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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49화 (49/127)

49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는 밀어내도 끝까지 다가와 징그러울 정도로 들러붙는 사내였는데, 현재는 그 공식이 완전히 깨졌다. 심적으로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우린 멀리 떨어진 채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마족을 통솔하는 네 잘못이 전혀 없다곤 말하지 않겠어.”

“잘 알고 왔군.”

“하지만 날 기만한 건 아니었잖아.”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일전에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때, 돌아가자고 애원하던 모습과 달리 많이 침착해진 것 같았다. 리헤로스가 아무리 착하다고 한들 그도 사람이니 이해는 됐다.

‘몸이 멀어지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거 맞지.’

그럴 의도로 그때의 긴급 퀘스트를 회피했으니 말이다. 기획 의도대로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한 편으로는 안심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난 너를 이용했어.”

이것만큼은 사실이지 않나. 그를 이용해서 집으로 돌아갈 궁리만 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그에게 유대감을 느끼긴 했지만, 지금의 싸움에서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말이라 꾹 삼켰다.

“…….”

“싸우러 왔으면 덤벼.”

“싸우지 않으면, 그때처럼 또 도망갈 거야?”

“많이 컸네, 도발까지 하신다? 어쩔 수 없지.”

아무리 거리가 멀어졌대도 그는 여전히 싸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들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싶어 생성해냈다.

“아스타테.”

─키잉

마법으로 만든 검푸른 색의 창을 붕붕 돌리며 굳은 손목을 풀었고, 그도 몸을 조금 낮추며 나의 공격을 받아칠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먼저 안 덤빌 건가?”

“그래.”

“선량한 용사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나쁜 사람으로 만드네…. 하지만 기회는 감사히 받아 가지.”

어쩔 수 없이 내 쪽에서 먼저 공격했다. 그의 앞으로 날렵하게 이동하여 창의 날로 옆구리 쪽을 베어 올렸다.

─카각

당연하지만 리헤로스는 뛰어난 반사 신경을 자랑하며 재빨리 검으로 막았다. 이깟 허접한 공격에 당하지 않는다.

막아낸 검은 금속음조차 울리지 않는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가 사용하던 이드랑제의 검이 아니었다. 검 푸른색의 창과 대조되는 붉은색으로 장식된 백금색의 검신이 낯익었다.

‘계약 무기잖아?’

그와 헤어질 때만 해도 계약 무기를 뽑아 들지 못했는데 완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나 없이도 차근차근 발전해 온 그의 모습에 뭉클해지려는 걸 시비조의 말을 던져 무마했다.

“이제 무기도 못 뽑던 애송이 용사가 아니다 이거지?”

“크리스…!”

“그렇게 부르지 마!”

─캉!

반대 방향으로 손목을 회전하며 그의 검을 튕겨냈다.

창날의 반대 부분의 뭉툭한 부분으로 그의 어깻죽지 쪽을 찌르듯 가격하려 했지만,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속속히 피해 다녔다.

“피하기만 할 셈이냐!”

연속 동작으로 찌르기를 멈추고 창을 돌려가며 그에게 접근했다. 관성의 힘이 실리니 그것을 막는 리헤로스의 묵직한 검도 한두 번씩 흔들리기도 했다.

그가 많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지는 건, 그거였다. 빈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빈틈이 많다면 그쪽으로 파고들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얕은 공격만 퍼부었을 텐데, 어디를 베어야 할지 어디를 찔러야 할지 감이 안 잡히니 계속해서 애꿎은 검만 두드리고 있다.

‘답답해도 어쩔 수 없어.’

리헤로스가 행여라도 나에 의해 상처를 입으면 큰일이니까. 용사를 잃은 선대 마왕의 꼴이 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금 지하로 내려가 독약을 원샷 해야 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책임감을 가지고 현재의 마왕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치더라도 회복이 쉽고 전투에도 크게 지장이 없을 만한 팔이나 다리를 노리며 휘둘렀다.

─키잉, 캉!

“윽!”

베어 올리고 내려찍고 찌르기를 반복했다. 일반 NPC들과 달리 나는 쉴 새 없이 공격을 몰아쳐도 지치지 않았다.

