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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45화 (45/127)

45화

손가락만 한 푸른 불꽃이 흔들리는 랜턴을 들고 마왕성을 거닐었다.

‘포탈로는 못 가니 이렇게 일일이 찾으러 가는 수밖에….’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포탈을 열어 이동해 보려 했는데 이동할 수 없다는 경고가 처음으로 떴었다. 포탈로 이동할 수 없는 장벽이 있다던가 다른 페널티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낡고 작은 문, 나선형 상승 계단. 이 단서를 조합해 보면 한 가지뿐이긴 했다.

‘작은 첨탑 같았으니 최대한 높은 곳을 찾아보면 된다.’

“여기다!”

확실했다. 꿈에서 본 이미지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어 비교하기가 수월했다.

─끼이익

문을 조심스레 열자 모래 폭풍에 가깝게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콜록콜록! 꿈에선 먼지가 이렇게 많지 않았잖아…. 사기꾼!”

누군지는 몰라도 꿈속 형상을 보여준 미지의 인물에게 말하듯 소리쳤다.

막연하게 꿈에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상당히 높아 보이는 첨탑이었다. 계단 꼭대기의 끝이 까마득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포탈도 사용하지 못하게 순수 노동으로 오게 했으면…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

체력 조절해서 천천히 올랐을 때, 근육량 부족인 마왕의 몸으론 편도 30분 가까이 걸리는 것 같았다. 이래서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체력을 길러야 한다.

“허억… 헉… 이 문… 이 안은 못 봤었지.”

문에는 드래곤 머리가 달린 푸른색의 빗장이 걸려있었는데 빼내려고 하기도 전에 스르륵 빠져나왔다. 마왕만이 열 수 있는 특수 잠금장치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뭘 숨겨두었길래 철통 보안이야?”

모든 물건 위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있어 온통 회색의 솜털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을 일으키는 스킬 같은 거 없나?”

녹틸처럼 물건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고차원의 마법은 사용할 줄 모르니 적당히 먼지만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보유 스킬]

엔스 | 일반 | 쿨타임 40초

- 시전자를 중심으로 강한 기를 발산한다.

[발동 조건: 제스처를 사용하여 스킬 시전]

‘이 정도면 괜찮겠지?’

간단하게 펼친 손을 쥐는 모양새로 제스처를 등록한 뒤, 곧장 사용해 보았다.

─콰앙!

온갖 물건들이 공중에 띄워질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발산되었다. 덕분에 가라앉은 먼지가 모두 공중에 띄워지긴 했으니 성공적이라고 해둔다. 창문을 열어 공기 순환을 시도했다.

“콜록! 콜록!”

바람을 타고 떠나는 대형 먼지들은 기쁜 마음으로 배웅해 주었다.

“이게 웬 난리야…. 그냥 맨손으로 청소할걸.”

바닥에 떨어진 온갖 잡구들을 주워 책장과 테이블에 올려 정리했다. 유독 눈에 띄게 활짝 펼쳐진 양장본 하나를 주워들었다.

‘수기로 쓰인 일기… 같은데.’

첫 페이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 살과 피로 빚은 아이들은 강하다. 그 누가 와도 지지 않는다. 앞으로도 마군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기적인 인간을 쓸어버리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될 것이다.

‘마왕의 일기인가. 신기하네… 일기도 쓰는구나.’

선대 마왕의 존재는 미스터리하기 그지없었는데 기록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일기를 넘기며 소파에 앉아 본격적으로 읽을 자세를 취했다.

마족이 세운 신세계는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칭송하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수많은 모험가의 도전에도 죽지 않는다. 무적 군단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RPG 세계의 아주 지극히 평범한 빌런이라면 가지고 있는 자의식 과잉이었다.

‘보통이면 이러다가 본인보다 강한 선의의 존재에게 열등감을 품고 증오하지.’

5군 단장이 죽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더 강력한 주술을 심어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보다 더한걸….

이 뒷부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주술의 조합식을 써둔 것 같았다. 선대 마왕은 마군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 연구에 몰두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다.

‘선대 마왕도 딱히 나서서 싸우진 않았네. 어쩐지 근육량이 적더라.’

