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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53화 (53/127)

53화

이 세계를 구한 영웅의 신변에 페널티라니 어이가 없다. 게임에서 주인공의 싸움에 동행자들이 가만히 있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인가. NPC의 시선으로 게임을 들여다보니 독특했다.

“검을 드시지요. 용사. 자고로 검사는 입으로 나불대지 않고 검으로 증명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킥킥킥.”

비아냥대는 말투는 기사도 정신이라곤 엿 팔아먹은 듯싶었다. 껄렁껄렁한 모습도 기사라기보다는 잡배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한심스러운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니 나를 배제한 채 전투에 돌입했다.

“히야아압!”

“간다!”

─탓타타타탓

요란스러운 기합 소리를 내며 기사들이 일제히 박차고 달려든다. 그것을 첫 신호탄으로 여긴 것처럼 리헤로스는 검을 뽑아 들었고, 곧바로 영창을 외었다.

“공형, 프로파티아!”

땅에서 솟아난 빛의 사슬이 기사단원들의 다리에 일제히 감긴다.

“크악!”

“이게 뭐야!”

달려들던 놈들은 급제동이 걸려 앞으로 자빠져서 턱이 깨지고, 가까스로 버티고 서있는 놈들은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사슬을 풀어내려 했다.

─카랑

리헤로스의 검은 기사단원 중 한 명의 검날을 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놓친 검은 힘없이 바닥에 꽂힌다.

다른 기사 단원은 땅을 푹푹 파내며 사슬이 솟아 나올 지면을 어그러트리니 속박에서 풀렸다.

비겁하게 뒤를 치려는 모습에 튀어 나가고 싶었지만, 다시금 시스템 메시지를 상기했다.

‘내가 암만 앞뒤 안 가리고 덤비는 스타일이긴 해도… 시스템 경고는 무시 못 하겠어.’

나에게 있어 시스템 메시지는 절대 신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뒤로 습격해오는 기사단원의 인기척을 느낀 리헤로스는 몸을 돌리더니 그 긴 다리를 뻗어 돌려차기한다.

“커헉…!”

기사의 가슴 정중앙에 명중하여 놈은 뒤로 데굴데굴 굴러 나가떨어진다.

한 치의 생채기도 용납하지 않은 리헤로스는 네 명의 기사를 순식간에 처리했다. 기사들은 제각기 고통에 찬 신음을 하며 바닥을 굴렀다.

“누가 시킨 것 같진 않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크읏….”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왜 우리 기사단을 무시하는 거야!”

“비겁하게 마법을 쓰면서! 네가 검사라 할 수 있냐!”

“듣자 듣자 하니까 열받네! 우리가 언제 기사단을 무시했어? 그리고 마법 쓸 수 있는 게 뭐가 비겁해? 너네도 배우던가!”

지켜보고 있다가 참다못해 앞으로 나와 꽥꽥 소리 질렀다.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했으면서 왜 덤터기를 씌우나. 우리의 행동 어디에서 기사단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쳤던 건지 미스터리였다.

“너희들이 이럴수록 기사단 이미지만 구려지는 거라고. 알아?!”

“치잇….”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고 누군가 고함을 친다.

“리헤로스!”

“다, 단장님!”

기사들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그를 반겼지만, 우리에겐 그다지 반갑지 않은 불청객 칼리고의 목소리였다. 갈색의 말을 타고 오는 흑발의 남성은 말이 멈추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리더니, 검을 뽑아 들어 리헤로스의 목에 겨눈다.

“주제넘게 설치는 걸 눈 감고 넘어가 줬더니, 이젠 내 기사들에게 손을 대?”

“그쪽에서 먼저 걸어온 싸움을 받아줬을 뿐이다.”

“건방지기 짝이 없군.”

“오늘의 무례는 어린 청년들의 치기로 넘어가 줄 테니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가.”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도 상황인데, 찰나 같던 짧은 대화 사이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헤로스가 반말하잖아?’

