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어…?”
짙은 눈썹이 올라가 강한 인상이 기억에 남았던 갈색 머리의 남자. 리헤로스만큼은 아니지만 일반인 사이에 끼어 있으면 눈에 띌만한 뚜렷한 이목구비의 남자였다. 그쪽도 나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는?”
“아! 그때 제물!”
“사람을 가지고 제물이라고 하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이름도 안 알려줬잖아.”
“테네브 델 드렉티오.”
“너무 길다. 테네브라고 부를게.”
“초면에 이름을…!”
“생명의 은인인데 뭐 어때.”
“끄응….”
“그때 다쳤던 곳은 괜찮냐?”
“그 정도 상처는 상처도 아니었어.”
“헤에….”
“뭐, 뭐야 그 표정은?”
상처를 치료해 주던 당시엔 울먹거려놓고 센 척이라니 웃길 따름이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자 테네브는 얇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놓고는 내 눈을 피했다. 그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다가 달각거리는 나침반의 침이 이내 어느 곳을 명확히 가리키기 시작했다. 침의 끝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이 있었네? 저기로 가면 되겠다.”
“뭐?”
“난 이만 가볼게. 또 이상한 사람들에게 붙잡히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
수풀을 해치고 앞을 나아가려는데 테네브가 쫓아오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왜?”
“저기가 어디인 줄 알고 가는 거야?”
“어딘지는 모르는데 누굴 좀 찾으려고.”
그 말만 남기고 그를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팔을 덥석 잡아 다시금 막았다.
“어딘지도 모르는 데 가?”
“너는 알아?”
“그래.”
“그럼, 말을 해봐. 저곳이 대체 뭐길래 그래?”
“…네가 찾는 사람이 저 안에 있다면 내 검으로 베야 할지도 몰라.”
“뭐라고?!”
“난 저곳을 토벌하러 왔어.”
“왜?!”
“그야 뭐가 있을지 모르는 불법 도박장이니까.”
“부, 불법 도박장이라고?”
문장 문장마다 입이 벌어지기만 했다. 어쩐지 산골짜기 깊숙한, 을씨년스러운 곳에 있다 싶었다. 그런데 페로는 왜 도박장에 있는 걸까.
“그래. 그런 곳을 연약해 보이는 너 혼자 들어간다고? 절대 안 돼. 기사도 정신으로 용납하지 못해.”
“약해 보인다니… 진심이야? 내가 널 구해줬던 거 기억 안 나?”
“그땐 오만했어. 혼자 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의 넌 그때의 나랑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니 말리는 거고.”
“내가 안 들어가면 넌 이번에도 혼자 무모하게 들어가는 거잖아”
“그때완 달라.”
“뭐가 다른데?”
“마음가짐이.”
“…….”
역시 바보인 것 같다.
“별반 차이 없을 것 같은데… 뭐 어쨌든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으윽… 멈춰! 한 귀로 흘려듣고 있잖아!”
“말했다시피 찾을 녀석이 있어서 갈 수밖에 없어.”
“안 돼.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이만 돌아가. 범죄자 녀석을 감쌌다간 너 역시 적으로 간주한다.”
“오해하지 마. 내가 찾는 녀석은 도박과 연루될 리 없어.”
“왜지?”
“그야 박쥐니까.”
“박쥐?”
“응. 박쥐가 도박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 네가 먼저 발견하더라도 베진 말아줘.”
“그런 거라면… 난 동물은 해치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다른 놈들은 어쩌든 도륙을 내든 마음대로 해.”
“참 독특한 녀석이군. 박쥐는 발견하면 네게 데려다줄 테니 여기에 있어.”
테네브는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린 채 조심스레 건물로 향했다. 당연히 그 뒤를 따랐다. 테네브는 뒤로 흘끔 돌아보더니 펄쩍 뛴다.
“있으라니까 왜 졸졸 따라와?”
“역시 너 혼자 보내는 건 걱정돼서. 같이 가려고.”
“내 실력을 못 믿는 건가?”
“그건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 내가 도움이 될지도.”
“크윽, 고집불통. 마음대로 해.”
“장담하는데, 없는 것보단 있는 게 의지가 될걸?”
“몰라.”
