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설마 꿈은 아니겠지?’
예복을 갖춰 입은 그가 달빛 아래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 그 어떤 것보다 비현실적이었다.
“깜짝아… 언제 왔어?”
“방금. 네가 안 보여서 찾고 있었는데, 익숙한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와보니 네가 있더라.”
“뭐어… 나는 그렇다 쳐도, 네가 없어지면 사람들이 찾지 않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놈이.”
“그래봐야 귀족도 아닌 사람한테 관심이 얼마나 가겠어. 무슨 얘기인지 들어도 잘 몰라서 반응하기가 어렵더라.”
“바보야. 잘 몰라도 대충 아, 진짜요? 하면 되잖아.”
“그래? 많이 해봤나 본데.”
“흐흥, 사회생활하려면 이 정돈 기본이지.”
“너한테 정말 많이 배운다.”
정말 그 어느 부분도 웃음을 유발할 대화가 아니었는데도 우린 소리 내 웃었다.
“아까… 춤 잘 추더라.”
“아… 봤어?”
“응.”
그 말에 건반을 두드리는 것을 멈췄다. 리헤로스는 다른 사람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느라 나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칼리고와 춤을 춘 걸 봤단 말인가.
‘쪽팔려…!’
우리의 주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과 오붓한 춤을 추는 게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어쩌면 이곳저곳 옮겨타는 비열한 인간으로 보였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리헤로스가 먼저 칼리고에 대한 이야길 꺼내지 않았으니, 나도 구태여 그 인간을 언급하지 않았다.
“너, 너는… 기껏 무도회 와서 안 추고 뭐 했어?”
“스텝을 배우긴커녕 춤 한 번도 춰본 적 없어서 구경하기만 했지. 괜히 나섰다가 상대의 발을 밟으면 폐가 되잖아.”
“그랬구나.”
멈춰있던 건반을 다시 한번 꾹 누르며 가까스로 용기를 내 물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까?”
“응.”
즉답이 나왔다. 그 정도로 춤추고 싶었던 걸까. 하긴 여러 자리에 초청받을 위치가 되었으니 춤 하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거만한 귀족들 앞에서도 망신당하지 않을 테니까.
“이쪽으로 와봐.”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그 옆 공간에 섰다. 마주 보고 서 있으니 묘하게 어색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래도 기껏 알려준다고 해놓고 못 한다고 할 순 없으니 그의 앞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음… 일단, 상대의 손을 잡은 다음… 다른 손으로는 이렇게, 허리를 잡아.”
그의 손을 잡아 내 허리 위로 옮겼다. 칼리고가 감쌌던 위치 그대로였는데도 아까완 달리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발을 의식하지 말고 상대와 시선을 마주하는 거…야.”
“응.”
그는 내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저리도 차가운 파란색이 따뜻하게 느껴지기란 쉽지 않은데도 리헤로스의 눈은 그랬다. 너무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것 같아 고갤 돌렸다.
“……지, 지금은 연습이니까 대충 해도 돼.”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면 좋잖아.”
“마음대로 하던가…….”
“크리스도 날 봐주면 안 돼?”
여기서 빼면 더 이상해질까 봐 한숨을 푹 내쉬고서 삐걱대는 목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너무 가깝잖아. 미치겠네.’
그의 빈손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내 손을 얹듯이 가볍게 올렸다.
“자세는 이게 기본이야.”
“응, 알겠어.”
“네가 리드하면 상대는 반 박자 정도 늦게라도 따라가면 되니까.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발을 옮겨봐.”
“이렇게?”
그의 움직임은 아직까진 어색했지만, 상대를 배려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단 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 속도면 음악의 열 박자 가량 늦게 추고 있을 속도이긴 했지만 말이다.
“잘하네.”
“그래도 아직은 초보티 나지?”
“처음 추는 거라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빈말이래도 아니라고 해줄 줄 알았는데.”
“내가 언제 마음에도 없는 말 한 적 있냐?”
“으음, 그건 그래. 크리스는 신중한 것 같아.”
“말을 뱉는 건 쉬울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어떤 무게일지 모르니까 그래. 그러니 말을 전할 땐 신중히 처리해야지.”
