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용사님 사인해 주세요!” "그래. 이름이 뭐야?”
전쟁이 끝났음을 공표한 이후, 리헤로스와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길을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한걸음 디딜 때마다 사람들이 리헤로스에게 말을 걸어오고, 악수와 포옹을 청하기 일쑤였다. 나는 그 옆에서 멀뚱히 바라보는 역할이었다.
‘평화롭네.’
오래전, 용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손길과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그때 리헤로스가 나를 죽이겠다고 다짐했을 때만 해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건만 목숨을 부지하게 될 줄 몰랐다. 현실과 다를 것 없이 한 치 앞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었다.
누구도 서운하지 않게 반응해 주고 나서야 겨우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멀끔했던 그의 차림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괜찮아? 저 정도는 거절해도 될 것 같은데.”
“수도로 귀환한 이후부터 이렇게 지내와서 이제는 익숙해.”
“이야… 여태껏 이러고 다녔다고? 안 피곤해?”
“피곤하지는 않아. 대단한 일도 아닌걸.”
“오호, 주목받는 걸 즐기는 편?”
“아, 아니야.”
“아니긴? 완전히 즐기고 있구만.”
만인에게 사랑받는 용사님. 그에게 어울리는 타이틀이었다.
구겨진 그의 옷깃을 매만져 주었다. 그런데 흐트러졌다고 할지언정 너무 흐트러져 있어 무엇 때문인지 틀린 그림 찾기 하듯 찾았다.
“너 가슴이….”
“응?!”
“단추 하나가 없어진 것 같은데.”
“아! 세상에.”
하도 많은 사람과 부딪히다 보니 셔츠 단추가 떨어진 것도 몰랐나 보다.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단단한 윗가슴 근육이 보였다. 몇 번이고 저 위로 부딪혔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했다. 내 시선이 그의 가슴팍에 오래 머물자 우물쭈물 윗단추를 잠근다.
“이렇게라도 잠글까?”
“아니. 엄청 이상해.”
셔츠의 중간 부분이 벌어져 있어 속살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엄한 상상이 펼쳐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뭐 어때. 웃통 까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가?”
“무엇보다 사람들은 팬 서비스라고 생각할 거야.”
“아…….”
“어! 얼굴 빨개졌대요.”
리헤로스는 붉어진 뺨 위에 손등을 대고선 시선을 피한다. 스물 후반의 사내가 이리도 풋풋한 청소년 같은 얼굴을 할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귀여운 짓 하네.’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어디든 가서 이 표정을 보여주면 세상 사람 모두 다 홀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는…?”
“어? 뭐라고?”
“너는… 이런 거 좋아해?”
“…….”
순간 ‘이런’게 무언가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의 벌어진 앞섶에 다시 눈이 갔다. 내적 비명을 꽥 질렀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인가. 나한테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던 것 같아 시선을 홱 돌려버렸다.
“허… 허, 참나! 아, 안 좋아하거든?”
“진짜?”
“그래!!”
여전히 그를 보지 않은 채 씩씩대며 앞장서 나갔다. 그가 미안하다며 같이 가자고 뒤에서 소리를 높여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가구 단지로 직행했다.
리헤로스의 특유의 넓은 보폭으로 인해 따라잡히고, 그가 시야 안에 들어오면 미칠 것 같았다. 한번 뇌리에 꽂힌 말은 계속 신경 쓰이기 시작해 계속해서 봐선 안 될 곳으로 시선이 자석 붙은 듯 따라가기에 십상이었다. 이래서는 시선 추행으로 징역살이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익…!”
허공으로 시선을 꾸역꾸역 옮기고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듯 움직였다. 그러다가 울퉁불퉁한 지면에 발 앞 코가 걸려 휘청였다.
‘아 젠장! 망할 균형감각!’
저주받은 균형감각이 한참 동안 잠잠하더니 또 재발한 모양이다. 심지어 속도까지 더해져 얼굴이 납작해지는 것은 예견된 미래였다.
─쩍
“어이쿠 세상에. 청년들 피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옆에서 작업하던 목수들이 통나무를 자르던 중 한쪽이 길가로 기울어 넘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납작 만두 각이네.’
괜히 버둥거렸다간 더 심하게 다질 것 같아서 운명을 받아들이고 넘어지려 했는데.
“크리스! 위험해!”
“으앗?!”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리헤로스가 그 찰나에 나를 안고 굴렀다. 워낙에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리헤로스였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둘 다 쥐포가 됐을 것이다.
“아이고 청년들, 미안해. 다친 덴 없지?”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너…! 무모하게…!”
또 무리해서 나를 구하려 하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네 목숨을 가장 소중히 여기라고 했건만 이 고집불통은 들어먹을 생각을 안 한다.
그런데, 다음 단어를 채 꺼내기도 전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가구 자재가 내 머리를 찧는 것보다도 바로 눈앞에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그의 활짝 열린 셔츠였다.
‘사람 살려.’
격렬하게 구르다 보니 단추가 두 개 정도 더 떨어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니 몸은 딱딱하게 굳었고, 눈을 감아버리자니 꼴이 퍽 우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눈을 데록 굴리는 것으로 내 신체 반응과 합의했다. 기껏해야 시선을 돌린다는 게 그의 얼굴 쪽이었는데, 리헤로스도 꽤 놀란 모양인지 뺨을 지나 턱 선을 따라 땀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잡지 남성 화장품 광고면에서 볼법한 뇌쇄적인 느낌이었다.
“크리스, 괜찮아?”
“나야 뭐….”
