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툭, 투툭
“하아, 헉… 헉….”
핏방울이 오른 눈에 들어가 흐릿했지만, 검에 꽂힌 건 내 목이 아니었다. 이렇게도 멀쩡히 호흡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두둑, 투두두둑
그의 팔뚝에 꽂힌 단검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의 기행에 놀라버린 바람에 검을 뽑아내었다. 그의 팔에선 피가 주르륵 타고 흘렀다.
“아… 윽…!”
“미쳤어?”
“훅, 후우우….”
“매번 무식하게 몸으로 막아대고!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제정신이냐고!”
생생한 혈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는 고통스러워도 미간만 일그러트릴 뿐, 나를 원망하는 눈빛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해?”
“내 목숨인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 꼬락서니나 봐, 무슨 짓을 한 건지!”
“…….”
“듣고 있어?!”
“이상하게도… 넌 내가 죽지 않길 바라지.”
“…….”
“맞지? 이전부터 쭉 그래왔어. 왜인진 모르겠지만… 으큭….”
“그게 이 상황에서 할 말이야? 정말 황당하다…. 욕이라도 하면 이해가 되겠어.”
“아니, 내가 죽지 않길 바라면서 네 목숨은 함부로 버리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잖아.”
“그럼 너는 왜 네 몸을 소중히 하지 않는데? 너는 무슨 이유가 있어? 나한테만 뭐라 그러는 건데.”
“네가 나를 지켜주려 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지키겠다고 말했었잖아.”
“…….”
아아, 그랬었지. 하지만 그건 형식상의 말일 줄 알았다. 말만 번지르르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갉아내면서까지 나를 지킬 필욘 없지 않은가.
가슴이 울렁거렸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보호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약속 지킨 거야.”
“이… 이 바보 멍청이가! 누가 그딴 걸 원한대?”
“으윽,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할게. 돌아가자.”
피가 줄줄 흐르는 쪽의 손을 힘겹게 들어선 내 뺨을 천천히 쓰다듬더니 결국 힘이 풀린 듯 어깨에 툭 내려놓는다.
“서로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는…그런 결말을 만들어보자.”
“뭐…?”
“제발…….”
그는 몸에 힘이 풀린 듯 무릎 한쪽이 굽혀진다. 그 탓에 얼굴이 가까워졌고 그의 눈동자를 피할 수 없었다.
천천히 내 몸을 끌어안았고, 나는 지금까지도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놓쳐버렸다. 댕그랑 울리는 소음 속에 터질 것만 같은 심장 박동 소리가 묻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크리스, 돌아가자….”
“하, 하아. 이게 무슨….”
“네가… 없으면 안 돼….”
─틱
울고 싶어졌다. 나를 진심으로 필요로 해주는 사람 아닌가. 그가 아무리 무식하게 몸을 던지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그 누가 내 목숨을 대신해 다치려고 선뜻 나설 수가 있을까.
─틱
마군의 원망을 들었을 때와는 달리 가슴이 펄펄 끓는 것같이 힘들었다.
─틱
흡사 용암이 줄줄 흘러내려 내 모든 장기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뜨거움 때문인지 눈시울도 붉어졌지만, 역시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띵
[시스템]
마왕 ‘아크리스’의 소셜 스탯이 UNLOCK 되었습니다.
[시스템]
던전 종료. 새로운 루트가 열렸습니다.
‘뭐라고?’
무어라 말을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 돌아간다니. 내가 이 위치에서 죽지 않고 용사와 함께 생존해서 나가도 되는 건가. 죽고 죽이지 않고 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 게 가능한가? RPG 게임 경력이 몇 년인데 그런 게임은 여태껏 본 적 없어 의아할 뿐이었다.
“야, 야! 일단 치료부터 해. 피를 너무 많이 쏟았어.”
“……아니.”
“듣고 있어?! 치료부터 하라고!”
“네가 수락해 주기 전까진…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여….”
데자뷰 아닌가. 그와 나의 역할이 반전된 상태였지만 말이다.
“미치겠네! 이 고집불통아!”
점점 말끝이 늘어지고 심박도 느려지는 것 같아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죽으면 안 돼. 리헤로스를 살리는 게 우선이야.’
내 쪽으로 무게가 반쯤 실린 그를 끌어안은 채, 포탈을 만들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수도 라이오펠의 골목길이었다. 새벽이지만 한둘씩 수레를 끌고 나와 장사 준비를 하는 상인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누가! 의원 좀 불러주세요!”
골목 밖으로 나와 불특정 다수에게 소리 질렀다.
***
“큰일 날 뻔했어요. 피를 꽤 많이 흘렸더군요.”
“지금은 괜찮나요?”
“긴급 수혈을 받고 상처는 봉합했습니다. 관통상이 아니어서 다행인데… 꽤 깊게 찔렸더군요.”
