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름답다니….’
그의 말에 얼굴이 불타는 것 같았다. 옷이 하얘서 얼굴이 붉어지는 게 티 날 것 같아 고갤 돌려버렸다.
“에휴 용사님, 감상평이 짧은 거 아니에요? 엄청 엘레-강스하고 우-아하잖아. 절대 이 옷으로 해요. 알겠어요?!”
“아… 네…. 그럴게요.”
“너무 잘 됐다! 진짜 잘 어울려요. 손님분.”
여러 사람들 눈에 차고 나서야 거울 앞에 설 수가 있었다. 내 눈엔 그저 무언가 주렁주렁 달린 하얀 예복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보이는 거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 미적 감각이 좋지 않아서겠거니 싶었다. 예복을 벗어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고 원래의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 이제 용사님 옷을 골라볼까?”
기대감이 충만한 용사의 차례답게 옷을 여러 개 걸어둔 행거째로 재단사를 포함한 직원 모두가 탈의실에 함께 들어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진이 쭉 빠져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땐 티에 청바지면 충분했는데.’
데이트할 때에나 셔츠 위에 조끼를 걸치고 슬랙스를 입는 등 이것저것 걸쳐 입어보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한다. 금세 애인이 편해져 편하게 입고 나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탈의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간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었다.
“흐아암….”
아침 일찍부터 경기를 보고, 긴장을 놓치지 못했기 때문에 급격하게 이완된 근육의 탓인지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이 끔뻑끔뻑 감기기 직전에 탈의실의 커튼이 젖혀졌다.
“짜잔, 어떱니까?! 저의 회심의 걸작!”
“크리스… 어때…?”
커튼에서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왕자님 같아!’
이 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로 뱉진 않았다.
“이상해…?”
“아니! 그걸로 해.”
“괜찮은 거 맞지?”
“응, 아주 잘 어울려. 네가 정말 주인공이라는 게 팍팍 티 나는 옷이야.”
내가 입었던 예복과 달리 조금 더 제복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걸 아름답게 섞은 느낌이랄까. 옷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설명이 어려웠다. 그의 옷에 달린 금색 무늬가 모두 자수로 한 땀 한 땀 놓였다는 사실을 경악스럽게 만들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옷처럼 보였다.
“용사님도 그럼 이걸로 하시죠. 저 재단사 인생 30년, 팔아먹기 위해 알량한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아아… 그럼 이걸로 할게요.”
우리 둘은 의상에 크게 토를 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늘 같은 옷 하나로 돌려 입어가며 만족했으니 말이다. 뭘 입든 그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목표는 달성했으니 가게 밖을 나와 마차 앞에서 스피나를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상자를 바리바리 이고 있는 시종들과 함께 나왔다.
“앗, 원래 백작은 이렇게 직접 나와서 잘 안 사는데… 너무 체면 안 차리고 쇼핑해버렸네요.”
“즐겁게 다녀오셨으면 그만이죠.”
“후후, 고마워요. 재단사에게 들었어요. 두 분 다 아주 딱 맞는 걸로 잘 골랐다면서요?”
“잘 어울리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비싼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어머 농담도 잘하셔.”
“옷은 한 번 더 재단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완성되면 두 분이 묵으시는 곳으로 보내달라 할게요.”
“감사합니다.”
“마차는 아마… 당일 왕궁에서 보내줄 거예요.”
“허얼… 정말요?”
“그럼요. 두 분을 위해 열린 연회니까요.”
“이야, 예우가 엄청나네요.”
“후후후, 그럼 그때 봐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스피나는 마차를 타고 본인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당일 그녀가 봤을 때 구려서 비명 지르면 어쩌지. 돈 낭비했다고 절교 선언을 하면 큰일이다. 그 옷이 객관적으로 괜찮았는지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는데 온통 리헤로스의 착장 모습만이 떠돌았다.
‘적어도 그는 잘 어울렸으니 욕먹지 않을 거야.’