그 상대가 칼리고라 한들 어떤 무례에도 점잖게 존댓말을 사용하던 리헤로스가 어쩌다가 툭툭 내뱉게 됐지. 기사단에 갔던 오전에 무슨 사달이 벌어지긴 했나 보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하!”

잔뜩 흥분한 칼리고는 검 끝이 떨리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러다가 검집에 쑥 꽂아 넣으며 모든 사람이 듣게끔 목소리를 높였다.

“나 데반레르 델 칼리고. 용사 리헤로스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다!”

“단장님!”

“결투 신청을 받아들이지.”

“리헤로스! 쓸데없는 시간 낭비야.”

“누구의 서열이 위인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보여주마. 앞으론 건방진 입을 놀리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나 역시 바라던 바다.”

나는 더 말을 덧붙이거나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을 보면 그 누구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 따뜻한 노을과 상반되는 두 사람 사이의 차가운 공기는 한겨울이 벌써 찾아온 느낌과 흡사했다.

“로반! 이번 무투대회의 특별 경기 대진을 준비하도록.”

“넵, 단장님!”

“계약 무기니, 마법 무기니 비겁한 수를 쓸 수 없게 장비는 우리 쪽에서 준비한다.”

“이봐. 그렇게 되면 네 쪽이 무기에 비겁한 수를 쓸 수 있는 거 아니야?”

“칼리고 가문의 이름을 걸고, 공정의 신 에퀴칸도르께 맹세한다.”

“……좋다.”

“리헤로스…!”

저놈이 저리 단호하게 맹세해도 영 꺼림칙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러운 짓을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럼 무투대회에서 보지. 도망치지 마라 용사.”

“너야말로.”

냉소를 짓던 칼리고는 다시 말에 올라탔고 그 길로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던 옹기종기 인파도 한둘씩 사라지자 작게 한숨을 푸 뱉었다.

“시간 낭비라니까.”

“내 힘이… 무기에 의존해 강한 게 아닌 걸 증명할 거야.”

“아무리 네가 강하고 누구도 대항하지 못한다고 한들 칼리고에게 증명할 필욘 없어. 네가 증명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끝없이 요구할 거라고.”

더는 엮일 일없이 그들과 완전히 단절되길 바랐는데, 이러면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지 않나. 심히 피곤해졌다.

‘그나저나 저 새끼들 자꾸 나를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잖아. 그건 진짜 열받는데.’

용사의 정부니 밤 시중을 드네 따위의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답지 않게 참고 있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역시 리헤로스가 쥐어 패야 잠잠해질까 싶기도 했다. 아수라 백작처럼 오락가락하던 심기를 돌이켜보는데 꾹 다물고 있던 그의 입이 열린다.

“너와 나는 칼리고 말고도 할 일이 있잖아.”

“음… 착한 일 하는 거?”

“응, 칼리고가 계속해서 우리 일에 간섭하면 어려워질 테니까 끝장은 봐야지.”

“그것도 그렇네…….”

“이번 결투 이후로는 정말 끝일 거야.”

“…….”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잘할게.”

“하아아… 모르겠다. 그런다고 저놈이 열등감을 안 드러낼 성격도 아니고….”

정당하게 결투하면 주인공인 리헤로스가 이길 것은 불 보듯 뻔했지만, 불을 진압했다 싶으면 끈질기게 살아남은 불씨를 지펴대니 말이다.

이번의 대치는 나보다도 리헤로스가 더욱 심란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 그의 마음을 풀어줄 좋아할 것 하나 모른다는 게 민망해졌다.

‘난 정말 리헤로스에 대해 아는 게 쥐뿔도 없네.’

역시 빨리 그가 좋아하는 걸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함과 동시에 리헤로스에게서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수가….”

“왜? 무슨 일이야?!”

목소리는 떨림까지 느껴졌다. 불안감이 엄습해 주위를 살피는데, 리헤로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왕!”

“이 강아지 봐. 엄청 귀여워”

“…….”

“그렇지? 계속 우리 쪽을 보고 있었는데 다가와 주었네.”

“왜 사람 놀라게 하고 난리야?!”

“너무 귀여운 걸 보면 원래 그래.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어.”

