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벌써 두 번째다. 여기에 다시 올 거란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
─딸그랑, 딸랑
여러 개의 도어벨이 서로 부딪히며 다른 종보다 더 큰소리를 내기 위해 경쟁하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책 사이에서 몸을 굽히고 있는 사내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손님이… 음? 자네는 마법서를 들고 왔던 친구 아닌가?”
“꽤 오래 지난 일인데 기억하고 계시네요.”
“허허, 어찌 잊을 수가 있겠어.”
몰래 마법서를 훔쳐 갔던 루카의 일이 퍽 기억에 남긴 한다. 이렇게 다시 마주칠 줄 알았으면 좀 더 좋은 인상을 남길 걸 후회되긴 했다.
“혹시 조수 안 필요하신가요?”
“호오, 조수라니. 자네가 지원하려는 건가?”
“팔먼이 괜찮으시다면요.”
“하하하, 젊은 친구가 골방 늙은이를 도와준다니까 고마운걸.”
얼굴의 주름이 깊어지도록 웃는 팔먼의 모습은 어쩌면 긍정적인 답이 나올 것 같은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최근 들어 몸이 안 좋아져서 조수를 고용할까 고민이 있긴 했네만, 미안해서 어쩌나. 낡은 골동품 가게는 보수를 쥐여줄 수 있을 만큼 수익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아….”
“너무 서운해 말게.”
“아, 아닙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부탁드린걸요.”
건강 악화한 기꺼이 그를 도와주고 싶지만, 홀로서기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허리를 짚고 몸을 일으킨 팔먼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럼 그들에게 가보는 건 어떤가?”
“누구 말씀이신가요?”
***
“여기 어디라고 했는데….”
‘그가 무언가 부탁하려 했는데, 건강상의 문제로 거절을 했거든.’
‘아마 그라면 일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장을 들른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가보게나.’
팔먼의 말을 상기하며 그들을 찾기 위해 프린치피움의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있었다. 저녁 시간 전, 장을 보러 나온 인파로 북적였다.
─퍽
“앗.”
“엇, 죄송….”
한눈팔며 걷고 있으니 웬 키 큰 갯과 아인종과 부딪혀버렸다. 그가 안고 있던 과일들이 떨어졌는데, 그것도 모자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버린다.
“아, 젠장! 죄송합니다.”
“…….”
“어디까지 굴러가냐…!”
빠르게 한 개씩 주워 팔에 안았으나, 한 개는 유독 멀리도 굴러갔다.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무한히 굴러갈 것만 같던 과일은 어느 발끝에 걸리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발의 주인은 과일을 주워선 내 쪽으로 건네주었다.
“휴우, 감사합니다.”
“아크리스 아니에요?”
“어?”
익숙한 목소리에 이름이 들리자 굽혀있던 허리를 올리며 친절을 베푼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가지런히 땋은 남색의 긴 머리칼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녹틸!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저를 찾아요? 그나저나 리헤로스는 어디에 두고 혼자 온 거예요?”
“그건… 아니, 나 혼자 다닐 수도 있지, 리헤로스를 찾고 난리야?”
“두 사람은 세트인데 이상해서 그런 거죠.”
“어이없네.”
“싸웠어요?”
“안 싸웠어.”
그를 떠올리니 괜히 속이 부글거렸다. 녹틸이 내민 과일을 낚아채 원주인에게 돌려주려 했다.
“여기요.”
“뭐야. 형이었어요?”
“네? 저 아세요?”
“그럼요 아주 잘 알죠.”
과일 봉투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는 나와 키가 비등해 보였다. 머리 위에 솟은 여우 귀는 어디에서 많이 본 느낌을 주었다.
“제…가 왜 그쪽 형이에요?”
“모르시겠어요? 저예요.”
“내가 아는 여우 아인종은….”
이상할 정도로 친한척하는 남성을 가는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직 앳된 얼굴은 발육이 잘 된 10대 후반 청소년 같았다.
“설마… 루카?”
“맞아요. 이제 기억나세요?”
