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빨래 끝.”
평화로운 일상은 지속되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가사 일을 마치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리헤로스에게 말하려고 했다. 조리대 앞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한참 정신이 팔려 내가 바로 뒤까지 온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왁!”
“허, 크리스? 깜짝이야.”
“뭘 그렇게 봐? 빨래 다 널었어.”
“고생했어. 식사는 준비되면 이야기해 줄게.”
보여줄 물건은 아닌지 황급히 제 주머니에 찔러 넣어버린다. 그가 보여줄 거라면 진작 보여줄 성격이니 내버려 두었다. 아무리 친하고 같은 집에 산다 해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줘야 하니까.
“그럼 침실 정리나 해야겠다.”
별생각 없이 2층 침실로 향했고, 창문에서 날아든 페로가 착지하기 무섭게 조잘조잘 말을 이어갔다.
“아크리스님! 테네브님이 보낸 서신이에요.”
“오 벌써 왔나?”
“그날 이후로 나흘이나 지났는걸요.”
“진짜? 언제 그렇게 빨리 지나갔지.”
마의 징조와 마물이 쏟아져 나온 마법진으로 가득 찬 집. 그것을 상부에 보고하겠다며 테네브가 자취를 감춘 지 나흘이 된 날이었다. 그간 책 집필한다고 사람의 몰골이 아니던 녹틸을 도와 일을 했었고, 리헤로스와의 생활에 충실했기에 얼마나 지났는지 체감도 못 했다.
‘그동안 이상한 악몽도 안 꿨지.’
평화는 쏜살같이 흐르는 것 같다. 이런 평화를 리헤로스의 평생이 되도록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은 더욱 확실해졌다. 비정상적인 단체의 실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이 생겼다. 기다릴 것 없이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와 리헤로스에게 말을 전했다.
“리헤로스. 나 일 다녀올게.”
“식사는?”
“녹틸 집에 가서 먹을게. 좀 급한 건이라.”
“어쩔 수 없지. 알겠어. 오늘도 힘내.”
“조금 늦을 수도 있다? 기다리지 말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일찍 자.”
“그래도 웬만하면 해 뜰 때 돌아와. 여긴 가로등이 많이 없으니까 어두운 곳이 많아서 걱정돼.”
“어휴, 걱정도 많다.”
웃으면서 집 밖으로 나가려는데 따라온 리헤로스가 왼손을 덥석 잡았다.
“오늘 일 마치고 오면… 줄 거 있어.”
“뭔데?”
“비밀이야.”
“치사하네… 힌트도 없어?”
“그러니까 일찍 와. 일찍 오면 더 빨리 볼 수 있잖아?”
“와~ 진! 짜! 치사해!”
그는 그저 푸스스 웃기만 했다. 웃음으로 무마하는 건 정말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거다. 투덜대며 인사를 마치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창가에 앉아있던 페로가 포르르 날아와 어깨에 사뿐히 안착했다.
“페로, 오늘은 집에 있어.”
“에에? 왜요?”
여전히 서먹한 리헤로스와 조금 더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오늘은 왠지 느낌이 안 좋거든.”
“싫어요! 같이 가요! 제가 도움이 안 돼서 그런 거예요?”
이 여리디여린 어린 박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니야. 너는 여기에 남아 더 중요한 걸 지켜야 해.”
“제가요? 그게 뭔데요?”
“집.”
“…….”
페로의 들뜬 표정은 점점 시무룩 죽죽 해지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턱에 호두를 만들었다. 그래서 손짓과 발짓 모두 사용해가며 설득하려 노력했다.
“잘 생각해 봐.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누가 집을 부수면 어떡하지? 우리는 내일 당장 길바닥에서 자야 할 수도 있어. 네 방이 없어진다고 생각해 봐. 따뜻한 이불도!”
“끔찍해요!”
“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알겠어요!”
“그럼 부탁할게.”
페로의 머리를 잔뜩 쓰다듬은 뒤, 숲속으로 들어왔다. 쓰러진 고목의 안에 숨겨둔 활을 몸통에 걸었다.
‘뭘 준다는 거지? 도통 예측이 안 되네.’
최근에 뭐가 필요하다던가 부탁한 게 없었기에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받을 수만은 없지. 돌아오는 길에 책 한 권 사줘야겠다.’
리헤로스가 집을 마련하면 책을 모으고 싶다고 했으니 한 권씩 사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장르도 안 가리니 선물하기 너무 좋은 스타일이었다.