군단을 키우기 전에 본인 몸이나 키울 것이지. 툭하면 넘어지고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 일쑤여서 원망스러웠다. 마왕이라 하면 보통 마초적인 이미지가 강하지 않나. 프렉탈 시나리오 라이터는 정통 클리셰는 좋아하면서도 설정은 비튼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말도 안 돼. 점점 마군을 파훼하는 무리가 나타난다. 건방지게도. 그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주술식으로는 부족하다. 물리적 훈련도 강행할 것이다….

이후로 잔뜩 흥분해서 갈겼는지 미지의 꼬부랑글씨를 한참 들여보다가 포기하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어느 집념 강한 용사가 나타났다.

“어…? 마왕이 용사를 만났었어?”

처음 알리엔토 대륙에 도착했을 당시, 용사가 전혀 나타나질 않아 마왕이 기약 없는 잠에 빠진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쉴 새 없이 죽고 또 죽어도 그는 되살아나 나의 마군에게 대항했다.

인간을 그렇게까지 보호할 의미는 없을 텐데 무슨 생각인지 그가 궁금해졌다.

나는 신분을 숨기고 용사에게 접근했다.

나와는 계기가 조금 다르지만, 신분을 숨기고 접근했다는 것은 비슷한 맥락이었다. 짜 맞춘 평행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마왕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 어리석기는, 이놈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샅샅이 파낸 다음 그것을 이용해 정신 세뇌를 할 예정이다.

맛있지도 않은 지상의 음식을 권한다. 역겹다. 이런 열등한 생물의 음식을 먹을까 보냐.

자존심이 강한 자아였다. 게헤나는 비옥한 땅이 있는 것도, 보기 좋은 과실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지상의 음식이 훨씬 더 맛있을 텐데.

진흙을 굳힌 듯한 생김새의 먹을 것을 받았다. 등쌀에 못 이겨 눈을 질끈 감고 맛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해가 뜨자마자 그에게 어제 먹었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피칸 파이라고 했다.

마지막 문장 뒤에는 ‘또 먹고 싶다.’라고 썼다가 죽죽 그은 흔적이 보였다.

“푸핫.”

사회성 부족한 히키코모리의 성장일기를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성격이 이상해도 저 정도는 아니지, 하는 위안을 삼았다.

용사가 지나온 길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모두 즐거워 보인다.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할지….

이 페이지 다음에는 속지가 약 스무 장가량이 찢겨있었다. 지저분하게 찢긴 형태로 가늠할 수 있었다.

‘대체 뭘 숨긴 거야?’

어딘가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별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용사가 죽었다.

“…….”

단 한 페이지에 이 문장 하나만이 적혀있었다. 마침표 뒤엔 무언갈 더 적으려다가 만 것처럼 꾹 누른 듯이 잉크가 번져있었다.

이 문장에 대한 의문을 던질 생각도 없이 바로 다음 장을 넘겼다.

악신 카르말록스께 물었다. 용사가 왜 되살아나지 않느냐고.

내 정체를 깨달은 용사는 생존과 정의의 의지가 사라진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카르말록스 께선 나를 칭찬하셨다. 그런데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원망했을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처음부터 그를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나 역시 아무런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대체 찢긴 20여 페이지 동안 무슨 사건이 있었기에 파국으로 치달았을지 궁금해졌다. 뒤에 그에 대한 단서가 없을까 싶어 계속해서 읽었다.

밖으로 내보냈던 마군을 게헤나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가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가 사랑했던 세계를 파괴하고 싶지 않다.

그가 보고 싶다.

선대 마왕도 용사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어쩌면 나보다 더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이 뒤로부터 한참은 알 수 없는 수식을 적어두거나 그저 펜으로 죽죽 그은 낙서만이 있었다. 쉴 새 없이 넘기자 드디어 식별하기 쉬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계속 침대 위에만 누워있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직접 독약을 만들었다.

내가 사라지면 용사가 돌아와 주지 않을까.

“맙소사….”

이걸 마시면 죽은 것도 죽지 않은 것도 아닌 빈사상태에 빠진다.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조금 두려워져 술을 마셨다. 취한 상태로 독약을 들이켰다.

아마 내 알맹이는 죽어가겠지만, 껍데기만은 남아 새로운 영혼을 주인으로 맞을 것이다.

나 대신 누군가 이 결말을 맺음 해주길….