“휴우, 앞을 잘 보고 걸어야지.”
“앞 잘 보고 걷는 거거든? 발이 걸린 것뿐이야.”
“하늘만 올려다보지 길 안 보던데, 거기에다가… 나도 안 보고.”
불퉁했던 나는 이어진 말에 열이 올랐다. 화나서인지, 노골적으로 안 보고 있었다는 걸 지적한 부분에서 민망함을 느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울컥해서 우다다 짜증 부리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목 끝에 거름망이라도 생긴 것처럼 꽉 막혀 나가지 못했다. 입만 달싹거리다가 겨우 한 문장을 내뱉었다.
“너… 너를 왜 봐! 넌 안 봐도 상관없잖아?!”
“하하하.”
그는 농담을 치고서 넉살 좋게 웃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져 금세 평소와 같이 편안해졌다. 위험으로부터의 경계, 동물적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가구를 고르는 것으로 하루를 꽉 채우며 보냈다.
***
다음 날, 하루 빠진 만큼 일을 더 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찌감치 녹틸의 저택에 방문했다. 여유로워 보이던 녹틸은 퀭한 얼굴로 나를 맞이해줬다.
“왔어요?”
“너… 너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왜 그러냐니. 실례에요. 하아… 지금 쓰는 부분이 영 안 풀려서 그래요. 금방 생각나겠죠.”
“아는 거 그냥 쭉 적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뭘 모르시네요. 아크리스는 나중에라도 책 쓸 생각 마세요.”
“열받네.”
녹틸의 손짓으로 찻잔이 내 앞에 놓였고, 따스한 구름을 그리는 찻물이 채워졌다. 한 모금 들이켜니 온몸에 들러붙은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가신다. 나른해진 몸은 무방비하게 여러
“녹틸, 테네브라는 사람 알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정말?”
“생각해 보니 모르네요.”
“그럴 줄 알았다.”
“왜요? 저한테 물은 거 보면 기사단 사람인가 보네요.”
“응, 실력도 괜찮고 외모도 꽤 준수해서 유명할 줄 알았거든. 눈에 띄는 미남인데, 정말 몰라?”
“…아크리스, 은근히 얼굴 밝히네요.”
“뭇, 뭐?!”
“아니다. 대놓고 밝히나?”
“아니거든?”
“사람 묘사하는 거 보면 얼굴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서요. 잘생기면 다 좋아할 것 같아요.”
“아니거든. 따지자면 칼리고 쪽도 취향인데,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봐.”
“세상에. 이거 리헤로스에게 말해도 되나요?”
“그러던가. 딱히 비밀도 아닌데.”
“얼굴에 너무 진심이라 무섭네요. 근데 이해는 돼요. 칼리고 얼굴이면 아깝긴 하죠.”
“객관적으로는 잘 생겼으니까.”
“그러는 테네브라는 사람은 얼마나 잘 생겼기에 묻는지 궁금하네요. 다음에 데려와 보세요.”
“싫어 인마. 그러려고 물어본 거 아니거든? 그 녀석이 나와 리헤로스에 대한 소문만 듣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는데,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니까 말이 통하는 것 같더라고.”
“글라디우스에 아직 그런 사람이 남아있긴 하군요?”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칼리고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물어봤지.”
“흐음, 잘은 모르겠지만, 뭐라도 알게 되면 전해줄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얼굴도 보는 겸- 말이죠.”
“네가 더 밝히네!”
녹틸은 쿡쿡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뭐 했어요? 갑자기 아크리스가 일을 빼서… 괘씸하더라고요. 자를까 싶었어요.”
“봐줘…. 리헤로스랑 가구 사러 돌아다니느라 그랬어.”
“새집에 들어갈 가구인 거죠? 잘했네요.”
“응. 말 나온 김에 빨리 해치우는 게 좋으니까.”
“흐음, 리헤로스 취향은 참나무일 것 같은데 맞나요?”
“어떻게 알았어?”
“참나무는 뭐니 뭐니 해도 클래식이죠. 리헤로스는 정석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고요.”
“아는 척은.”
하긴, 리헤로스가 대리석이나 유리공예가 들어간 사치품을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추측하기 쉬운데 어떤 면에서는 예측 불가의 남성이었다.
“그럼 이제 쭉 리헤로스와 그 집에서 살겠네요?”
“리헤로스는 모르겠고 나는 그럴 거야.”
“왜 그는 몰라요? 쫓아낼 계획은 아니죠?”
“으음… 사실 리헤로스가 곧 공주님과 약혼할 것 같거든.”
“뭐라고요?!”
녹틸은 찻잔을 세차게 내려놓았고, 벌떡 일어나자 길고 무거운 테이블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있었는데 그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뜨거운 찻물이 입술 위로 왈칵 쏟아져 나까지 정신이 없어졌다.
“아오. 씨, 깜짝아! 왜 소리를 질러?!”
“제가 안 지르게 생겼어요?”
“그렇게 놀랄 일이야? 용사가 공주랑 결혼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게… 사실이에요? 리헤로스가 왜 저에겐 얘기하지 않은 거죠?”
“그거야 나도 소문으로 들었으니까.”
“뭐야. 소문이었어요?”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바보야. 소문이 괜히 흘러들어오겠어? 실체가 있으니 소문이 생기는 법이야.”
“그럼 테네브가 소문만 듣고 아크리스를 오해한 것도 실체가 있어서 그런 거겠네요?”
“…….”
“아크리스, 소문을 너무 믿지 말아요. 특히나 리헤로스가 직접 말한 게 아니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