앓는 소리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던 그는 다시 경계 태세로 돌입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 볼수록 초창기에 리헤로스와 함께 루미를 구출하러 갔던 때가 떠올랐다.
‘리헤로스의 공식적인 임무가 끝났어도 아직 세계엔 무법지대가 많구나.’
주인공이라는 울타리 밖의 NPC들도 매일매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어떤 생활 양식이 게임이고 내가 살았던 현실인지 구분이 어려워질 지경이었다.
“쉿.”
“응?”
“…앞에 다섯, 뒤에 넷.”
소리만으로 건물 내부의 적 수를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짐승도 아니고 귀가 그리 밝은가.
─쾅!
테네브는 나에게 신호 주지 않고 저 혼자 불쑥 박차고 들어간다. 이 정도면 못 이기는 척 동행할 줄 알았건만 정말 혼자 다 해결할 생각인 걸까. 곧바로 쫓아 들어갔다.
“멈춰라! 지금 순순히 투항하면…!”
“웬 놈이냐!”
“죽여라!”
테네브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장내에 앉아 있던 범죄자들은 벌떡 일어나더니 무기를 꺼내 덤벼들었다.
테이블은 엎어지고 잔이 깨지는 소리, 금속의 화폐가 부딪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역시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군.”
─카랑!
테네브도 그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어 보였고 뻗어오는 흉기를 검으로 막아냈다.
그런데 그의 검술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움직임을 자세히 살피고 나니 단 한 사람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저 검술… 칼리고와 똑같아.’
최소한의 동작으로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임의 유연함. 칼리고의 검술에서 보았던 특징이었다. 다만, 칼리고가 가볍고 날렵했다면 테네브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 있었다.
‘같은 기사단이라고 같은 검술을 구사하는 건 아니던데, 테네브는 어째서 칼리고와 같은 거지?’
─쩡!
“이야아악!”
“크으윽!”
나 없이도 잘 싸우는 것 같더라니, 다굴엔 장사 없다고 여럿이 우르르 달려드니 잘 대처하던 테네브도 제법 당황한 것 같았다.
“두고 간 게 괘씸해서 안 도와주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장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에게 달려든 셋 중 하나의 목울대를 찌르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흉기를 떨어트렸다.
허리, 발목을 강하게 내리치고서 무릎을 찍어 내리듯 찌르자 힘없이 무릎을 꿇고 이내 데굴데굴 굴렀다.
그 사이 테네브는 두 사람을 가볍게 상대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급소를 빠르고 깊게 찔렀다. 찔렀다가 빼내는 동작이 워낙에 빨라 그 두꺼운 옷과 피부, 근육을 관통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후두둑
테네브의 검이 지나간 자리는 붉은 실이 공중에 나부끼는 것만 같았다.
‘급소만 정확히 노리는 것도 칼리고와 같아. 가족이라기엔 둘은 너무 안 닮았고.’
게임적 허용으로 스킬 ai가 동일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이 게임이 보여준 디테일을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진 않았다. 테네브와 칼리고, 두 사람의 관계성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죽엇!”
생각에 잠겨 있느라 코앞까지 다가온 적을 못 보고 있었다.
장대로 막아보려 했지만, 검날이 들어오는 방향을 보니 꼼짝없이 배에 구멍이 날 각도였다.
─촤악!
“커컥!”
테네브의 검은 적의 쇄골을 내려찍어 내게 다가오는 걸 저지했고, 적의 몸통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깜짝아…!”
“따라오지 말랬지!”
“나도 너 도와줬거든?”
“흠!”
남은 적들도 마른 나뭇가지에 낙엽을 털어버리듯 가볍게 쓰러트렸다.
나는 장대로 적의 시선을 분산, 교란하고 테네브가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합이 잘 맞았다.
‘리헤로스와 함께 싸울 때만큼 편한데?’
아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뛰어난 검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현재 위치한 방의 마지막 적까지 쓰러트리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아… 꽤 많았군.”
“너, 기사단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지?”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네 검술…….”
기사단장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 말하고 싶었는데, 여유 시간도 주지 않고 안쪽에 이어진 문이 열리더니 적이 쏟아져 나왔다.
“부활의 제물!”
