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어깨에 닿는 검은 머리카락은 늘 정돈되지 않은 내추럴한 느낌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반 깐 형태로 정돈된 차림새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엔 여전히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차가운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외형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이놈 영혼도 교체해 주면 좋겠다. 아주 인성 좋은 사람으로다가.’
시답잖은 상상을 마치고 와인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시비 걸려고 시동 거는 중이면 가라. 모처럼 좋은 날 기분 망치기 싫다.”
“여전히 가시를 세우는군.”
대꾸하기 싫어 와인을 쭉 들이켰다. 이 정도의 의사 표현이면 쪽팔려서 자리를 피할 줄 알았건만 피하지 않고 발에 껌이라도 붙었는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이래? 부담스럽게.”
“일전의 무례는 사과하지.”
진심으로 놀랐다. 칼리고와 사과라는 말이 어울리나? 절대 아니었다.
“내가 벌써 취했나? 헛 게 들리네.”
“받아줄 건가.”
“아니면… 네가 미쳤나? 하하하!”
“사과해도 받아줄 생각이 없군.”
“어, 네 태도를 봐라. 어쨌든 사과를 했으니 받아라 이거야? 사과하는 주제에 고개나 빳빳하게 쳐들고 거만하기 짝이 없어.”
“이렇게 인파로 붐비는 회장에서 구두 굽 앞에 머리라도 처박고 조아리란 말이냐?”
“오, 그거 꼭 보고 싶은데? 그래 주면 한번 생각해 볼게.”
“유치하게 구는군.”
“상대가 성숙해야 걸맞은 대접을 하지. 그리고 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걸 굉장히 경계하는 사람이거든? 보통 그런 짓거리를 하는 놈은 둘 중 하나야. 돈 빌리려고 하거나,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던가. 둘 중에 있냐?”
“없다.”
“하하, 그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성의 없는 사과에 비웃듯이 대꾸하자 잔만 부득부득 문지르고 있었다. 그의 알량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갔을 것이라.
‘제발 꺼졌으면.’
대형을 유지하며 발을 맞춰 춤추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빈 와인잔을 근처 테이블에 올려놓고 더 마시기 위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던 중, 오케스트라의 선곡이 바뀌었는데 칼리고가 내 빈손을 낚아챈다.
“뭐야?!”
아무리 미쳤어도 이런 곳에서 몸싸움을 걸어오는 것인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슨 짓이야?”
“대화할 생각이 없으면 춤이나 같이 추지.”
“뭐라고?”
“한 곡 추자고.”
“미친놈…….”
칼리고의 손에 질질 끌려 나왔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는데, 리헤로스라는 인질이 있었다. 그를 위해 오늘만큼은 조용히 있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끌려 나오는 나의 모습은 이상해 보이지 않은지 의문을 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그저 저들끼리 수군댔다.
“칼리고 경이 춤을 추는 건 보기 드물지 않아?”
“정말 멋지셔. 절도 있는 움직임에서 칼리고 님의 성격이 보여.”
“파트너는 용사의 동행자 맞지?”
“저자는 용사보다 칼리고 경과 더 어울리지 않아? 흑백의 조합이 안정적이잖아.”
“하하하, 그러네.”
사교계에서 사람의 급을 나누거나 저들끼리 보이는 대로 짝짓는 행위가 불쾌했다. 칼리고와 어울린다는 얘기는 모욕에 가깝기에 더욱 언짢았다. 칼리고는 내 손과 허리를 가볍게 감쌌고, 발을 떼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 반 박자 늦게 움직이긴 했으나, 서툰 느낌을 주기 싫었다.
‘이 자식 춤 못 춘다고 비웃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그를 매섭게 노려만 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그간 꽤 오래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이야, 네가 생각이란 걸 하긴 하냐?”
“용사가 운 좋게도 짧은 기간에 모든 명예를 성취하는 건 네놈 덕이 아닌가 궁금해졌다.”
“뭐?”
“그러니 나와 손을 잡자. 나를 성공하게 만들어다오. 그렇게만 해주면 네가 원하는 것은 그 어떤 구하기 힘든 것도 네 손에 쥐여주도록 하지.”
리헤로스가 명예를 얻거나 잘 되는 것은 그가 용사로 시스템 설계되어서 일뿐이지, 나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못해 없는 것에 가깝다.
“너는 그냥 생각을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내 제안이 농담 같나?”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야.”
“…….”
“그가 성공한 데엔 내 힘이라곤 한 톨도 안 들어갔어. 네 스승의 말마따나 신의 선택받은 사람이니 온 세계가 도와주는 거겠지.”
“그렇다면 왜 나는 선택받지 못했지? 그에게 꿀릴 것 하나 없는데.”
“내가 신이어도 너 같은 놈은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데. 허우대만 멀쩡하지, 속은 썩어 문드러졌지 않아?”
“흐응, 앙큼한 도발이군.”
“아, 앙큼….”
이제 칼리고는 이 정도의 도발로는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내 쪽이 역공당해 더 열받는 소릴 듣고 있었다.
