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테네브.”
“왜?”
“손 줘봐.”
그의 손바닥 위로 글씨를 썼다.
‘아까 찾은 단서. 내가 가지고 있을게.’
테네브는 미세하게 끄덕였다. 테네브가 가지고 갔다간 또 칼리고에게 몸수색을 당한다던가 빼앗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걸 가지고 녹틸에게 가면 빠르게 해독해 줄 수 있기도 하니 내 쪽이 가지고 있는 편이 속 편했다.
고개를 살짝 올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페로를 보았다.
‘그래. 그렇게 조용히 따라오면 돼.’
지금까지는 모든 게 완벽했다. 글라디우스 기사단에 책잡힐 일은 없을 것이라 자신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신경 쓰이는 건─
“야… 이거 둘러.”
상체를 내놓고 다니는 테네브였다. 다행히도 나는 옷을 겹겹이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바깥쪽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에 툭 올려두었다.
“고맙긴 한데, 너는 괜찮아? 날이 지면 추울 텐데.”
“그, 그게 문제야? 남사스러워서 보고 있을 수가 없는데!”
“그럼 잘 쓸게.”
딱히 리헤로스와 가구를 사러 갔을 적, 민망한 상황들이 떠올라서는 아니다. 정말이다.
특정한 사건을 잊으려 애쓰면, 어떤 것을 잊기 위한 건지 떠올리기 때문에 더욱 기억이 선명해진다지 않았던가. 머릿속엔 리헤로스의 흉부가 한껏 클로즈업되었고 고개를 돌리면 반라의 테네브가 있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저기, 아크리스라 했나?”
곤란한 상상 속에서 내적 몸부림을 치던 중, 뒤따라오던 기사단원 하나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
“왜.”
“용사도 같이 왔나? 오랜만에 그분의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말이야.”
“리헤로스는 없어. 나 혼자야.”
“그래? 왜? 버림받았어?”
“…….”
“용사가 이제 네가 필요 없대?”
“둘이 사귀는 사이 아니던가?”
“촌뜨기가 수도에 와보니 눈이 휘둥그레지겠지. 눈 돌리면 미인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한 명 가지고 만족하겠어. 큭큭큭.”
“헤헤, 그런 걸까? 크하핫!”
헛소리에 답을 하지 않으니 둘이 신나서 씨불인다. 이놈들은 아가리를 다물고 있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테네브에게도 그러더니 눈에 띌만한 반응이 없어서인지 내 쪽으로 타겟을 변경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 참았던 분노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별말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걸 보니, 어쩌면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어서일지도 모른다. 뒤로 돌아 닥치라고 소릴 지르려던 찰나, 테네브가 앞을 막았다.
“야! 비켜….”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을 죽죽 잡아당겼지만, 내 쪽으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말콤, 벤. 잠시 멈춰봐.”
“엥? 왜?”
“오늘 안에 다 돌아보려면 빠듯할 것 같은데 우리 1조, 너희 2조. 이렇게 찢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찢어진다니? 우릴 따돌릴 생각은 아니겠지. 허튼수작 부리지 마.”
“한시라도 빨리 여러 군데를 조사하는 게 좋으니 제안하는 거야. 싫으면 같이 다녀도 상관없고.”
“흐음, 한 군데가 아닌가 보지?”
“그래.”
“각 지점의 특징은 어떤데?”
“첫 번째 장소는 창고였고, 본채를 수색하다가 나와서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는 중이야. 우리가 지금 가는 곳.”
“수색하다 말고 왜 나왔는데?”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직접 가보는 게 나을 거다.”
테네브는 단원들을 데리고 오물을 뒤집어썼던 오두막집 앞에 도착했다. 문밖에 있을 뿐인데 여전히 고약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우웁….”
“크으… 이게 무슨 냄새야?”
당연하게도 두 사람도 참지 못했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칼리고도 이곳에 오면 헛구역 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 정도로 지독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이 안으로 들어가서 재수색해 봐야 해. 씻느라 아직 살펴보지 못했으니.”
“아이 씨… 여길 어떻게 들어가? 다른 곳은 어딘데? 여기처럼 고약해?”
“다른 곳은 이런 게 아니라 기괴한 생명체가 소환된 곳이었어.”
“오호라? 자세히 설명해 봐.”
