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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72화 (72/127)

72화

─촤아아아악!

“욱…!”

테네브를 덮친 것은 다름 아닌 검고 탁한 오물이었다. 무언가 융해된 상태로 천장에 고여있던 모양이다.

“히이이! 테네브니임! 웁!”

“으엑…! 냄새!”

“…….”

“우으욱… 켁….”

어느새 잠에서 깬 페로와 나는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엉거주춤 서 있는 테네브도 악취를 참기 힘든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테네브, 이쪽으로 나와!”

“그래….”

“우에엑…!”

“사람 보고 헛구역질 좀 그만하면 안 되나? 정작 토하고 싶은 건 난데.”

“근데 진짜 역겹단 말이야… 못 참는 게 아니라 안 참아지는 우욱….”

“하아아… 이대론 못 움직이겠어. 어디 씻을 곳 없나.”

“기다려, 내가 찾아볼게.”

“같이 가.”

“아니야 너는 여기 있어.”

“안 돼.”

“그럼… 조금 떨어져서 걸어.”

“…….”

“솔직히 좀…… 그렇잖아.”

“그래…. 이해한다.”

또 그 표정이다. 팔자 눈썹으로 구겨진 불쌍한 표정.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다지 굴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갯벌에서 각개전투를 마치고 나온 승전 군의 늠름한 자태로 보이기도 했다.

온갖 방을 벌컥벌컥 열어댔지만, 도시와 떨어진 오지여서 그런지 오두막에는 수도시설이 없었다. 확인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실외로 나왔다. 그런데도 악취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미친! 이딴 냄새가 다 있어!”

“우리가 들어갔을 땐 냄새가 용케 새어 나오지 않았군! 이렇게나 지독한데!”

“내 말이!”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 소리 지르며 대화를 나누었다. 마구간 앞에 있는 우물에 두레박을 떨어트려 봤으나, 제일 밑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물이 말랐어! 기다려봐! 어디에 물이 고인 곳이 있을 거야!”

“그래! 알겠어!”

“분명 근처에 식수로 쓸만한 물이 있을 거야.”

그 말을 남기고 머지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 중간 크기의 샘을 찾았다. 주거 공간에서 물을 수급할 수 있는 곳이 멀지 않은 건 역시나 과학이었다.

“테네브! 이쪽!”

“찾았나!”

점성 높은 액체를 뚝뚝 떨어트리며 힘차게 걸어오더니 그대로 샘에 몸을 던졌다.

─풍덩

테네브가 들어간 곳을 중심으로 물결이 출렁출렁 파도치는데 검은 것이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한참을 잠수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냄새가 스미기 전에 구석구석 씻어내고 있겠지.

“페로, 여기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테네브가 위험하면 바로 불러줘. 나는 오두막에 다녀올게.”

“헤엑! 알겠어요!”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깍 틀어막고 오두막 안으로 되돌아갔다. 여전히 고약한 악취가 진동했지만, 그가 없을 때 마족으로서 할 수 있는 단서를 찾는 게 중요했다.

도착한 오두막의 상태는 처참했다. 천장이 일부 무너지긴 했어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형태는 남아 있었다. 오물 안에 뒤엉켜 있는 나무 조각을 들어 천장에 대보았다.

‘마법진은 똑같아.’

각이 큰 팔각별을 둘러싼 여섯 개의 원, 그 안에는 특수 언어가 아닌 어떤 상징적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별자리 문양은 아니지만, 그와 엇비슷하게 생겼달까. 그러나 이 마법진은 붉은색의 염료로 엑스 자로 길게 그어져 있는 걸 보니 주술에 실패한 모양이다.

‘그래서 새로운 공간인 마구간에서 테네브를 재물 삼아 새로 주술식을 했던 건가.”

나무 조각을 내려놓고 도움이 될만한 문서가 남아 있을지 방 곳곳을 수색했다. 오두막은 삭막할 정도로 물건이 없었다.