“내가 지칠 것을 기다린다면 소용없어.”

“…….”

“가엾게도 정곡을 찔린 표정인데? 한 종족을 군림하는 마왕이 진이 빠져 공격을 멈출 리가 없잖아.”

─쨍

창과 검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시 맞붙었다.

─드그그, 드그극가가각

양쪽의 밀어내는 힘으로 인해 서로의 무기의 이음새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쪽도 밀리지 않는 힘겨루기에 가까웠다.

“이래도 내가 네 친구 ‘크리스’ 같나?”

“하아… 하….”

“하하하, 하잘것없는 정에 취해서 공격하지 못하는 네 꼴을 봐. 얼마나 우스운지.”

“큭….”

“내가 노린 게 이거야. 네 마음이 약해지길 바라면서 그 고생을 한 거라고. 알아들어?”

“…….”

“내가 너의 약점이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자극할 만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의를 불태워야 한다. 그가 맹신하는 우정에 대해 모욕을 하니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게 네 진심이야?”

“그래.”

대답을 듣자마자 리헤로스의 새파란 눈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겼구나.’

─쩡!

“쥬바르메─ 조형, 사긱스!”

영창을 외치고 난 리헤로스의 전신에 금빛 오러가 감쌌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어디에….”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코앞에 와있었다. 그는 금빛을 두른 검을 쥐고 돌리더니 힘차게 휘둘렀다.

“윽!”

급하게 창의 손잡이 중간 부분으로 막았다. 그의 검기를 버티지 못한 창이 힘없이 두 동강 나버린다. 창의 날 부분이 있는 반쪽만을 남기고 던졌다. 근접한 리헤로스의 얼굴을 향해 찌르니 머리카락만 조금 스쳐 금사 같은 가닥가닥이 공중에 흩날린다.

찌르기 공격은 예상치 못했는지 잠시 물러난다. 그렇다고 해도 이전의 망설이는 행동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다시금 자세를 잡고 부딪혀 왔다.

“아스타테!”

부러진 창 조각을 던져 버리고 새로운 창을 꺼내 들었다. 몇 번의 충돌 후, 다시금 그의 검에 의해 부러지고 만다.

‘젠장, 이래서는 끝이 없잖아.’

나 홀로 고전했고, 리헤로스의 금빛의 오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했다. 그 빛은 태양 가까이에 날아오른 나를 불태울 것만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공형, 프로파티아!”

그의 기술은 셀 수 없이 많아져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영창문에 손을 못 쓰고 있으니 내 사지가 금색 사슬에 의해 속박된다.

“아윽…! 젠장!”

빠르게 검을 쥐고 다가오는 모습이 두려웠다. 그에게만 스킬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본능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영창했다.

“엔스!!”

팔다리를 묶고 있던 빛의 사슬은 힘없이 끊어졌지만, 워낙 겁에 질려 영창을 한 영향 때문인지 파장 그에게까지 닿을 것 같았다.

‘안 돼!’

왕좌의 방 전체를 칠흑같이 어두운 기운으로 터져나갔다. 묵직한 샹들리에도 하나둘씩 끊어져 떨어졌고 그 사이에 있는 리헤로스가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다.

“조형, 그레이스!”

망설이던 그는 또 다른 주문을 외웠고, 눈부신 금빛의 검기는 나의 검푸른 파장을 가를 듯이 대치하고 있었다.

─콰가가가가가가!

성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처럼 세차게 진동했다. 맞붙은 두 개의 기운은 섞이지 못하고 치열하게 밀어내다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콰아아앙!

폭발로 인해 발코니로 쭉 미끄러져 난간에 부딪혔다.

“윽…!”

강하다. 리헤로스는 적당히 봐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해졌다. 내 판단은 심히 오만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됐다. 그냥 이대로 끝내길 바랐다.

“하아… 아… 윽….”

발코니의 난간을 짚고 몸을 세웠다. 심하게 아프진 않았지만, 폭발 직후에 이명,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처럼 몸을 가누는 게 힘들었다.