‘시집도 좋아하려나?’
머릿속에서 그에게 줄 선물을 떠올리고 있으니 테네브가 멀리에서 보였다.
그의 연락이 오면, 수도와 우리가 사는 마을 ‘세르뷔에’의 정확히 중간에 있는 고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벌써 왔냐?”
“오는 길에 서신을 보냈지. 너도 생각보다 빨리 왔군?”
“당연하지! 오늘도 힘내보자!”
“며칠 전에 헤어질 땐 병든 닭처럼 비실대더니. 그새 회복했군.”
“누가 비실대?”
“그래. 지금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린다. 갑자기 의욕이 생긴 이유가 있나?”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친구인데 뭐 어떤가 싶어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너는 누굴 좋아하다가 이 세상까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적 있어?”
“그런 복잡한 감정은 아직은 겪어본 적 없어.”
“뭔가 너답다…. 난 비로소 깨달은 것 같거든.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도 세상이 평화롭고 좋아지길 바라는지.”
“그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응.”
“흠, 상대는 리헤로스인가.”
“악!”
무의식적으로 소릴 질렀다. 그러자 테네브는 씨익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기엔 너랑 가까운 사이는 그뿐 아닌가?”
“도출된 이유가 고작 그거라는 점이 열받네. 나 친구 많거든?”
“그렇다고 믿어주지.”
“짜증 나… 괜히 말했어.”
“그런데 친구가 많든 적든 어떤가. 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됐지.”
“맞는 말 하니까 더 짜증 나. 말하지 마.”
“그냥 그럴 거면 내가 싫다고 해라.”
“내가 언제 널 싫다고 했어? 좋아하지.”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원래 그렇게 남에게 좋아한다고 곧잘 이야기하는 편인가?”
“잘 이야기하진 않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무, 뭐를?”
“나 친구 없는 거.”
“아아…….”
“그 반응 뭔데? 네가 먼저 나 친구 없다 그랬잖아.”
“농담이었을 뿐인데 그 정도로 꽁해있었나? 네 성향은 잘 알았다.”
“뭔 성향?”
그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기만 했다. 어이없었다. 무슨 성향으로 추측하든 별로 궁금하지 않아 내버려 두었다.
녀석의 허리띠에 꽂힌 지도를 팍 빼앗아 펼쳐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간다는 건데?”
“여기. 서쪽.”
“이쪽도 표시가 되어있긴 하네. 근데 원래 갔던 남서쪽 스팟이랑 너무 가깝지 않아?”
“순차적으로 갈까 했거든.”
이상하리만치 저 구역은 아닐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맞다. 나 기획자였지?’
현생의 정체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본직은 시스템 기획자긴 했으나, 퀘스트나 컨텐츠 쪽 기획서도 많이 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있었다.
‘퀘스트 스팟은 절대로 몰아두진 않지.’
보통 만들어 둔 필드를 고루고루 쓸 수 있게 메인 퀘스트를 분포해두고, 그 중간에 루즈해지지 않게 돌발 퀘스트나 서브 퀘스트를 넣곤 한다. 게임적 기조가 통하는 곳이니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왜 말이 없어? 반응이 영 시큰둥한데.”
“테네브… 이 지도나 네 분석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왠지 그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좀 더 가야 있을 것 같아.”
“이건 네가 찾아낸 증거잖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직감.”
“어이가 없군.”
“가끔 그런 거 있잖아 동물적인 감각이 울리는 그런 거. 너도 알지 않아? 동물적 감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잘 모르겠지만, 두 지점이 그리 멀지 않으니 들렀다 가볼까.”
“오? 어이없다고 해서 무시할 줄 알았는데.”
“가끔은 직감을 믿는 게 좋거든. 네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무의식적으로 짚이는 곳이 있어서 일 거야.”
“호오.”
꽉 막힌 기사 나리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융통성이 있었다.
‘짚이는 이유라는 게 빙의 전의 직업 때문이라 차마 말하지 못하겠지만.’
흔쾌히 수락한 만큼 말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이동했다. 지도를 보며 각 스팟 사이의 중간지점을 찾아 그곳을 목표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엔 어떤 건물이 있다기보단, 우거진 숲의 중앙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호언장담하듯 말했던 내 근거 없는 자신감이 민망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
처음으로 내 상식이 틀린 게 아닌가? 가끔은 게임적 상식이 안 통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말없이 미간이 구겨진 테네브를 보니 머쓱해져 그의 소매를 쭉 잡아당겼다.