주인공은 그이고 나는 옆의 쩌리니까 괜찮을 거라 마음을 추슬렀다.
***
“웃, 으윽…!”
바들바들 떨면서 등에 달린 지퍼를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아… 미친… 어쩐지 그때 여럿이 들어와서 입혀주더라.”
입는 순서는 종이로 적혀있어 따라서 차근차근 걸치고 있었는데, 등 지퍼를 올릴 수 있을 만큼 몸이 유연하지 못했다.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해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역시 그냥 까만 턱시도나 입었어야….’
얼결에 이 옷으로 정했지만, 혼자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최고였다. 다시금 심호흡하고 지퍼를 단숨에 올리려고 했다.
“으극….”
─똑똑똑
“크리스, 도와줄까?”
“아…….”
어쩔까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지퍼 하나 못 올려서 끙끙대는 게 민망했다. 그런데 더 지체했다간 일정에 늦을 수도 있고 자존심보다는 입는 게 우선이니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는 셔츠와 정장 바지 정도만 걸친 상태였다.
“너는 다 입었어?”
“응, 이 위에 몇 가지만 걸치면 돼.”
“그렇구나….”
“뭐 도와줄까?”
“그냥… 지퍼만 올리면 돼.”
천천히 돌아 그에게 등을 보였다. 맨 살갗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그의 시선이 피부에 따끔따끔 닿는 것 같았다. 리헤로스는 머뭇머뭇 옷의 아랫단을 잡더니 지퍼를 천천히 주욱 올렸다.
‘왜 이렇게 천천히 올리는 건데…!’
찌이이이이이이익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지퍼의 진동이 느껴졌다. 목 끝까지 올라간 지퍼의 소리가 뚝, 멎자마자 제 목을 북북 문질러댔다.
“고마워. 이후로는… 내가 할 수 있어.”
“응, 그럼… 준비되면 나와. 마차는 기다리고 있더라.”
“헐 벌써?! 빨리해야겠네.”
“아하하하. 천천히 해.”
옷이랑 씨름하는 동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역시 부탁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옷을 겹겹이 차례대로 입고 나서 부리나케 리헤로스와 합류했다.
마차는 이드랑제 백작에서 보낸 것과 차원이 달랐다. 차체도 크고 장식물도 훨씬 화려했으며, 말도 네 마리나 붙어있었다.
“이렇게까지 대접을 해준다니…. 어마어마하네.”
“그러게 말이야. 자, 먼저 타.”
그는 내가 마차에 오를 수 있게 손을 잡아주려 했다.
“…….”
“애 취급 아니야.”
내가 툴툴대기 전에 그가 선수 쳤다.
“그럼?”
“네가 옷에 걸릴까 봐 걱정돼서 잡아주는 거니까 사양하지 말고.”
“음… 알겠어.”
한 손으로는 옷을 잡고 리헤로스의 손에 의지한 채 마차에 올랐다. 마차 내부는 정말 크고 쾌적했다. 의자도 푹신푹신 했으며, 천장에는 천사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리헤로스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출신을 모르면 왕자라고 착각할 만큼 옷이나 배경이 그와 어울리게 맞추어져 있었다.
‘어쩌면 왕자로 만들려고 했던 캐릭터를 용사로 잘못 만든 거 아니야?’
그의 얼굴을 조목조목 살피며 혼자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었는데 리헤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민망하니 고갤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 길거리는 오히려 활기를 띠고 있었다. 모두 축제를 한껏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평화로운 게 최고네.’
이제 마군과의 전투는 없을 테니 마음이 놓였다. 모두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길 바랐다.
점점 인파가 사라지는 것 같더라니 어느새 왕성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헤로스는 한차례 다녀왔지만, 나는 초행길이라 조금은 들떠있었다.
마차가 마침내 멈춰 서고 문이 열리니 성 안쪽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 들렸다.
“자, 손.”
“…고마워.”
