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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69화 (69/127)

69화

─끼이익

“나… 왔어.”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해가 넘어간 지는 오래였고 새벽에 가까운 깊은 밤이 되어 리헤로스는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삐걱

창가 쪽에서 마룻바닥이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을 깨고 거대한 인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깜짝아! 리헤로스!”

“…….”

“아, 아직 안 잤어…?”

“…….”

“내가 깨운 건가…?”

“…….”

“왜 그래? 무, 무섭게 대답을 안 해?!”

“오늘 어디 갔었어?”

“어디 갔긴 그냥…….”

대답이 늦어지면 숨통을 조여오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온 신경이 내 대답에 집중한 것 같았다.

“그냥 어디 좀 다녀왔지!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귀가 시간 가지고 눈치 줄 거야? 어?! 통금이라도 걸 거냐고.”

“통금 얘기가 아니야. 오늘… 나랑 했던 약속은 잊어버린 거야?”

“약속이라니? 무슨……… 아!”

“빨리 오지 못한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창밖을 주시했다. 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던 밤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차가운 빛을 띠고 있었다.

“많이 늦었네.”

“아… 아아…….”

그와 몇 달 넘게 함께 지냈지만 이리 서운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평소 같으면 버럭 화내고 그깟 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내일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였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게 되면 그가 정말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가 이해할 만한 사유를 제시하는 게 우선이었다.

“운 좋게… 페로를 찾게 됐거든.”

“네가 말했던 친구?”

“응.”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건만 얼굴은 더욱 부루퉁해졌다. 그런데 축 처진 그의 모습은 내면의 더러운 욕망을 자극하는 데에 충분했다. 긴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고 팔자로 내려간 눈썹, 늘 미소가 머금어져 있는 입꼬리 또한 내려가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 떨구어진 느낌이었는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굉장히 치졸해 보일만치 삐져있는 상태였다. 어쩜 저런 표정을 지어도 밉상이 아닐 수 있을까.

‘얼굴에 감탄할 때냐.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마음은 그리 먹었으나, 생각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기 쉽지 않았다. 자존심의 관문 앞에 서 있는 문지기의 질문을 논파해야 했고 그 벽은 매우 높았다. 그리하여 사과 대신 몸을 움직여 행동을 시작했다.

“얘가 페로야!”

품에 안겨있는 작은 박쥐를 보자 리헤로스의 미간이 풀렸다.

“사람이… 아니었어?”

리헤로스도 작고 귀여운 포유류를 좋아하니 페로도 좋아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는데 역시나 먹혔다.

“응. 박쥐야. 귀엽지.”

“사람이 아니었구나….”

“다행히도 걱정한 게 무색하게 찾았지! 녀석이 갇혀 있던 걸 구해주느라 늦은 거야.”

“구해줬다고? 대체 어디에 갇혀 있었길래?”

“아니 글쎄 불법 도박장에 있었지 뭐야.”

“뭐? 너 혼자 그렇게 위험한 곳에 갔어?”

혼자 간 건 아닌데, 왠지 테네브의 존재를 이야기하기엔 껄끄러웠다. 리헤로스도 현재 글라디우스 기사단과 별로 관계성이 좋지 않으니 말해봐야 도로 심란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됐지. 녹틸이 준 도구를 이용해서 찾았어.”

“그럴 거면 같이 가지. 위험하게.”

“내가 누구였는지 잊었어? 그 정돈 식은 죽 먹기 거든?”

“그래도 무모해.”

그는 나를 혼내듯 다그쳤다. 하긴 테네브가 없었으면 고전했을지도 모른다. 정체불명의 주문과 생명체, 파괴력 높은 힘의 인간들. 곱씹어 봐도 테네브를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뭐, 간 김에 도박장 토벌도 하고 일석이조였어.”

“그래… 그랬구나. 착한 일 했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으응. 놀란 거 말고는 다행히도 별 탈 없더라고.”

“크리스 너 말이야.”

“아? 나야 당연히 멀쩡하지. 흠집 하나 안 내고 왔어.”