‘증거가 없다기보다는 치운 거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다.’

작은 단체 같아 보여 증거를 흘리고 다닐 것이라 추측했건만 생각보다 치밀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소각이었다. 보통 추리 소설이나 게임, 혹은 만화에서도 불에 타다만 실낱같은 증거를 토대로 범인 추적 범위를 좁혀나가지 않던가. 때마침 구석에 작은 벽난로가 눈에 띄었다.

“이야, 너무 뻔해서 민망할 정도네.”

그 안에는 타다만 책 한 권이 있었는데, 절반 정도는 잿가루가 되어 부스스 떨어졌다. 그래도 타지 않고 남은 영역만으로 대충 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 외에는 특별히 단서랄 게 없어 샘으로 돌아갔다.

“테네브! 단서를 하나 찾았어.”

돌아서 있는 테네브는 머리끝까지 푹 담갔다가 머리를 뒤로 한껏 쓸어넘기며 수면 밖으로 고갤 내민다. 평소 답답할 정도로 앞머리를 내리고 있는 걸 고수하던 그가 처음으로 이마를 선보인 순간이었다.

“후유, 단서가 남아 있었나? 잘했어.”

“…….”

“멀뚱히 서서 왜 그러지?”

“너 머리 넘기고 다녀라.”

“그건 왜?”

“기사들은 앞머리 있으면 움직일 때 불편하지 않아?”

“전혀, 불편한 거 없어.”

“그럼 그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면?”

그는 잔잔한 물결이 퍼지는 수면 위를 내려다본다. 고개를 떨구니 물에 젖은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떨어져 의도적으로 잔머리 연출을 한 것 같았다.

‘잠깐, 옷은 언제 벗고 있었대.’

잠깐 다녀온 사이에 상의를 탈의했던 모양이다. 두툼한 몸통에 잔 흉터들이 많았다. 물줄기는 근육의 음각대로 타고 흐르며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대답이 없는 동안 세세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테네브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 어때? 네가 봐도 그렇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물결이 흔들려서 제대로 못 본 거 아니야? 잠잠해질 때 잘 봐봐.”

“모르겠어. 이런 머리는 공식 석상에서나 하지, 평소에는 할 시간이 없어.”

“나 참. 인기남으로 향하는 꿀 같은 조언을 해줘도 안 듣네.”

오물을 모두 씻어낸 테네브는 느릿느릿 뭍 쪽으로 걸어왔다. 멋쩍어진 나는 아까 획득한 단서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몸에 걸치고 있던 로브와 허리 가방을 풀러 내려놓고 있었다.

─부스럭

“누구냐!”

“뭐지?”

덤불 사이에서 하얗고 긴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점점 모습을 보인 것은 토끼같이 생긴 생명체였다. 다만 현실에서의 토끼에 비해 몸집이 중형견 정도 된다는 점이 달랐다.

“깜짝 놀랐네.”

“야생동물인 것 같은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테네브는 물속에서 누그러진 얼굴로 토끼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는 코를 킁킁대더니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혹여 놀라 도망칠까 우리는 가만히 멈춰 선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슥, 스윽

토끼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테네브가 벗어둔 옷가지 쪽으로 향하더니 옷자락 끝을 우물댄다.

“먹으면 지지야.”

테네브의 옷이 걸레짝이 되기 전에 끌어당기려 손을 뻗었는데.

─푸다다닥

옷을 물고 덤불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넋이 나간 상태로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옷! 어떡해!”

“크윽… 저 귀여운 얼굴로 옷 도둑이었다니….”

“그러게, 옷은 왜 벗고 난리야. 그냥 입고 씻지.”

“냄새가 빠지도록 씻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내 탓은 아니지.”

그는 체념한 듯 천천히 물 밖으로 나오는데 가슴 밑부터 점점 드러나는 살색의 향연에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너! 너 그럼, 지금 위고 아래고 나체야?! 미쳤어? 멈춰! 다시 들어가!”

