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주인니임!!”
“깜짝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귀청 떨어지겠네.”
“밤새 어디 계셨어요! ”
“네가 말해줬던 마경을 좀 들여다보았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어느새 자고 있더라.”
“사라져버리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미, 미안해…!”
나만 페로를 의지하는 게 아니라 페로도 나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 것 같다.
‘의지라기보다는 분리불안에 가깝지 않나 싶긴 해.’
“주인님이 깊게 잠들기 전에도 지금이랑 비슷하셨던 말이에요.”
“몇 달 전에 말이지?”
“네에. 늘 자신감 넘치고 무던한 주인님이셨는데 갑자기 어디로 오랜 시간 사라지시더니 왕좌에 앉아 오래 주무셨죠. 그러니까… 불안해서요. 지금은 주인님을 지켜드릴 마군도 없는 실정이라.”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다신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정말이죠? 저 너무 불안하다고요.”
“응. 용사가 날 만나러 오기 전까진 그럴 일 없어.”
꿋꿋하게 홀로서기를 시작한 리헤로스를 보고 나서 다짐했다. 선대 마왕처럼 실패하지 않을 거다. 반드시 리헤로스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이 스토리를 원래대로 돌릴 계획이다.
‘내가 이 세계에 질까 보냐. 어떻게든 성공해낼 거야.’
그와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 정도 진정되고 이성을 다잡을 수 있었다.
“용사가 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건 잘 모르겠네. 어차피 언젠가 다가올 일인데 미리 생각하지 말자.”
이 어린 박쥐에게 RPG 게임은 마왕이 죽어야 끝난단다, 라고 설명하면 충격받을 것이 뻔하니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그때까지 뭐 할까.”
“주인님이 하실 일 말씀이신가요?”
“아니, 너랑 나랑 특별한 추억 하나 못 쌓았잖아. 어차피 용사가 오기 전까지 할 일도 없는 것 같으니 그전까지 뭘 할까 싶은 거지.”
내 말에 페로의 큰 눈망울은 별이 한가득 쏟아진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주인님과의 추억… 너무 좋아요! 가슴 설레는 문장이에요!”
“좋다면 다행인데, 여기는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딱히 없는 것 같아.”
“여가 생활이 뭔가요? 인간 세계의 문화예요?”
“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휴양 시설 같은 게 구비되어 있어서 물장구치고 놀다가 모래 속에서 몸을 묻고 편안히 쉰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마계에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페로는 고갤 크게 끄덕이며 날갯짓했다.
“비슷한 게 있어요! 말로만 들었을 땐 주인님이 원하시는 거랑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정말? 의외네. 전혀 없을 줄 알았어.”
“헤헷 게헤나엔 없는 게 없죠. 절 따라오세요!”
페로가 높은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포탈로 따라오라는 이야기였나 보다. 페로를 떠올리며 포탈을 만들어 들어가자 처음으로 게헤나의 실외 풍경을 경험하게 되었다.
“분명 물이랑 모래가 있긴 한데….”
구정물같이 검고 어두운 바닷물이 해변을 철썩철썩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고, 알갱이가 굵은 모래사장에 해골바가지들이 박혀있어 음산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어때요? 말씀하신 거랑 꽤 비슷하죠? 모래 속에 파묻혀있는 것도 같고요.”
“…다른 걸 하자.”
“네에? 이게 아니에요?”
“맞긴 한데… 아니야. 다른 거 하자.”
“네에에….”
실망한 페로에겐 미안했지만, 이곳에서 물놀이를 즐겼다간 추억이 아니라 악몽이 만들어질 것만 같았다.
***
“자, 어서 뽑아봐.”
“끄으응.”
푸른 불꽃이 켜져 있는 랜턴을 사이로 마주 보고 앉았다. 페로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에는 트럼프 카드가 널브러져 있고 우리는 각각 일곱 장, 여섯 장의 트럼프 카드를 들고 있었다. 페로는 내가 쥐고 있는 카드 중 한 장을 신중하게 골라잡는다.
“끄애앵! 조커다!”
“아하하하하! 나의 포커페이스에 걸렸구나!”
저 작디작은 손으로 카드 뭉치를 어떻게 쥐고 있는 건지 신기했는데 섞기도 꽤 능숙하게 섞는다.
“처음 해보는 거 맞지?”
“당연하죠! 그러니까 지금 지고 있잖아요!”
“아하하, 그래그래. 너무 화내지 마.”
“흥, 이제 주인님이 뽑을 차례예요!”
완벽하게 섞고 정갈하게 펼친 카드 뒷면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손을 들어 페로의 카드 덱 위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페로의 눈썹 근육이 씰룩댄다.
‘표정에서 드러나니까 모르는 척해 주려고 해도 어렵네.’
생애 첫 카드 게임이 패배인 것으로 인해 흥미를 잃지 않았으면 했었다. 초심자의 행운을 경험시켜줘야겠다 싶어 조커로 추측되는 쪽을 뽑았다.
“아자!”
“이런, 조커였잖아.”
“저도 표정 관리 꽤 잘했죠? 이제 어떻게 하는지 감 잡았어요.”