“하아아아. 그래… 뭐, 귀엽네.”

“이것 봐. 손가락 핥는다. 배고프니?”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소시지 껍질을 까서 내민다. 강아지는 허겁지겁 먹어 치우더니 더 달라는 것처럼 리헤로스의 손에 앞발을 올렸다. 천진한 웃음을 보이는 그는 진실하게 행복해 보였다.

‘꼭… 지 닮은 거 좋아해요.’

루미 때도 그렇지만 갯과를 좋아하는 것 같다.

기존에도 주의 깊게 생각했다면 알 수 있을 정보였는데, 이전까지는 엔딩을 보는 데에 급급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잘 가.”

“소시지만 홀랑 먹고 가버리는 거야?”

“가족 가져다주려나 봐. 더 줄 게 없어서 미안한걸.”

“저 친구는 오늘 소시지를 득한 것만으로도 횡재일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착해 빠져서.”

“음….”

“왜 또?”

“너는 늘… 나를 착하게 봐주는 것 같아.”

“뭐? 사실이잖아. 보통 떠돌이 강아지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소시지도 헌납하고.”

“나 별로 안 착해.”

“최근 들은 말 중에 제일 말도 안 되는 것 중 베스트 1위야.”

진심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반면 리헤로스는 안 웃고 있었기에 입꼬리를 내렸다.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건지, 어떤 심각한 고민을 하는 건지 경청해 주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어?”

“…남자가 착하기만 하면 매력 없다며?”

“푸학!”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버린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누가… 누가 그래?”

“…….”

“아니… 누가 그랬는데? 푸하….”

“그냥… 지나가다가 들었어.”

“오호 그래?”

리헤로스는 일 아니면 훈련밖에 없는 스타일이었으니 가십거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의외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네.’

이 세계 어디에선가 나쁜 남자에 관한 토론이 오가고 있던 걸까. 현실을 떠올렸을 대에도 게임이나 미디어 콘텐츠에서는 인물이 날카롭고 싹수가 없을수록 수요가 있긴 했다.

“설마 그 얘기 듣고 착하기 싫어진 거야?”

“…….”

‘맞나 보네.’

“아니 너는 너만의 매력이 있는 거지 굳이 착하지 않다고 본성을 부정할 필욘….”

“칼리고 경 같은 스타일이 더 매력적이지 않아?”

“악! 뭐라고!!”

“깜짝이야.”

“그런 미친 인간이 뭐가 매력적이야?”

“조금은 참고하면 입체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했어.”

“너!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칼리고의 0.01%도 따라 하지 마! 알겠어?!”

“왜….”

“하지 말라면 제발 하지 마! 너랑 안 어울려!”

칼리고도 수려한 외모를 가졌지만, 더러운 성격 덕에 매력이 반감되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졌다. 반면, 리헤로스는 그 어느 곳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남자 아닌가.

“휴, 농담이래도 무섭다. 칼리고 같은 성격이 둘이나 있다면 신도 아, 이건 좀… 하면서 멸망 시킬 거야.”

“그래도 착하기만 하면 심심하고 재미없지 않아? 보통 그런다던데.”

“허어, 누가 그딴 헛소리를 지껄인 거야?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너는 착한 게 강점이니까.”

“맨날 바보라고 하면서.”

“그니까 바보라서 좋은 거야.”

‘너무 착해서 노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칼리고를 겪어봐야 그딴 헛소리를 안 하지.’

다정한 사람이야말로 곁에 있을 땐 모르지만 사라지면 빈자리가 매우 크다. 리헤로스 같은 부류의 캐릭터는 소중하다 못해 유니콘이라 무형문화재로 보존을 해야 마땅하다.

“…암. 그렇고말고”

“응? 무슨 생각 했어?”

“별거 아니야. 하여튼, 싸가지없는 건 매력적이지 않아. 그것도 적당해야지.”

착한 아이처럼 꼬박꼬박 답하던 리헤로스는 대뜸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뭔지 알 것 같아.”

“그렇지?”

“……톡톡대는 성격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

“말이 안 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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