이 말을 듣고도 그렇겐 못 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리헤로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일이라면 기꺼이 할 것이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
“내 마음을 짐작하지 말고, 물어봐 줄래?”
“…….”
“그래 줄 거지?”
“…그건 노력해 볼게.”
이로써 주도권이 완전히 리헤로스에게 넘어간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휘말린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새로운 대화 주제를 찾으려고 애썼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진 않았다.
“어… 음.”
“네가 조사하던 그 집단에 대해선 내가 알아볼게.”
“뭐? 이럴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던 건데!”
“말했잖아. 너도 지키고, 네가 살아갈 이 세계도 지켜주겠다고.”
“윽….”
“지금은 네가 다치고 의심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내가 했던 다짐이 완전히 무너지는 거야.”
시도 때도 없는 파괴적인 대사를 읊는 리헤로스였다. 덕분에 얼굴의 열기는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리헤로스가 공주님과 결혼하는 엔딩이 아니라면… 역시 미지의 집단을 파헤쳐서 숨은 보스를 처치해야겠지.’
그렇다면 리헤로스와 동행하는 게 맞다. 수도로 오기 이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혼자는 안 돼. 나랑 같이 가.”
“너 환자야.”
“다 나으면. 안 그러면 절대로 못 보내.”
“으음….”
“약속해!”
익숙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여태껏 손가락 걸고 한 약속은 모두 지켜왔으니까. 이것도 절대 어길 수 없는 맹약이었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좋아. 몰래 두고 가면 가만 안 둬.”
“어떻게 가만 안 둘 거야?”
“이렇게.”
붕대가 감긴 쪽의 주먹을 가볍게 쥐고서 금발에 콩 가져다 댔다. 리헤로스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활짝 갠 미소를 보자 환시와 망상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웠던 감정은 까맣게 잊혀질 정도였다.
내 인생에 리헤로스 같은 사람을 만난 건 크나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
다음 날, 테네브는 늘 오던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왔다. 약통을 내려놓으며 내게 들을 말이 있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에 먼저 입을 뗄 수 있었다.
“나… 여기 남을 거야.”
“왜? 용사를 설득 못 했나?”
“그건 아니고 여기에 남거나 떠나나 다를 건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여기 남겠다고?”
테네브의 눈썹 한쪽만이 쭉 치켜 올라갔다. 입꼬리는 한껏 내려가 노골적으로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응….”
“이해할 수가 없군.”
“리헤로스에게 피해 안 가게 잘 할 거야. 염치없지만 너한테도 부탁할게.”
“부탁한다니? 무얼?”
“내가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어. 리헤로스와 같은 인간으로서 협력해 주면 안 될까.”
“나라고 뭘 할 수 있을까.”
“칼리고가 채찍을 들었을 때, 앞에 나서줬던 것처럼 그에게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같은 편이 되어준다던가. 대단한 걸 해달라는 게 아니야.
“…….”
“그냥… 그와 잘 지내줘.”
“그와 네가 같을 수 있겠어.”
“부탁할게. 리헤로스가 좋은 사람인 건 너도 알잖아. 날 친구로 여기는만큼 그와도 잘 지냈으면 좋겠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래. 네 부탁이니까.”
“정말 고마워.”
“한마디 해도 되나?”
“응.”
“너 대책 없다고 생각해. 내가 경고해 줬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듣다니.”
“어쩔 수 없어. 내가 리헤로스 옆에 있어 줘야 해.”
그의 옆에 있고 싶기도 하니까.
“용사가 갓난아이도 아닌데 대체 왜?”
“사정이 있어. 개인적인 일이라 말해주기가 어려워.”
그는 입술이 아파 보일 정도로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리헤로스의 과거, 나의 감정. 이 두 가지의 복합적인 사정이 내 발목에 엉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사정이란 게… 정말 개인적인 사정이 맞나? 나랑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무슨 소리야.”
“……이를테면 내 눈을 속이고 해야 할 일이 있다든지.”
말의 저의를 곱씹어 보았다. 그 후에 내려진 결론은 차마 표정 관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너 설마… 지금… 그 집단과 내가 관련이 있으리라 의심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