“좋은 생각이야. 그래도 나는 칭찬 필요하니까 빈말이라도 해줘.”
“싫어.”
“너무해.”
블루스에 가까운 박자에 맞춰 빙그르르 돌았고 그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잖아.”
“으응, 그렇지.”
“내기 기억나?”
“아, 맞다.”
리헤로스의 취향 맞추기 내기를 했었다. 마지막 날인 오늘 정답을 맞혀보는 것으로 얘기를 마쳤었다.
“어때? 좀 알아낸 건 있어?”
“무진장 자신 있어. 그간 다져온 관찰력으로 단번에 끝내버릴 작정이거든.”
“좋아. 그럼 깐깐하게 심사해도 돼?”
“치사하게 굴지 말고! 시작한다?”
배시시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자신 있게 그가 좋아했던 것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단 거 좋아하지, 그중에도 초콜릿 같은 류.”
“맞아.”
“그리고 귀여운 거 좋아해. 특히 강아지.”
“그것도 맞아.”
“술은 곧잘 마시지만, 굳이 찾아 마시진 않지. 마신다면 맥주파.”
“그건 어떻게 알았어?”
“녹틸이랑 술 마셨을 때, 밀맥주 향기가 났어.”
“디테일이 대단한데.”
“어때? 이 정도면 많이 맞췄지. 합격이야?”
“흐음, 어쩔까….”
“왜? 다 맞추지 않았어?”
“아쉽게도 가장 중요한 걸 빠트렸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보여준 적 없는 거 아니야? 너 혼자만 알고 있는 은밀한 사생활 같은 거라던가.”
“아하하! 아니야. 자주 보여줬는데?”
“하아아… 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리헤로스는 감싸고 있던 등허리를 부드럽게 당겨 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크리스야.”
“뭇… 뭐?”
롤러코스터의 가장 꼭대기에 도달한 것처럼 심장이 주체 못 하게 터질 것만 같았다. 맞잡은 손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도 느껴질 거라 민망해서 손을 빼버리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까?’
그리고 역시나 칼리고의 말이 틀렸다. 어떤 형태이든 간 그에게 있어 나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이것만은 사실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게 못다 한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술에 취해서 부리는 객기인지 분위기 탓인지, 출처를 모를 용기가 샘솟았다. 롤러코스터 위에 놓인 심장은 하강 직전의 상태였다.
“나도….”
빗장뼈 위에 가볍게 얹어둔 손을 움직여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피유우우웅… 펑!
“헉 깜짝아.”
폭발하는 소리에 놀랐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빛에 의해 그 존재를 빠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
“뭐야? 불…꽃?”
“아아… 불꽃놀이네.”
‘원래 이런 세계관에 폭죽이 있나? 이국으로부터 자석을 들여왔으니 화약도 있을 법 한가….’
─퍼퍼펑
“놀랐네….”
“예쁘다. 그렇지?”
“응… 그러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마치 그 말을 멈추라는 신호탄처럼 느껴져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김이 새 버려 그에게서 천천히 떨어져 섰다. 검은 하늘을 알록달록 수놓은 불꽃들은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니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내기… 네 계략인지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못 맞췄으니까 내가 진 건가?”
“그럼 소원권 하나 주는 거야?”
“그래야지. 남자답게 한 입으로 두말 안 할게.”
“하하하, 고마워. 겨우겨우 한 개 따낸 거니까 아껴 써야겠다.”
“어디에다 쓰려고 아껴둬?”
“으음… 때가 되면 써야지.”
“계획이 있나 본데, 뭔데?”
“비밀.”
불퉁한 얼굴로 노려보니 리헤로스는 슬쩍 눈을 피해 하늘을 올려다본다.
“돈 줘, 이런 거 안 된다. 나 너보다 거지란 말이야.”
“그런데 게헤나에서 왕이었는데 왜 거지야?”
“마계 화폐랑 다르니까 어쩔 수 없지. 성을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쪽 땅 팔았으면 나 벌써 부자다.”
“아하하하, 알았어.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 금전적으로는 지금도 부족한 거 없다고 생각하는걸.”