“제물! 제물이다!”
“인모스테-폰 아일람 마몬.”
“아디티오 윰-브라이드 미네테.”
“우세드-스테르 노 레-티리스.”
직전에 적의를 드러내며 무작정 공격해온 무리와 달리, 뒤늦게 나타난 녀석들은 알아듣지 못할 문장을 중얼거리며 각각 무기를 뽑아 들었다.
테네브는 그들이 주문을 더 외지 못하도록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하압!”
“크헤헷!”
─키기기기긱, 쨍!
“크아아아!”
“큿…!”
엇비슷한 능력치의 NPC일 텐데도 어쩐지 이번 페이즈에 등장한 적들과는 힘겹게 대치하고 있었다.
양방향에서 강한 힘이 작용하며 금속을 마찰하니 강한 스파크가 파파팟 튀겼다.
그를 돕기 위해 적의 무릎이 접히는 곳을 장대로 내려쳤는데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되려 장대가 힘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뭐야?!”
“크힛, 크히히힉! 마왕의 제물이 되어라!”
놈들의 눈동자의 흰자위는 검게 물들었고 팔의 근육은 스테로이드라도 맞은 것처럼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보랏빛의 핏줄이 피부 아래에서 불룩불룩 솟아오른 모습이 마물에 가까웠다.
─꾸드드득… 댕!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 놈들은 중검을 휘두르려 하는데 자체의 힘에 못 이겨 무기가 부서지기도 했다.
이때를 노려 부러진 장대의 끝으로 옆구리를 쑤시자 고통에 찬 포효를 질렀다.
─푸콰아아악
익숙한 검붉은 색이 아닌 보랏빛의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다시 몇 번이고 찌르고 나서야 앞으로 몸이 고꾸라졌고, 테네브는 놈의 등줄기에 힘껏 검을 꽂았다.
“게에헥…!”
“몸통 부분이 약해! 그쪽을 노리는 게 좋겠어.”
“이해했어!”
남은 놈들도 비슷한 루틴으로 공격하자 다행히도 대응할 수 있었다.
역겨운 색의 피를 뒤집어쓰며 계속해서 찌르고 베어 나갔다.
마지막 적까지 확인 사살한 후 그와 나는 숨을 마저 돌릴 수 있었다.
‘무기라도 챙겨오는 거였는데…. 하긴 페로 찾을 생각만 했지, 누가 이럴 줄 알았나.’
워낙에 평화 속에 살게 된 지 오래라, 무기를 휴대할 생각도 못 했다.
‘그나저나, 이 집단은 나를 소환하려고 했던 건가? 인간 세계에 마왕의 부활을 원하는 집단이 있는 건가.’
마왕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라니. 마법진에서 나타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으니 소환술은 성공이라 해야 하나. 그보다도 인간이 마왕의 부활을 원한다는 건 생소했다. 이 세계가 멸망해 봤자 본인들이 얻어 가는 것은 전혀 없지 않은가.
테네브는 검을 휘둘러서 검신을 타고 흐르는 이물을 바닥에 튀겼다. 후련한 나와 달리 그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
“왜 그래?”
“이 녀석들 이상하지 않아? 힘이 인간 같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제 무기를 부술 정도로 악력이 센 놈들이 있었지.”
“주문의 구절 중 하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 순간─
─쿵
‘어…?’
─쿵
어디선가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내 소리인가 싶어 왼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는데 아니었다. 전혀 다른 반 박자의 소음.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천천히 무릎을 꿇고 바닥을 쓸어보았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의 아래는 속이 빈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바닥을 살피고 있으니 테네브가 다가와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왜 그래?”
“…여기. 뜯어봐야겠어.”
그는 더 묻지 않고 부러진 장대를 가져오더니 마룻바닥의 틈에 끼워서는 지렛대로 사용했다.
─끼기기긱… 쩍!
힘이 가해진 나무 바닥은 힘없이 부서졌고 그 안엔 어떻게 삐져나오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심각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우욱…!”
“역시… 그냥 도박장이 아니었어.”
바닥 아래엔 정체불명의 살덩이들이 뒤엉켜 호흡하고 있었다. 어느 생명체를 소환하려다가 실패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검푸른 마법진이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