에스코트 받는 기분. 이것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용사의 동행자로서 마차에서 굴렀다간 웃음거리가 될 테니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다. 그와 함께 높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에서부터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댔다.
“저분, 용사 아니에요?”
“세상에… 너무 멋지다.”
‘역시 다른 사람이 봐도 그런 느낌이겠지?’
누가 봐도 오늘의 주인공은 리헤로스였다. 홀로 들어서자 지나오는 사람들─귀족들 뿐이었지만─이 인사를 건네왔다.
“용사님, 축하드립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리헤로스는 일일이 감사하다며 묵례하며 지나왔다. 본 연회가 열리는 연회장까지는 내부의 계단을 한차례 더 올랐어야 했다.
‘계단 오르다가 하루 다 가겠네.’
열심히 정상까지 오르자, 연회장의 문이 보였다. 그와 함께 회장 안으로 들어서니 입이 떡 벌어졌다.
몇백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회장은 거대 샹들리에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고 홀보다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리헤로스! 아크리스! 이쪽이에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위압감에 못 움직이고 있던 우리를 향해 외쳐오는 목소리는 정말인지 반가웠다. 제 머리카락 색과 빼닮은 분홍색 드레스에는 꽃 모양 장식물과 비즈로 번쩍였다. 늘 화려한 인상을 주었지만, 오늘만큼인 적은 처음이었다.
“백작님, 먼저 오셨군요.”
“후후, 두 분이 많이 늦으신 건 아니고요?”
“옷 입는 게 익숙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푸후훗, 사과하지 말아요. 자자, 그럼 한 바퀴 쭉 돌아볼까요?”
스피나를 필두로 홀을 돌며 귀족과 유명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리헤로스에게 관심이 많아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건 기본이었다.
“스피나 님, 혹시 용사님과 언약한 사이 아니에요?”
“네에? 후후후, 그럴 리가요.”
“두 분 잘 어울리시는데 이김에 추진해 보심이 어때요.”
이런 귀족들만 재밌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피곤하기도 했고, 어떨 때엔 나는 거의 잊힌 것처럼 인사조차 받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스피나나 리헤로스가 필사적으로 나도 ‘이 구성의 일원’이라는 것을 강조해도 모두 리헤로스에게만 관심이 쏠려있었다.
‘역시 나는 이방인이지.’
사실 이곳에 와서 무언갈 할 거라고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업적을 이룬 것은 리헤로스지 그 옆에서 보조하던 내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연회의 음식이나 즐기자 싶어 리헤로스에게 귓속말을 남겼다.
“나, 힘들어서 좀 쉬고 있을게.”
“아아, 응.”
그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데에 정신없었다. 나라도 살아야겠다 싶었다. 회장의 한편에 와인 테이블로 가서 잔을 들었다.
‘술이라도 많이 마셔야지.’
본전을 뽑겠다는 심산이었다. 야심에 찬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용사와 같이 모험했던 분이죠?”
“아… 네.”
“아하하, 그쪽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압니다. 저는 브론테 공작가의 장남, 릭투스 델 브론테입니다.”
“아… 네. 아크리스입니다.”
“듣자 하니 용사의 옆에서 중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내셨다던데….”
“아… 네.”
“괜찮으시면 그간 여정의 이야기 들어보고 싶은데요.”
“아… 네.”
“저 시간 많습니다.”
“아… 네.”
“…….”
공작인지 후작인지 나부랭이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몇 번이고 들러붙는 놈들이 있었지만, 영혼 없는 대답으로 금세 떨어져 나갔다.
‘어차피 마족인 거 알면 기겁해서 도망칠 놈들이.’
마침내 아무도 접근 안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줄 알았다.
“웬일로 오늘은 혼자 있는 거지? 버림받은 고양이처럼.”
“또 뭐야…?”
말을 걸어오는 남성은 검은 예복 위에 붉은 휘장이 걸린 제복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즐거운 행사장 안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인물, 칼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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