“도박장이었는데 지금은 빈집이야. 생명체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주술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두 번째 스팟으로 가도 되지?”
“뭐가 튀어나올진 예측할 수 없는데, 괜찮나?”
“당연하지! 테네브. 우리 못 믿어?”
“그럼 부탁한다.”
테네브는 놈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 도박장 위치를 표시해 주었고, 저들끼리 귓속말을 나누더니 인사도 없이 쌩 가버린다. 눈에 안 보이니 속 시원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저놈들이 가는 곳에 뭐가 있으면 어쩌지? 배 아플 것 같은데.”
“두 번째 스팟엔 뭐가 크게 없을 거야. 그 생명체는 진작 증발해버렸고, 건물 구조는 페로가 갇혀있던 곳 까지가 전부인 것 같았거든.”
“너 오감이 잘 발달했나 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도박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소리만으로 수를 파악했잖아. 그거 보고 무슨 동물 같더라. 건물의 구조까지 살피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동물적 감각이 발달했다고 해야 하나?”
“습관이 돼서 그래. 대단한 일은 아니야.”
“대단한 거 맞아.”
겸손하게 칭찬을 마다하는 그에게 못 박았다. 그리고 그가 했던 행동이 의아해서 물었다.
“근데 왜 내 앞을 가로막았어? 그 자식들한테 한마디 하려고 했단 말이야. 재수 없는 놈들….”
“기사단원들이 이유 없이 조롱하는걸… 직접 보니 화나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내가 녀석들을 어떻게 해버리기 전에 보낸 거야.”
“흥…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직접 패버렸을 텐데.”
“그러면 좀 더 속 시원했겠지? 미안하다.”
“아니… 뭐… 안 해도 상관없고.”
늘 온화하고 화날 것 하나 없는 리헤로스는 오히려 내 일 같이 분노해 준다면, 평소 몸부터 나가는 테네브는 화내지 않고 좋게 좋게 정리하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명쾌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각자의 성향이 뚜렷했다.
‘그러고 보니 나… 자꾸 테네브랑 리헤로스랑 비교하고 있지 않나.’
둘을 비교하고 평가 내릴 처지도 아닌데, 내 꼴이 퍽 어이없었다.
“밖에 있으려면 있어. 나 혼자 다녀와도 괜찮으니까.”
“아? 아니야. 같이 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 테네브는 벌써 문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열어둔 문을 통해 악취가 점점 빠져나가니 처음에 비해선 버틸 만했다.
“마법진은 아까 확인했어. 도박장에서 봤던 거랑 같은 모양이야.”
“그렇군. 같은 주술, 같은 집단인 게 확실해.”
“응. 아, 아까 찾은 단서도 볼까?”
허리 주머니에서 타다만 책을 꺼내 보았다. 테네브는 발걸음을 돌려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책을 들여다본다.
‘리헤로스가 아니어서 그런가. 아이템 상세 정보는 안 뜨네.’
책등에 가까운 부분만 남아 있어 넘기기 어려웠다. 조금이나마 보이는 작은 글씨를 한 자 한 자 짚으며 읽으니 주술식에 대한 내용이 잘려져 있었고, 주문이 쓰여 있는 부분도 있었다.
“흐음… 주술 설명서 같은 거였을까? 어떤 조직인지, 어떤 이유인지는 알기 어렵네.”
“아쉽게도 그렇군.”
“그럼 이건 내가 그대로 가져가서 잘 아는 고위 마법사한테 물어볼게. 우리끼리 머리 맞대고 있는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것 없을 것 같아.”
“그래. 그게 낫겠다. 다른 걸 찾아보자.”
제아무리 증거 인멸에 힘을 썼다고 해도 완전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생각을 토대로 꼼꼼히 뒤적이기 시작했다. 서랍이며, 옷장 아래, 침구의 안쪽까지 손을 집어넣어 휘적였다. 그럴 때마다 먼지가 나풀거려 코끝을 간질였다.
“엣취!”
“정말 없는 걸까….”
“크응… 바닥에 먼지가 쌓인 걸 보면… 바닥에 뭔갈 두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 마법진도 천장에 그려져 있었지.”
“천장…… 천장?”
불현듯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물건의 아래쪽에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책상의 서랍장을 빼내고, 손바닥을 위로하여 서랍장 안쪽을 더듬었다.