“그럼 다행이고.”
그의 따뜻한 미소는 칼리고에 의해 더럽혀진 마음을 정화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보다… 정말 이대로 행복하게 착한 일만 하고 살면 엔딩인 걸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놀고먹기만 하니 불안증이 도질 것 같았다. 쉴 때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평화에 불안감을 느끼는 전형적인 한국인이었다.
***
이른 아침부터 부스럭대는 소리에 고갤 들었다. 어딘가 갈 채비를 마친 리헤로스가 눈에 띄었다.
“어디…가?”
“응, 오늘 국왕 폐하께서 부르셔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왜 그렇게 자주 부른대…. 끄으응….”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런 나의 머리맡에 다가오더니 이불을 고쳐 덮어준다.
“다녀올게, 쉬고 있어.”
“으으으응….”
“점심은 같이 먹자.”
“…으으응….”
잠결에 늘어지는 대답했고, 그가 나간 뒤 방 안이 잠잠해지자 다시금 잠이 들었다.
…
“으… 으으…. 중간에 한 번 깼더니 피곤하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야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옆 침대엔 가지런히 정리된 침구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직도 안 돌아온 건가….’
언제쯤 돌아오는지 알 수 없지만, 점심은 같이 먹자고 했었으니 우선은 끼닛거리를 사러 나섰다.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카톡이라도 남길 수 있는데 현실에 비해 편한 것도 있지만 불편한 것도 분명 있었다.
─끼이익
시장을 향해 걷고 있으니 거리는 한바탕 축제가 휩쓸고 지나간 후유증으로 쓰레기가 나뒹굴고 다녔다.
‘어디를 가나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속으로 투덜대며 자연스럽게 빵집으로 들어서려고 했는데, 바로 직전에 멈춰 섰다.
‘모처럼이니까 빵 말고 다른 걸 사갈까 싶어서 말이다.’
나는 괜찮아도 리헤로스는 빵만 먹다간 영양 불균형으로 쓰러질지 모른다.
‘숙소 주방을 빌려서 내가 요리를 해볼까?’
자취로 단련된 요리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1인분 위주의 식사를 만드는 게 보통이었기에 뭘 만들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시장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재료가 보이면 그걸로 만들 수 있는 걸 생각해 보지 뭐.”
현실로 따지면 재래시장 같은 곳을 갔다. 호객을 하는 것은 어디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채소가게에 들러서 가장 무난한 식자재를 사려고 했다.
“어서 와요. 총각. 오늘 파프리카가 신선해.”
“파프리카요? 흐음….”
분명 양파 같은 아무 데나 들어가도 괜찮을 그런 식자재를 사려고 했는데, 파프리카 바구니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노란 파프리카를 집어 들어 상태를 살폈다.
‘리헤로스 닮았어.’
“두 개 주세요.”
“네에, 고맙습니다. 더 둘러봐요. 같이 사면 싸게 해줄게.”
좋아. 오므라이스를 해주자. 재료 썰어서 볶기만 하면 되니 조리도 간단했다. 재료 대부분을 채소가게에서 구매했고, 달걀은 옆집에서 구매했다. 마지막으론 빼놓을 수 없는 쌀을 사러 가는 것으로 장 보기는 마무리하려 했다.
“쌀 한 주머니만 주세요.”
“네에, 이 정도면 될까요?”
가게 주인은 한 바가지를 퍼 올려 내게 물었다. 나는 끄덕였고, 그녀는 쌀을 주머니에 와르르 쏟아 넣었다.
‘한국 게임이라 그런가. 계량 법도 되게 토속적이네.’
이곳이 게임임을 잊지 못하는 것은 종종 고증을 지키지 않은 한국적인 요소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갑자기 어떤 마을 주민이 헐레벌떡 내 옆에 서서는 쌀 주머니를 묶고 있는 주인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봐, 그거 들었어?”
“으응? 잠깐 기다려. 나 손님만 보내고.”
“아잇! 빅뉴스라니까!”
“나 참, 뭔데 호들갑이야?”
“공주님이랑 용사님이 약혼할 것 같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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