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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54화 (54/127)

54화

─딱

“아… 시끄러워….”

─딱 ─딱 ─딱

아침부터 이게 웬 소란인지, 딱따구리라도 여관 옆에 둥지를 튼 건지 창문을 내다보았다.

무겁고 뿌연 눈을 비비니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이 세계관에 금발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미의 기준을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부르려다가 어차피 일어날 생각이었으니 여관 뒤의 공터로 내려갔다.

“리….”

─딱

“리헤….”

─딱, 딱

“…….”

목검으로 나무토막을 연신 내려치는 바람에 내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린다. 막 일어났으니 목이 잠겨버린 통에 더 크게 부를 생각은 못 하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아?!”

“리헤로스, 새벽 댓바람부터 뭐해.”

“깜짝아. 언제 일어났어?”

땀에 젖은 모습은

“흐아암… 방금. 네가 워낙 소란을 떨어서 안 일어날 수가 있겠냐.”

“많이 시끄러웠구나. 미안, 네가 일어났으면 다른 투숙객들도 깼겠다.”

“왜 기준이 난데?”

“한 번 자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자잖아.”

“내가 언제?!”

“하하, 최근에 본 바로는 그랬어.”

“하… 뭔가 미묘한 게 짜증 나네.”

“근데 다행이라고 생각해.”

“왜?”

“너랑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땐 잘 안 잤던 거 기억나? 그때 엄청나게 걱정됐거든. 그래서 네가 못 자서 요즘 몰아서 자는 게 아닌가 싶어,”

“음… 그랬었지.”

리헤로스도 체감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몸으로 느끼는 바로는 못 잤던 잠을 몰아 잔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진짜 이 세계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니까.’

이걸 모두 오픈해서 논의했다간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일 테니 그냥 그렇다고 하는 것이 속 편했다.

“그보다 새벽 댓바람부터 나무를 패고 있던 이유는 뭔데. 벽난로도 없는데 장작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혹시… 화풀이? 역시 착한 성격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생물을 패며 속을 비워내는 건가?”

“아, 아니야. 무투대회 준비 틈틈이 해두려고, 그런데 시끄럽다니까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네.”

“모터대회… 신경 쓰고 있었냐?”

“하하…….”

이 게임의 성장 구조 상 이런 곳에서 조막만 한 나무토막을 뚝딱뚝딱 패는 걸로 경험치를 얻진 않으니 스킬북을 사서 배운다던가, 스탯 보상이 있는 퀘스트를 하는 게 나을 것으로 보였다.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요소가 없을까. 퀘스트는 딱히 없는 것 같고.’

“어? 그러고 보니 계약 무기 언제부터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된 거야?”

나와 만났을 땐 아예 계약 무기를 뽑아 들고 찾아왔으니 말이다. 뒤늦은 물음이었지만, 그 계기나 성장 방향을 알면 그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았다.

“너랑 헤어지고 난 이후에 다른 군단장을 조우했을 때 검이 뽑혔어.”

“무슨 계기나 마법서 없이?”

“응.”

“정말 알 수가 없네.”

역시 옆에 있었어야 어떻게 성장을 했고 해금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건데, 그의 말을 통해서만 들으려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더 자. 나는 다른 곳으로 가서 연습할게.”

“이미 다 깨워놓고 무슨 소리야? 같이 가.”

“같이?”

“응. 대련 상대해 줄게.”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고마워.”

“이런 거로 뭘. 네가 충분히 강해져서 이기면 나도 좋지. 주제도 모르고 드높아진 칼리고의 콧대가 꺾이는 걸 내 눈으로 봐야겠어.”

“열심히 할게.”

“아하하! 너무 심각하게 비장한 거 아니야? 힘 빼.”

아주 만약에 리헤로스가 특별 경기에서 지더라도 그가 힘에 밀려졌을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칼리고 쪽에서 더러운 수를 썼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럼 장소를 찾아볼까.”

일전에 페로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갔던 버러진 공원이 생각났다. 그에게 굳이 얘긴 하지 않고 공터를 찾는 척,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호기롭게 대련 상대해 준다곤 했지만, 별로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능력치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지, 원래부터가 완력으로는 리헤로스에게 완전히 밀렸었다. 그러니 대충 애들 칼싸움 같은 모습이 연출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곳이 있었네?”

“응, 일전에 너랑 헤어지고 길을 잃었을 때 봤었거든.”

“언제?”

“그 왜 있잖아. 네가 스피나… 이드랑제 백작이랑 처음 만났을 때, 카페 가는 길에.”

“아하, 그래서 늦었었어?”

“미안하다 그래.”

그의 손에 쥐고 있는 목검 한 자루를 빼앗아 떨어서 섰다.

“덤벼봐.”

“응, 최선을 다해서….”

“너무 진심으로 덤비진 마. 무섭거든.”

“그럼 적당히 할게.”

“근데 또 너무 적당히 하면 연습이 안 될 것 같은데… 아 몰라. 마음대로 해.”

“하하하, 알겠어. 근데 장검으로 괜찮아? 너는 단검을 더 잘 쓰는 것 같던데.”

“칼리고는 장검 쓸 거 아니야. 내가 단검을 쓰면 연습의 의미가 없지.”