무거워진 머리를 들어 올리자 상체는 뒤로 크게 기울었고 발코니 밖의 매서운 바람이 느껴졌다. 딱 달라붙어 있을 것 같던 발이 공중에 붕 떠서 체중이 완전히 뒤로 실려버린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죽음을 문턱 앞에 둔 상황에서도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낙사로 인한 사망은 그의 명예에 그다지 좋지 못하지 않은가. 이왕이면 그의 검에 의해 최후를 맞는 것이 마왕의 처지에서도 좋을 거로 생각했다.

“크리스!”

낙하 직전에 제동이 걸려 덜커덩 멈춰 섰다. 찬바람을 맞아서일까 아득한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리헤로스의 왼손은 나의 오른팔을 단단히 잡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발코니 난간에 검을 박아 넣어 지탱하고 있었다.

“날… 구했어?”

“크읏…!”

“왜…?”

반쯤 누워있던 상체를 당겨 일으켜주었고 허리에 힘이 들어가 난간에 기댈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정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차라리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오늘따라 수다스레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죽이기로 마음먹은 거 아니었어? 그럴 거면 빨리 죽여. 이왕이면 안 아프게.”

비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프지 않게 죽여달라는 것은 100% 진심이었다. 그의 미간은 깊게 구겨졌고, 어금니를 꽉 문 것처럼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왜 너를 희생하려 해?”

“내가… 희생을 해? 아직도 그런 허상을 믿고 있다니, 진짜 바보 아니야?”

“그렇다면 왜 마법을 쓰지 않았는데?”

“뭐….”

“너는 검술이나 창술보다 마법을 잘 쓰잖아. 왜 적당히 봐준 건데? 네 태도와 말이 다른데 내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

“적당히 봐준 거 아니야. 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넌 이긴 거고.”

“그만해. 더 이상 속이지 마.”

“내가 뭘 속이고 있다는 거야!”

“돌아가자.”

또 그 얘기다. 돌아가자니 대체 어딜 돌아가자는 건가. 내가 있을 곳은 게헤나뿐이 없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푸하하하… 어린애처럼 떼써도 소용없어.”

“난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웃기지 마. 넌 이해 못 해.”

나는 이 세계에 빙의한 다른 차원의 인간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군을 절멸할 너를 도왔다고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하지 않은가. 이 세계의 사람뿐만 아니라 어딜 가도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말이다.

“이제 지쳤어. 날 죽이고 승전고를 울리러 가…. 그만 죽이라고.”

“그게 무엇이든…! 혼자 앓고 있지 말고 내게 말해주지 그랬어.”

“듣기 싫다고!”

“돌아가자…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딴 거 없어. 난 널 우롱한 거야.”

“크리스, 제발 나를 믿어줘.”

“진짜… 못 들어주겠네! 죽이지 않을 거면 부탁이니까 꺼져!”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그럴수록 리헤로스가 잡은 손에 힘이 붙어 조여 들어왔다.

“아아…! 이거 놔!”

“움직이면 위험해!”

“내가 위험하든 말든 너랑 상관없잖아!”

“왜 그렇게 말을 해. 내가… 내가 얼마나…!”

리헤로스는 비보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이내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던 중, 그의 허벅지에 꽂힌 단검이 눈에 띄었다.

‘내가 두고 왔던 단검이잖아.’

이드랑제 대장간에서 받았던, 그와 헤어지기 직전에 떨어트려 놓고 줍지도 않은 단검이었다. 저걸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떤 깊은 뜻으로 가지고 있는 건 아닐 거야. 그저 단검이 필요했겠지.’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잡았고 그와 동시에 한 가지 번뜩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잡아.’

‘잡아라.’

생각에 잠긴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리헤로스도 꽉 붙들고 있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얘기해 줄 마음이 생긴 거야?”

“…….”

“크리스…?”

“아니.”

나는 순식간에 그의 허벅지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 목을 겨누었고,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생기기 전에 힘껏 내리꽂았다.

─부드득

검이 살갗을 찢고 파고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튀어 오른 선혈은 뺨 위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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