“미안하다. 내가 틀렸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으로 가자.”
“아니야.”
“응? 뭐가 아니야?”
테네브는 마치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잔뜩 경계해서는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숲을 둘러보았다.
“왜 그래? 뭐가 있어?”
“엎드려.”
“엉?”
“엎드려!”
어깨를 꾹 눌러 내리더니 검을 뽑아 허공에 가로질렀다. 검기는 앞을 쭉 뻗어나가더니 멀거니 서 있는 나무를 베기만 했다.
“너… 뭐해?”
혹시 테네브가 예전의 리헤로스처럼 이상한 환각을 보고 있는 걸까. 이런 걱정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검기가 날아간 곳에서 무언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물이 있어.”
“뭐라고?”
그 순간─
우리를 둘러싼 나무가 울렁울렁하는 것처럼 보였다. 환각에 당한 게 아니었다.
어두운 나무 껍데기의 색깔로 은신을 하는 생명체였다.
그것들은 일제히 날개를 펼치더니 공중으로 날아들었다.
“나방이야!”
“징그러운 놈들!”
“몸을 숨기고 있었어. 완전히 들어오고 나서야 눈치를 챘어. 바보 같게도.”
“이 정도면 모를 만도 한 거 아니겠어.”
나는 화살을 꺼내어 겨누었다. 불규칙적으로 퍼덕이는 나방 형태의 마물들은 조준이 제법 어려웠다.
그래도 워낙에 수십 마리가 머리 위를 빼곡히 채우며 날아다니고 있어 대충 쏘면 한두 마리는 명중할 수 있었다.
─치이익
우리 위를 날아 지나가며 무언가 뱉어대는데, 보라색의 타액은 떨어진 위치에 존재하는 식물을 까맣게 태웠다.
“조심해! 부식이야!”
“짜증 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네.”
불을 보면 거침없이 달려드는 나방답게 어떤 방어방법도 없이 무작정 공격만 해왔다. 그런 마물들을 쉴 새 없이 반으로 갈라버리는 테네브의 검술은 유려했다.
“테네브!”
그는 내 부름에 뒤들 돌기 직전이었다. 나를 보라고 부른 건 아니었다. 말로 설명할 시간이 없어 그의 뒷덜미 옷깃을 확 잡아끌어 당겼다. 굳건한 무릎이 굽혀지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취이이익
마물의 보랏빛 액은 테네브의 검 손잡이 부분 쪽에 살짝 튀기더니 녹아내려 버린다. 내가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몸통 쪽에 직통으로 맞았을 것이다. 그 생각이 닿자 등에 식은땀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차가워졌다.
“뒤도 조심해!”
“어어, 고마워.”
그렇게 필사의 공격을 쏟아붓고 자기 풀에 지친 나방들은 탈진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싱거운 마무리였다.
“테네브, 잘했어! 이번에도 아주 어렵진 않았네.”
“네 서포트도 좋았어.”
그는 손을 들어 보였고, 우린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 그는 손가락을 구부려 꽉 감싸 쥐었다가 놓는다. 미묘한 감각을 돋우는 하이파이브여서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어? 테네브! 저기 봐!”
“음?”
“마의 징조다.”
나방이 쏟아져 나온 나무들을 중심으로 마의 징조가 솟아있었다.
“나방들로 하여금 은닉하고 있던 거였네.”
“네 직감이 맞았어. 잘 됐군.”
신난 마음에 곧바로 지도를 펼쳤다.
“우리가 북쪽에 왔잖아. 여기.”
“그렇지.”
“눈치챘어?”
“못 챘다고 하면 바보 취급 할 건가?”
“그럴 리가 없잖냐. 각각의 마법진을 이어보면 모양이 드러나.”
“설마… 각기의 장소에 있는 진이 개별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전부 거대하게 이어져 있다는 거지.”
“거대한 마법진….”
기획자 시점이 들어맞았다면, 지극히 클리셰적 관념으로 추측하는 게 맞을 것이다. 거대한 마법진은 팔각별 형태로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기사단을 각각의 스팟을 지정해서 보내면 금방 진압이 가능해.’
─바스락
“누구냐!”
수풀 속에서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네 다섯 명 정도의 인영이었다. 그중 하나는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벤? 여긴 어떻게….”
“벤이면 설마… 저번에 같이 있던 기사단원?”
“너…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냐!”
“그게 무슨 소리야?”
“저놈! 주동자가 분명하다! 체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