“그렇구나. 알겠어.”

씨익 웃는 그의 미소는 참 달콤하기 짝이 없는데 검을 바로잡으며 웃음기가 싹 가신다.

‘그래. 저게 무섭다고.’

그와의 최종 결전이 생각나서 살이 떨렸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과거의 공포를 억누르고 검을 바로잡았다.

─딱!

내 쪽에서 먼저 달려들어 목검을 휘둘렀고, 리헤로스는 가볍게 막았다.

─따닥

곧바로 막힌 방향의 반대로 검을 돌려 옆구리를 노렸지만, 검은 금세 따라와 나의 궤도를 저지했다.

“빈틈이 없네.”

“아니야. 빨라서 따라가기 힘든데.”

“거짓말.”

─드드드득, 딱!

힘겨루기 하듯 검을 밀어내자 마찰하는 소리가 격정적이었다. 내 쪽이 눈에 띄게 밀려나고 있어 무게를 실어 힘껏 밀어낸 후 내려쳤고, 리헤로스는 뒤로 조금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칼리고라면 어떻게 할까?”

“글쎄, 그가 검을 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네 앞에 서면 엄청나게 흥분할 것 같지 않아?”

“경과 말싸움할 때엔 흥분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체면 때문에 엄청나게 참고 있는 거 보이지 않았어?”

평소엔 침착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할지라도 검을 들었을 땐 그 공격성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다.

검을 예측이 불가능 한 방향으로 마구잡이로 휘둘러대자 그의 행동이 조금은 버벅댔다.

“이렇게, 어느 궤도로 올지 모르는 공격은 좀 힘들지?”

“아, 조금 어렵네…!”

“아마 놈은 어떻게든 널 이겨 먹으려고 할 거야. 정직하게 부딪히지 않고 공격을 퍼부을걸.”

목검을 잘 막아오던 리헤로스의 허벅지 쪽에 빈틈이 보여 휘둘러 가격했다. 가볍게 휘둘렀지만,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인지 그는 조금 비틀댔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 걱정되어도 참았다.

‘이게 진검이었으면 심각한 부상이었을 테니까 대처할 수 있도록 계속 공격해야 해.’

약해지는 마음을 바로잡듯 검을 세워 그의 어깻죽지를 향해 곧게 내려쳤다.

─쩍!

순간 목검이 부서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파열음이었다. 비틀어진 자세인 상태에서도 버텨내는 검의 무게는 상당했다.

“너는 왜 공격 안 해? 계속 맞고만 있을 거야?”

“큿, 지켜보고… 있는 거야.”

“칼리고가 그걸 기다려줄 것 같냐. 봐주려고 하는 거면 대련의 의미가 없잖아?”

두 목검은 떨어졌다가 다시 맞붙었고, 마침내 리헤로스 쪽에서도 공격이 들어왔다. 그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과 찌르기 공격이 들어왔다.

‘와아, 미친…! 못 막을 것 같아.’

리헤로스처럼 검을 들어서 막을 생각은 못 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다. 몇 번이고 파고드는 공격을 피하던 중, 실제 칼리고라면 피할 리 만무했으니 대련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받아치려 했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그의 검을 막았다.

─쩌적

아까의 부딪힘으로 목검이 금이 가 있었던 모양인지 내 목검은 일격에 두 동강 나버렸다. 부서진 검을 지나 턱을 아슬아슬 스치는 바람에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윽!”

“앗, 조심해!”

당연하게도 나를 그냥 넘어지게 내버려 둘 리 없는 리헤로스가 팔을 잡아당겨 지탱해 주었다. 이번에는 함께 넘어지지 않고 버티나 싶었는데, 바닥이 흙과 자글자글한 돌조각이 많아 미끄러지고 만다.

‘이럴 줄 알았다.’

이쯤 되니 넘어지는 클리셰가 왜 나오지 않나 싶어 아쉬울 지경이었다. 흙먼지를 풀풀 풍기며 넘어지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어찌나 빠른지 내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

“크리스….”

“칼리고가 넘어져도 잡아줄 건 아니지?”

“뭐?”

“너라면 가능하겠는데.”

“절대 아니야.”

조금은 화내는 목소리에 가까운 완고한 그의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보조개인 줄 알았는데….”

“응?”

“네 오른쪽 뺨에 점이 있었네.”

“아, 그래? 딱히 신경 안 쓰고 있어서 몰랐어.”

내 말을 끝으로 정적이 길어졌고, 어쩐지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민망해서 이마를 타고 흐르는 애꿎은 땀방울만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미치겠다. 도망치고 싶다.’

분명 운동해서 심박이 빠른 것일 텐데도 다른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나중에 또 상대해 줄 거지?”

“뭐어… 할 것도 없고, 심심하니까 해줄게.”

“그럼, 아침 겸 점심 먹으러 가자.”

“그러고 보니 아침도 안 먹고 움직이고 있었구나. 내가 이 정도로 너한테 헌신하고 있었네.”

“고마워. 정말.”

“고마우면 밥 사.”

늘 돈을 내는 건 어차피 리헤로스 쪽이었지만 장난스레 생색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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