“그게 무슨 소리야. 바지는 안 벗었어.”

“아, 아아…?”

“뭘 생각하는 거지? 아까도 내 몸을 느끼하게 훑어보더니만.”

“무, 무 무무무뭇…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네 몸을 훑어봤다고?! 증거 있어?!”

그는 물기를 닦지 않아 여전히 축축한 상태로 내 앞에 바짝 다가와 선다. 준비되지 않은 내 앞에 다가온 살색은 여러모로 자극적이었다.

“이러고 있으면 그 느끼한 눈빛이 나오겠지.”

“으익! 저리 갓!”

밀치려고 손을 뻗었지만, 어디를 짚어야 할지 몰라 손은 허공을 휘적휘적 떠돌기만 했다. 그래서 고개를 떨궜다가 들었다가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냥 아예 뒤를 돌아버렸다. 이 장소엔 우리 둘만 있을 줄 알았건만, 생소한 그림자가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붉은 휘장을 두른 제복의 사내 둘이었다.

“글라디우스 기사단?”

“…….”

“어이! 테네브!”

“저 자식 왜 훌러덩 벗고 있대? 웃기네.”

“어?! 어어어?! 너는! 용사의 정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선 또 불쾌한 호칭이 튀어나왔다. 내가 화를 내기도 전에 테네브가 그 말을 지껄인 놈에게 척척 걸어가더니 가슴팍을 툭 친다. 가볍게 친 것처럼 보였는데도 맞은 녀석은 컥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을 부여잡는다.

“말조심해.”

“아, 알았어…. 저 자랑 여기에서 뭐 하고 있던 거야?”

“그런 게 있어.”

“저놈과 설마 그러고 그런 사이….”

“…….”

“─는 아닐 테고.”

테네브의 눈치를 보는 듯 말을 고쳤지만, 기분 나쁘게 실실거리고 있었다. 내가 나서봤자 폐만 끼칠 것 같아 가만히 있긴 하다만, 속은 불이다 못해 용암이 끓어대는 것 같았다.

‘하아아… 쥐어 패고 싶다….’

분을 꾹꾹 눌러 담으며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내 속도 모르고 기사단 놈들은 테네브에게 협박에 가까운 말을 뱉기 시작했다.

“테네브 델 드렉티오. 제대로 말 안 해?”

“…….”

“글라디우스 기사단의 철칙 중 하나. ‘보고’ 알고 있지? 개인행동하는 것도 칼리고 단장님이 넓은 아량으로 봐준 건데 이러면 곤란하지.”

“맞아. 네가 카푸멘님의 제자라고 해서 무섭지도 않거니와 예외 사항을 봐주진 않아.”

“하아….”

“말을 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단장님께 ‘보고’하는 수밖에.”

“어느 종교집단을 찾고 있어.”

“종교?”

“그래. 마족을 추앙하는 집단 같아서 그 규모가 커져 위협되기 전에 찾으려고 한다. 아크리스는 마법 실력이 뛰어나서 자문을 얻기 위해 동행하는 거고.”

그는 나를 달고 다니는 이유를 적당히 지어냈다. 마왕의 직함을 달고 있을 때야 저 말이 어울렸지만, 지금은 포탈을 포함해 스킬을 세 개뿐이 못 쓰는 초보 마법사여서 양심에 찔렸다.

“호오… 그래?”

“어이 테네브, 그런 일이 있으면 얘기하지 그랬어. 혼자 공을 쌓을 셈이야? 쪼끔 치사한데?”

“그러게. 그런 게 있으면 우리도 불러주지. 도와줄 수 있는데.”

“이렇게 된 거 우리도 같이 가지 뭐. 어때. 괜찮지?”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테네브는 불편해 보였지만, 끝내 동행을 수락한다.

‘진심이야?’

검고 거대한 물체가 천장에서 떨어지더니 바로 아래에 있는 테네브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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