“기억이고 자시고 찍은 거거든? 너무 달라졌잖아!!”
“그래요?”
“못 본 사이에 우리 루카 조금 컸죠?”
“조금이 아니라니까!”
계속 얼굴을 맞대고 살던 둘은 어떨지 모르지만, 공백이 꽤 길었던 나에겐 제법 충격적이었다.
“제가 말했죠? 금방 큰다고요.”
“짧았던 혀도 길어진 것 같다?”
“아무래도 몸 전체가 크니까 그런가 봐요.”
“그러냐….”
“그보다도 아크리스,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혹시 리헤로스에게 무슨 일 생긴 거예요?”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어. 그리고 굳이 연락 안 해도 괜찮은 막역한 사이 아니었어?”
“아닌데요?”
“여전히 재수 없어.”
“하하하. 그럼 자세한 건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죠.”
루카가 훌쩍 커버린 걸 제외하곤 모두 여전했다.
두 사람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용건만 전할 생각이었는데 얼떨결에 저녁 준비를 마치고 함께 식탁에 앉았다.
“루카, 다음에 볼 땐 2m 되어있는 거 아니야?”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아크리스, 이제 본론을 이야기해 보시죠. 오래 끌었네요.”
“아, 맞다.”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도 루카도 함께 있는 곳에서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내 쪽이 부탁하는 처지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순 없었다.
“혹시 너희 저택에 일손 안 필요해?”
“일손이라… 갑자기 노동의 가치를 깨달은 건 아닐 거고, 제 밑에서 공부하고 싶은 것도 아닐 텐데 그건 왜 물으실까요?”
“자리 있으면 나 좀 고용해 줘.”
“오, 굉장히 뻔뻔하네요.”
“부탁…할게.”
“흠? 그럼 이유나 물어볼게요.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일하려는 이유요.”
“돈… 필요해서.”
“리헤로스가 왕국으로부터 봉급 받지 않던가요?”
“…….”
뭐만 하면 리헤로스, 리헤로스. 족쇄처럼 따라붙는 이름이 이골날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리헤로스에 빌붙어 살 수는 없잖아.”
“으음?”
녹틸은 의아한 비음을 내더니 고갤 모로 기울였다.
“정말 리헤로스와 싸운 거예요?”
“싸운 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로부터 독립하려고 해요?”
“리헤로스도 이제 제 삶을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여행의 동행자였을 뿐이고.”
“그런가요. 두 사람 사이의 자세한 사연은 모르니 함부로 말하긴 어렵지만, 그라면 아크리스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건 이상일뿐이지. 현실은 달라.”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묘하게 착잡해졌다.
“하여튼, 돈 벌고 싶어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일자리 구하는 게 쉽지 않더라.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너한테 찾아온 거야.”
“그런 거군요. 흐음…….”
그는 긴 고민을 하는 듯싶더니 답지 않게 눈썹을 구부리며 미안해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마법으로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어요. 손이 더 필요하거나 힘쓰는 일이 생기면 루카에게 부탁하고 있고요.”
“그럼 역시… 어려울까?”
“미안하지만 정식으로 고용은 어렵긴 해요.”
“하아… 뭐 어쩔 수 없지. 갑작스레 찾아와서 일 달라고 해서 미안했어.”
“그런데 단기라면 할 일이 있어요.”
“정말?!”
“네, 요즘 집필을 시작한 게 있는데, 그 책의 검수를 해줄 사람이 필요한 참이었어요. 저 혼자 보면 오류가 자주 생겨서 팔먼에게 부탁했는데 거절당했고요. 루카는 책에 크게 흥미가 없어서 오래 못 붙잡고 있더라고요.”
“정말… 고마워.”
“살다 살다 아크리스에게 감사 인사를 듣는 날이 오네요.”
“네 시비도 오늘만큼은 달콤하게 들린다.”
“돈 앞에선 아크리스도 온순해지네요.”
“네네, 그럼요. 물론이죠. 고용주님.”