“하, 쓸데없는 망상은 집어치우고 정직하게 네 자리에서 네 할 일만 해. 그러기만 해도 네게 운은 굴러 들어올 테니.”
“비협조적일 줄 알았다만 철벽이 따로 없군.”
“그러니 애초에 묻지를 마. 설령 내가 그런 역할을 할지라도 널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어.”
곡에 맞추어 빙그르르 돌자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쪽을 바라보니 그곳엔 눈부신 금발의 리헤로스가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시선이 어느 곳에 멈춘 지 눈치챈 칼리고는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런데 정말 용사와 아무 관계도 아닌가?”
“큿, 붙지 마…! 그건 왜 묻는데….”
“한창 불타오를 나이의 청년 둘이 매일 같이 붙어 다니는데, 정이 통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하! 고귀한 기사 단장께서 일개 모험가의 사생활을 궁금해해? 악독한 취미네.”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닌가 보군, 딱하기도 하지.”
“네 모난 인성을 가진 멀쩡한 껍데기가 더 불쌍하다.”
“나약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 과격한 말로 포장하는 거, 잘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
“네놈도 인정받고 싶겠지, 혹은 누군가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싶다던가.”
“…전혀.”
“우린 꽤 비슷해. 모든 것이 제 위주로 돌아가는 리헤로스와는 상극이란 말이다.”
분명 이간질임이 틀림없는데도 나의 상황을 본인에 빗대어 설명하니 묘한 설득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칼리고의 망나니 같은 태도가 나와 같은 이유라는 것에서 오는 동정일까.
“용사는 넓고 얕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게 뭐 어때서?”
“너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용사에게 특별한 것 없는 지나가는 인물 중 하나.”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어느 사람과 잘 어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원하지만, 그는 루미를 제외하곤 깊은 유대를 나눈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내게 오면 너는 더없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나는 너와 비슷하니 네가 겪는 모든 문제에 공감할 수 있어. 그러니 누구보다 널 좋아해 줄 수 있다.”
“네가 타인을 좋아할 수 있다고?”
“어때, 흥미가 생겼나?”
허리를 안고 있는 쪽의 손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듯 더듬더듬하는 게 느껴졌다.
“오늘 밤은 나와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어때. 실망시키지 않으마.”
“이… 미친….”
어떤 의도인지 투명하니 역겨움이 한층 더 올랐다. 잠시나마 그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동정했던 내가 멍청이다.
─꾸왁
구두의 뒷굽으로 그의 발등을 세게 찍어 누르듯 밟았다. 내 허리를 붙들고 있던 칼리고의 손에 힘이 빠지니 뒤로한 걸음 물러섰다.
“크윽… 너…!”
“얘기는 끝난 것 같으니 실례하지.”
부러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댄스 홀에서 빠져나왔다. 리헤로스를 위해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다. 칼리고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나를 헐뜯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렇게 무례할 수가.”
“누가 저자를 데리고 온 거죠?”
“아무리 용사의 일행이라 해도 말이야… 정도라는 게 있지.”
노래 중간에 이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지만 별수 없었다. 예절을 차리기 이전에 상대에 예절을 표할 만큼 점잖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떠들도록 두고 정원으로 나왔다.
‘용사에게 특별한 것 없는 지나가는 인물 중 하나.’
조용한 곳으로 나오니 유독 귓가에 맴도는 문장이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X발….”
칼리고의 말은 영양가가 없다 못해 폐기물이나 다름없어서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데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돌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분하지만 칼리고만큼이나 나를 꿰뚫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없는 사람이 있긴 한가. 마음을 욕심내지 말자는 다짐은 항상 다정함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왜 리헤로스의 삶에서 내가 1순위가 아니라고 해서 우울해하고 있는 건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으응….”
“아름다워. 당신은.”
“…….”
정원은 애정 행각을 하는 몇몇 사람들이 구석구석 숨어있었다. 사람이 없을 만한 조용한 곳으로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기에 계속해서 이동했다. 마침내 미로 같은 정원을 지나 깊은 곳으로 도달하자 아무도 없었고, 대신 눈에 띄는 사물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피아노…가 있네.’
이번엔 하얀색이 아닌, 검은색의 그랜드 피아노였지만 리헤로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만은 똑같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 하나를 꾹 눌렀다. 그와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치던 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
‘그때 이렇게 쳤던가.’
오른손으로만 건반을 더듬더듬 짚어가며 쳐보았는데, 이미 그때는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서 생각했던 그런 음이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다시 연상해 보았다.
─♪♩
‘맞아 이렇게 치는 거였지.’
아무리 기억해 내도 메인 음 정도만 기억이 났고 왼손으로 치는 반주까지 기억하진 못했다. 그래서 오른손으로만 느릿느릿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
─♬♪-♪♩
어느 순간 반주가 곁들어져 풍부한 음색을 내고 있었다. 내 상상력이 이렇게 생생한 음을 만들어낸 건가. 싶었지만, 절대 상상이라곤 할 수 없는 생생함이었다.
꾹 닫고 있던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니─
“어?”
“기억하고 있었어? 이 곡.”
어느새 리헤로스가 옆에 앉아 왼쪽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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