“정말? 대단한데. 도둑잡기 장인이 되겠어.”
“에헤헤, 그 정돈 아녜요.”
쑥스러워하며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배시시 웃는다. 이렇게 천진한 대상과 아무런 보상 없이 순수하게 놀이를 즐기는 건 오랜만이라 나도 덩달아 마음이 환기되었다.
결국 내가 조커를 손에 쥔 채 게임은 마무리되었다. 페로는 신나서 방방 뛰며 승리를 자축한다.
“여가 생활이 이런 거군요? 재밌어요!”
“이것만 있는 건 아닌데, 더 생각나는 게 생기면 알려줄게.”
“좋아요. 주인님이랑 같이해서 더 즐거워요!”
“귀찮을 정도로 계속 같이하자고 조르는 거 아니지? 다음엔 너 혼자 해도 재밌는 걸 준비해 봐야겠네.”
“같이 추억 만들자면서요! 튕기시긴!”
게임은 종료됐지만, 진행하면서 재밌었던 상황을 곱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페로는 표정에서도 드러나는데 날개 달린 팔을 휘젓거나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는 제스처들로 더 파악이 쉬웠다.
‘진짜 재밌었나 보네. 다행이다.’
늘 부리기만 했지 페로처럼 가까이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존재에 대한 감사를 느끼지 않았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나의 엔딩 전까지 녀석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라, 이제 침소에 드실 시간이에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가봐야겠다.”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또 놀아요. 내일은 더 전략적으로 운용을 해보겠어요!”
“그래. 그러자.”
은신처로 떠나는 녀석을 지켜보다가 다시금 첨탑으로 향했다. 머릿속 한편에는 리헤로스의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계속 궁금했었다.
‘처음에는 계단 오르는 게 불편하고 포탈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한다면 단번에 이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를 수 있겠지만,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유일하게 계단을 오르는 행위를 남겨둘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대 마왕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대감으로 이곳을 올랐을지 알 것 같아.’
용사와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감정을 되새김질했겠지.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일기의 묘사가 생생한 이유일 것이다.
낡은 문을 열어젖히고 자연스럽게 마경 앞에 앉았다.
“리헤로스를 보여줘.”
오늘은 어떤 일상을 보냈을까. 흡사 스토킹 행위임에도 어쩐지 거리낌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가 잘하고 있는지 관찰하는 차원에서 하는 거라고 자신을 스스로 이해시켰다.
일반 거울과도 같이 나를 비추던 마경은 어지러운 무지갯빛이 울렁이더니 서서히 금발의 남성이 떠올랐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그의 팔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관찰하지 못한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거울의 한정적인 정보로는 자세히 알기 어려웠지만, 그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다.
“하아아… 미치겠다.”
그의 상태를 가까이에서 살피기 전까진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뿐만 아니라 그가 회복될 때까지 말이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번뇌를 하다가 결심했다.
‘페로가 알면 기겁할 테니까… 조용히 상태만 살피고 오는 거야.’
마경에 들어갈 사람처럼 코를 박고 그가 잠드는지 보았다. 리헤로스는 상처가 꽤 고통스러운 모양인지 불편한 자세로 한참 뒤적이다가 이윽고 움직임이 잦아들고 잠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포탈을 열었다.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으로 보내줘.’
─달그락
“헙.”
포탈을 빠져나오자마자 얇은 벽돌들이 발 가에 채인다.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하여 주위를 살폈다. 켜켜이 쌓인 벽돌들 옆, 까마득히 아래에 지면이 보였다.
‘조용히 눈에 안 띄는 스팟이라곤 해도 지붕에 떨굴 줄은.’
매우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의 2층짜리 여관으로 보였다. 지붕 아래로 내려다보니 창가에 리헤로스의 자는 얼굴이 보였다.
‘진짜 스토커 같네.’
제 행동이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알곤 있지만, 이게 다 이 세계를 위한 것이라는 합리화를 마치고 작은 발코니로 사뿐히 내려왔다. 천천히 소리를 죽이듯 창문을 열었고 살금살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태껏 봐왔던 리헤로스의 숨소리는 새근새근이라는 묘사가 어울릴 정도로 조용한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잡음이 섞인 색색에 가까웠다.
‘어디가 그렇게 아프길래.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팔에 감긴 붕대를 조심스레 풀어보았다. 깊은 열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회복이 안 될 정도의 심한 상처는 아니어서 며칠 쉬면 될 것 같았다. 침대맡에 간이 테이블에 약이 있는 걸 보니 다행히 의원에게 진찰받은 듯했다.
‘이 녀석은 주위에 누군가 있으면 오히려 내색을 안 하는 스타일 같아.’
혼자 있으니 아픈 표정이나 숨소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게 분명했다. 함께 여정을 했을 때도 그의 고통에 찬 신음을 들은 게 얼마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해보면 말이다.
‘미련하게… 그러니까 더 미안해지잖아.’
충동적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크리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예상치도 못한 말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설마 아직 잠들지 않았던 건가? 온몸이 굳어버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