현실로 따지면 정규직이 아닌 단기 계약직이지만 충분했다. 손가락만 빨고 있을 바에 무어라도 하면서 일자리를 찾는 게 이로우니까.
“아크리스, 글은 읽을 줄 알죠?”
“이상한 고대어만 아니면 가능할 거야.”
“다행이네요. 그럼 모레부터 해줄래요? 앞부분 원고부터 봐주면 될 것 같거든요.”
“응. 그럴게. 근데 있지… 나 여기 쪽방에서 지내도 될까?”
“거처까지 옮기려고요?”
“작업하는데 왔다 갔다 하면 정신 사납잖아. 흐름 끊기고.”
“정말 그 이유에요?”
“……응.”
“리헤로스와 상의하고 결정한 거 맞아요?”
“내가 걔랑 왜 상의를 해야 해.”
“둘은 저와 루카처럼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 아니었어요?”
“그냥 친구… 아닐까? 모르겠어.”
“…….”
정말 어떤 사이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동행자라고 단정 짓기엔 내가 생각해도 어중간했으며,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현실에서… 친구에게 이런 감정을 느꼈던가?’
그 자문에는 아니라고 확실히 자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와 나의 관계는 무어라 규정짓기 어려운 경계에 서 있었다.
“진짜 속 터지게 하네요. 두 사람 대화하긴 해요?”
“대화야 당연히 하지…!”
“근데 왜 모르겠다고 혼자 끙끙대고 있어요?”
“…….”
“모르면 물어봐요. 혹시 리헤로스에게서 어떤 답이 나올지 몰라서 두려워요?”
“두렵다니! 그럴 리가 있겠냐?”
“그럼 제발 부탁인데 이야기를 나눠요. 보는 사람 속 터지니까. 둘이 상의했다는 확답을 듣고 나면 방을 내어 줄게요. 일 얘기는 리헤로스가 알든 모르든 아무래도 좋지만요.”
“하아아… 알겠어.”
“그에게 직접 물어볼 거니까 속일 생각 말고요.”
“알았대도!”
“좋아요. 성질내는 거 보니 기운이 났나 보네요.”
“내가 언제는 기운 없었나.”
“네, 드물게 짠할 정도로 기운 없어 보였어요.”
“아오….”
녹틸에게 잔뜩 바가지를 긁히고 나서 쫓겨나듯이 저택에 나왔다. 저항할 힘이 없으니 얌전히 묵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오늘은 낯설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고용주의 말씀이니….’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는 데에다 그와 점점 거리를 벌릴 필요가 있었다. 갑작스레 멀어지면 또 왜 그러냐느니 자기 잘못이라느니 자책할 게 뻔하다. 그런 모습으로 헤어지기엔 내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
─끼긱
“나왔어.”
“어디 갔다 왔어? 늦었네.”
“어어… 그냥 어디 좀 다녀왔어.”
“아직 밥 안 먹었지? 기다리고 있었어.”
“…….”
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었다니. 미련하고 착한 남자 때문에 복장이 여러 번 터진다.
“애도 아니고 혼자 밥 못 먹어?”
“너랑 먹고 싶어서 그렇지.”
“……먹고 왔어.”
“아, 그랬어? 다행이다.”
“…….”
“그럼 일찍 들어가서 쉬어. 많이 피곤해 보인다.”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리헤로스가 쥔 스푼이 접시를 달그락거리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밥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말할까 싶어 몸을 돌렸다.
“있지….”
“응?”
“아…… 아니야. 먹어.”
“하하. 크리스 오늘 이상하네.”
그의 시선이 내게 쏟아지기 무섭게 용기가 사그라들었다. 어려운 말도 아닌데 왜 이럴까에 의문이었다.
“참, 내가 나흘 뒤에 같이 가자고 했던 곳 있잖아.”
“아아… 응.”
“조금 앞당겨져서 내일 같이 가보지 않을래?”
“내일?”
“응. 내일은 나한테 시간 좀 내주라.”
예상대로 공주와의 약혼이 급하게 진행되고 있는 걸까.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하지만 티 내고 싶진 않아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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