그래. 그러기를 진정 바란다.

본체의 영혼은 시들고 그 자리에 내 영혼이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왕이 원하던 끝을 맺기는커녕 후회를 답습하고 있었다.

“나도… 만났으면 안 됐어.”

RPG 게임의 정석대로 용사와 마왕의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해야 했다.

“잠깐, 리헤로스가… 포기했으면 어쩌지?”

선대 마왕의 일기대로라면, 용사의 의지가 사라지면 더 이상 부활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나는 이미 그에게 나 정체를 고해버렸고 떠나온 지 한참은 된 상태였다. 그가 포기해버리면 나는 선대 마왕처럼 용사가 나타날 때까지 영면에 드는 수밖에 없단 말이다.

‘불안해 미치겠네. 리헤로스를 관찰할 방법 없나?’

보유한 스킬을 뒤져본 바로 천리안이나 독심술 따위는 없었으니 물리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선 첨탑을 정리하고 내려와 페로를 찾았다.

“페로.”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난 괜찮아. 혹시 바깥 상황을 살필 수 있는 도구 같은 게 있을까.”

“그런 거라면… 주인님이 자주 들여다보시던 마경이 있어요.”

마경이면 백설 공주에서 나오는 마법 거울 같은 건가. 끽해봐야 망원경 같은 도구가 없을까 물었던 건데 잘 됐다.

“근데…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깊은 잠을 주무시기 전 치워두셨던 것 같아요.”

“그래? 잠들기 전….”

‘선대 마왕이 독약을 먹기 전을 말하는 거겠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거지?”

“네에, 이후로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고마워.”

“주인님….”

“응?”

“오래 못 본 사이에 매우 다정해지신 것 같아요.”

“엑?”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말투도 부드러워지셨어요. 아 아니, 물론 지금의 주인님이 무지하게 좋지만 그렇다고 예전에 안 좋았단 건 아니고요!”

“흐음, 지금의 내가 좋은 거라면 전에는 불만이 있었단 얘기 맞지 않아?”

“헤에에! 절대로 아니에요!”

“하하하, 어쨌든 좋은 의미니까.”

마왕의 위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페로에게는 무방비한 모습을 모두 보여줘도 괜찮다 생각했다.

“그럼 난 마경 찾으러 가볼게.”

“또 필요한 게 생기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항상 주인님 곁에 있으니까요.”

“응, 그럴게.”

페로에게도 안 보이는 곳에 치웠다면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을 일기를 남겨둔 첨탑. 그 어딘가에 치웠을 게 뻔했다.

‘기껏 내려와 놓고 다시 돌아가야겠네.’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함에 높디높은 첨탑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서둘러 가 마경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에만 핀트가 꽂혀 있었다.

─끼이익

첨탑의 낡은 문은 재환영하듯 열렸고, 곧장 방 이곳저곳을 뒤지며 마경을 찾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허리를 숙이자 책장 뒤에 튀어나온 무언가 반짝이며 눈을 톡톡 쏘아댄다. 끝을 잡아당기며 꺼내어보니 세울 수 있는 구조의 아주 큰 타원형 전신거울이 나왔다.

“어떻게 쓰는 거지? 거울아. 리헤로스를 비춰줘.”

특수한 암호나 주문 없이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인데 표면이 울렁이더니 금색의 형체가 온전히 드러난다.

“리헤로스…! 다행이다…. 아직 여정 중이구나.”

먼 곳을 응시하는 리헤로스가 보였다. 첫 만남 때에도 그는 절벽 끝에서 이처럼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었다.

마경에 비친 리헤로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부드러운 살결이나 온도는 느끼지 못하고 차가운 거울 표면만이 손가락을 누르고 있었다.

“너는… 아직 목표가 사라지지 않았어? 그 목표는 역시 날 해치우는 거겠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거울 너머의 그에겐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하루는 끼니를 때우고 낯선 사람을 만나 교류를 하며 차근차근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나랑 있을 땐 그렇게 수다스럽던 녀석이… 묵묵하게 할 일만 하는 게 어색해 보여.’

그의 홀로서기는 대단히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낮도 그리 밝지 않은 게헤나에 달이 차오르자 더욱 어두워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마경 앞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얇은 모포에 의지한 채 마경 속의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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