“하아아…. 다행이다.”
“용사님의 여정이 아주 힘들다는 것은 압니다만, 이리도 심한 상처를 입고 돌아오시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군요.”
응급조치하지 못할 거라면 검을 뽑지라도 말았어야 했는데 대처를 잘못했다. 심지어 내 멋대로 상황을 만들려다가 다쳤던 거였기에 죄책감에 고개를 떨궜다.
“면회는 병실을 옮기고 나서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수도의 큰 병원이기에 망정이었다. 사람이 없는 복도 벽에 기대었고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리듯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분명 새로운 루트가 열렸다고 했다. 그럼 정말 리헤로스의 말대로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는 걸까.
‘시스템 알림이 뜬 걸 보니, 허황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리헤로스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정말 맞을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엔딩이 나는데,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곳이 없어 그저 걷고 싶어졌다. 굵은 기둥이 늘어서 있는 병원의 앞 마당으로 나왔다. 매우 이른 시간이었기에 이곳도 사람의 왕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루트가 열림과 동시에 소셜 스탯이 해금됐다고 하지 않았나.’
큰 고목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아 스탯 창을 열어보았다.
[캐릭터 정보]
공개 이름: 아크리스
히든 이름: 없음
직업: ???
성별: 남
나이: ???
거주지: 없음
[전투 스탯]
공격력: 9734
방어력: 9536
회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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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스탯]
우호도: 친밀함(80)
“미친. 잠깐, 잠깐…! 이게 다 뭐야?”
초창기에 빙의 되었을 때 봤던 정보 창과 확연히 달랐다. 너무나도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기본 정보는 물론이고 전투 스탯은 전체적으로 한 자릿수가 줄어들었다. 갑작스러운 너프에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마왕이 아니게 되어서 그런가? 그럼 난 뭐야? 뭐가 된 거야?’
심지어 우호도는 스피나보다 월등히 높은 우호도 80이었다. 내 생각보다 리헤로스를 매우 신임하고 있던 모양이다.
‘X발… 나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 수치를 리헤로스에게 들켰다면 수치스러워 죽었을 것이다. 머리를 잔뜩 헝클이던 중, 울타리 너머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자연스럽게 바깥쪽을 내다보니 마을 주민 NPC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용사님이 돌아오셨대.”
“소문에 의하면 마왕이 사라졌다고 하던데?”
“죽은 게 아니라 사라졌다고?”
“응, 마지막에 합류한 기사단이 찾아갔을 땐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대.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더라.”
“대단한데? 그럼 평화가 찾아온 거 아니야? 경사 났군.”
“용사께서 병상에 누워계실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으니 그런 거 아니겠어.”
병상에 누워있는 이유가 마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용사가 다친 걸 알면 가만두지 않겠지.
‘괜히 나왔다가 기분만 더 안 좋아졌어.’
다시 얌전히 병원 내부로 들어왔다.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러 세웠다.
“죄송한데, 리헤로스의 병실은 옮겨졌나요?”
“네, 방금 옮겨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중환자실에 가실 정돈 아니시긴 한데 신변이 중요한 분이시라고 해서 1인실로 모셨어요. 복도 끝에서 왼쪽으로 가시면 세 번째 방이에요.”
“감사합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병실 앞까지 느직느직 게으름 피우듯 걸었다. 병실 앞에 도착했지만,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건만 그와 계속 여정을 보내야 하는 건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어… 근데 도망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야.’
길게 한숨을 뱉으며 병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조용히 몸을 뉘고 있는 그는 한결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자를 끌어다 그의 침대 옆에 앉았다.
‘뭘 어쩔 셈이야?’
마왕이 살아 있단 사실을 알면 대륙의 백성들이 공포에 떨 것 아닌가. 녹틸처럼 어느 외진 곳에 전원생활을 할 게 아니라면 언젠가 들통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까.
“으음….”
“…….”
“크리…스.”
“눈 뜬 거 봤으니까 난 갈게.”
갈 곳 없다고 막막해한 주제에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뇌를 거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오는 충동적인 말들이 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그의 반응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다.
“가지 마….”
“그럼 내가 여기 남아서 뭘 해? 네 수발이라도 하랴? 간병인 필요해서 데려왔냐?”
“나 이제… 안 아파.”
그는 내 말에 상체를 벌떡 일으킨다. 여전히 왼쪽 팔엔 힘을 못 주고 툭 내려놓은 채였다.
“큰 실수한 거야. 날 살려두다니. 내가 언제 뒤통수를 칠 줄 알고 이래?”
“거짓말. 넌 날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잖아. 지금도 그랬고.”
“하, 또 그 소리.”
더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침구의 삐걱거리는 스프링 소리가 들렸고, 내 몸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줘.”
“…….”
그의 품 안에 갇혀 바보처럼 멀거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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