“테네브!”
“찾았어?”
“여기, 여기 안쪽에 뭔가 붙어있어!”
테네브는 달려와서는 책상의 위 판을 잡아 들어냈다. 일반적으로 책상은 아래 판과 위 판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화장대 열리듯이 위로 열렸다. 그 안쪽 판에 붙어있던 것은─
“지도다!”
“잘했어! 아크리스!”
아주 작은 단서임에도 마음만은 결정적인 단서를 얻은 것처럼 벅차올랐다. 테네브는 자연스레 손바닥을 들었고, 나는 신나는 마음에 그의 손바닥에 강하게 맞부딪혔다.
“전국 지도는 아니네, 이 근방만 표시되어 있어.”
“확실한 건 주술이 벌어지는 곳의 위치 같아. 여기 우리가 있는 곳도 표시된 거 보니까.”
“본채에서 실패하고 창고에서 주술을 시도했었으니, 지정된 위치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 같긴 한데….”
“봐, 여기 도박장 위치도 있어.”
“그럼… 도박장을 제외하고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도박장은 현재 위치에서부터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우리가 얘기하고 있던 지점은 남서쪽이었다.
“여기에 바로 가보는 게 좋겠지?”
“예상대로라면 저기에서도 무언가 벌어지고 있거나 단서가 존재할 거야. 가보자.”
오두막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로가 어깨에 날아와 앉았다. 곧바로 테네브와 나는 발맞춰 뛰기 시작했다.
‘나는 모험하는 쪽을 더 좋아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리헤로스와 떠돌아다녔을 때, 던전을 공략했을 때도 귀찮긴커녕 성공했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강하게 느껴졌었다. 현실에서 아무도 깨지 못했던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것은 플레이어로선 이보다 더한 쾌감을 부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쉬지 않고 달린 끝에 역시나 마을과 동떨어져 있는 건물 하나가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통나무로 지어진 평범한 나무 오두막들이었으면, 이곳은 벽돌로 지어진 조금은 규모가 있는 중형 집이었다.
“테네브, 굴뚝 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네… 안에 사람이 있나 본데.”
“조심히 들어가 보자. 페로, 너는 밖에서 망을 봐.”
“알겠어요!”
문에 가까이 붙어 귀를 기울이던 테네브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어떤 전투태세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렇게 들어가도 괜찮아?”
“인기척이 없어. 벽난로만 지피고 자리를 비운 것 같아.”
“그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도 있겠네. 경계 풀지 마.”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우리는 굳어버렸다. 사람이 있거나, 어떤 마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거실의 정 중앙에 있는 검고 기묘한 장식물 때문이었다.
“마의 징조야.”
“그게 뭔데?”
“책에서 봤어. 아주 오래전, 세상에 최초로 마왕이 강림할 때 저런 것들이 도시 곳곳에 퍼졌었다고 적혀있었지.”
“그럼… 마족과 연관 있는 게 확실하네?”
“그런 셈이지.”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마족이 전멸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평화는 없는 걸까. 실체에 접근하기 시작하니 마음 한편에 부채감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징조가 마왕의 강림할 때 발견된 거라니, 설마 나와 연관은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의 난 아무것도 못 하는 조무래기인데.’
장식물을 살피기 위해 손을 올리고 있었는데, 생각에 잠겨있던 중 무심코 뾰족하게 솟아있는 부분을 스쳐 지나갔다.
“아…!”
“아크리스? 괜찮아?”
“스읍… 이 정도야 뭐. 살짝 베인 거야.”
“봐봐.”
“괜찮아. 이렇게 잡고 있으면 지혈돼.”
피가 조금 흘렀지만, 금방 아물 가벼운 상처였으니 괜찮았다. 장식물을 지나 돌아가니 바닥에 큰 마법진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도 마법진이 있어.”
“아직 주술을 시작하진 않은 것 같은데? 제물도 없고, 그린 지 오래 지나지 않은 것 같아 보여.”
“그래?”
깔끔하게 그려진 마법진 위에 손을 대어 온기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베인 상처로부터 피가 약간 빨려 들어갔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사그라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벽에 그려져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마법진들이 떠올랐다.
“뭐야?!”
작은 마법진이 빼곡히 그려져 있는 모든 벽면이 일그러지더니. 쥐의 머리를 한 흉측한 생물들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