못 믿겠다는 듯 리헤로스는 내 팔을 잡아 이리저리 뒤집듯 살폈는데, 다시금 한쪽 눈썹이 구겨졌다. 같이 기뻐해 줄 줄 알았는데 표정은 여전히 심란해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리 못 믿겠다는 표정일까. 역시 사과를 해야겠지. 약해지는 마음을 붙잡고 사과를 하기 위한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오늘 종일… 기다렸어?”

“…….”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했는데….”

“그건 아니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네가 이렇게 기운이 없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런 게 아니라면 오늘 뭐 하고 지냈는지 얘기 좀 해봐. 안 좋은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잠깐 공주님을 뵙고 왔어.”

“아.”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사과를 뱉기보다 힘든 대화 주제였다. 무게에 못 이겨 가라앉은 말을 힘겹게 힘겹게 감정의 뭍 위로 건져 올렸다.

“아…하하, 그러고 보니 공주님은 어떤 분이셔? 연회에서도 못 뵈었는데, 그렇게 얼굴 뵙기 힘든 분이랑 저녁 식사한 거야? 이야 용사님 출세했네!”

“…….”

“연회하니까 생각난다. 저번에 먹었던 핑거푸드 엄청 맛있었는데.”

공주라는 말에 말이 뚝 끊기면 오해받기에 십상이니 내 쪽에서 쉴 새 없이 주절댔다. 그럴수록 실내의 공기는 점점 우울해지는 것만 같았다.

“공주님은 분명 좋은 분이시겠지.”

“…….”

“……상냥하고 아름답고.”

“공주님은-”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의 입술이 떨어지려 했다. 그 구설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말을 가로챘다.

“분명 그러겠지! 암.”

“크리스….”

“리헤로스, 이렇게 하자. 오늘 약속 못 지켰으니까 내일은 녹틸한테 말하고 통째로 시간 낼게.”

“그래도 돼?”

“어차피 급한 일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더라고, 페로도 구출했고 이제… 특별히 신경 쓸 일 없을 거야. 그러니 말 나온 김에 내일 가는 거지.”

“그래. 너만 좋으면 그러자.”

“좋아, 진짜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가 당연하게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이런 모습은 내가 알던 리헤로스라서 마음 한편이 안심되게 했다.

오늘 그의 우울한 모습은 꽤 색다르고 다른 면에서는 흥분케 했지만, 그 이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더욱이 상처 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 하아아- 얼른 새집 가고 싶다.”

“나도 그래. 내 공간이 생긴다는 건 큰 안정감을 주니까.”

“리헤로스, 너도 그동안 많이 불편했어?”

“아무래도 장기 투숙이라고 해도 언제 옮길지 모르니 필요한 물건을 사두지 못하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

“그렇긴 하지. 뭘 그렇게 사두고 싶었는데?”

“책을 읽고 싶어서.”

“오 무슨 책?”

“그냥 아무거나. 어떤 장르든 안 가리고 다 읽어.”

“로맨스 소설도?”

“재밌으면 읽어.”

“오오. 의왼데? 철학이나 군사학 읽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쪽이랑은 거리가 멀어.”

“얼마나 거리가 먼지 궁금해. 다음에 퀴즈 내볼래. 맞춰봐.”

“엄청 많이 틀릴 것 같은데… 부끄러워.”

“얼마나 많이 틀리는지 일일이 다 세야지. 푸핫! 농담이야.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지어?”

“정말 네 안에서 바보가 되어버릴까 걱정했어.”

“진짜 웃겨.”

대화 중간중간 고비가 있었지만, 잘 마무리한 것 같았다. 초창기에 그와 대화하기 싫다고 회피하고 모질게 말했던 것에 비교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성질이 많이 죽은 건지… 아니면 마음을 자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거짓말한다는 죄책감?”

어느 쪽이든 리헤로스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의 짐이 덜했다. 덕분에 대뜸 화내지 않고 대화하는 인내심도 생겼고, 이래서 사람을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걸까. 여러모로 되먹지 못한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인물이었다.

“하아암.”

“피곤하겠다.”

“으응… 좀 그러네. 그럼 먼저 자러 갈게. 페로도 피곤할 것 같아서.”

“응. 좋은 꿈 꿔. 잘 자.”

“……너도.”

어쩌면 못 들었을지도 모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를 거실에 둔 채 나 홀로 침실에 들어왔다.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페로가 기지개를 켰다.

“으구구국!”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편하게 있지 왜 그리 뻣뻣하게 긴장했어?”

“제가 아니어도 그 대화에는 아무도 끼어들지 못했을 거예요!”

“음,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

“주인님은 용사랑 있어도 괜찮으신 거예요?”

“어떤 의미로?”

“저는 막… 엄청 무서운 맹수 앞에 선 것 같이 몸이 안 움직여지던데요. 용사가 가지고 있는 힘에 짓눌린 기분이라고 할까요?”

“으음… 난 그런 느낌 받은 적 없어.”

“헤엑 정말요?”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무서워서 벌벌 떨었잖아.”

“네에. 엄청 뜨거운 불길로 만들어진 사자가 포효하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고요.”

그렇게 맹탕에다가 착하고 순한 리헤로스가 불로 만들어진 사자라니.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주인님의 신분이 노출되기라도 하면 저 기운이 더 사나워질 것 같아요.”

“용사는 이미 내 정체를 알아.”

“히익?! 정말요? 그, 그런데 어떻게… 설마 인질로 잡혀 계신 거예요?!”

“아니, 리헤로스한테 용서받은 거나 다름없지.”

“흐에….”

“착한 일을 하며 내 업을 씻기로 했어. 너도 그냥 주인님이라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줘.”

“정말요?”

“응, 그냥 아크리스라고 불러.”

“네! 아크리스님!”

“그냥 편하게 말 놓으래도….”

이불 속으로 피곤한 몸을 뉘자 페로는 그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온다. 정말 구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평생에 함께할 가족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배시시 웃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행복한 잠에 빠져들었다.

***

─삐로롱

“주인, 아니지! 아크리스님 뭘 보내신 거예요?”

“내 고용주한테 오늘 일은 빼달라고 연락했지.”

“주인님을 부리는 고용주가 존재한다고요?!”

“또 주인님이라고 한다.”

“아, 아크리스 님이요오.”

“폐위된 마왕인데 놀랄 것도 없지. 나도 이젠 평범한 백성이야.”

실제로 캐릭터 정보에서 직업이 없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저만은 주인님을 따를 거예요!”

“그게 충성심이 아니라 우정이면 좋겠다.”

“우정이요?”

“응. 너 혼자 일방적으로 나를 아끼는 게 아니라 너도 나한테서 많이 받아 가는 그런 관계.”

“이미 많이 주셨는걸요!”

“그니까 그거랑 조금 다른데… 됐다.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우정의 정의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무어라 표현이 어려웠다. 너무 오랜 시간 스며든 리헤로스 때문에 친구끼리 이런 걸 하나? 싶은 적이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크윽, 평범한 친구가 필요해.’

그 생각에 곧바로 테네브가 떠올랐다. 영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편안했다. 그냥 툭툭 내뱉어도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이랄까. 두 번 만나본 감상은 그랬다.

‘정말 같이 조사할 생각이야?’

‘응, 나도 끼워줘.’

‘하아…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그러니까 강한 내가 가야지.’

‘…그럼 나는 장물을 회수하고 그 안에서 추적할 만한 단서를 찾아볼게. 나중에 연락하지.’

‘그래. 꼭 연락해야 한다?’

도박장에서 테네브와의 마지막 대화는 이러했다. 안된다고 튕겨도 연락해 줄 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안 부르면 훈련장으로 쳐들어가면 있겠거니 싶으니 불안한 게 없기도 했다.

그때, 침실 문이 열렸고, 리헤로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녹틸에게 서신 보냈어?”

평상시에 입는 신축성 있는 천 소재의 튜닉과 하의 대신, 빳빳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석적인 데이트 차림이라 할 수 있는 모나X 룩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옷임에도 그의 몸에 걸쳐지니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두꺼운 흉부의 두께감이 적나라하게 보였고, 쇄골 아래 라인까지 푸른 셔츠 하며, 인벤토리용 허리 가방까지 허리에 꽉 조여 맨 상태였다. 가방은 흔들리지 않도록 허벅지 가터에 연결되어 있어서 허벅지의 라인이 도드라져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역시… 평범한 친구가 필요해.’

지금의 리헤로스는… 친구라고 부르기엔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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