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거센 파도처럼 널뛰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졌다.
‘시간이 약이네. 성급하게 결정짓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될 거야.’
이번 다짐은 얼마나 갈까 싶다가도 계속 감정에 매몰되어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근래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내 정체를 폭로하고 싶어졌었는데, 그렇게 되면 리헤로스가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더 힘들 느낌이었다.
한숨을 푹 쉬고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리헤로스가 먼저 일어나있었다.
“좋은 아침.”
“그냥 아침.”
“그냥 아침이 뭐야?”
그는 웃으면서 대꾸하다가 내 얼굴을 심각하게 각종 각도로 살핀다.
“크리스, 오늘따라 얼굴이 부은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
“…….”
“왜, 못생겼냐?”
“어? 아니…. 귀여운데.”
“……악! 잠 덜 깼냐? 됐고! 이제 가볼까.”
“아직 애들 자고 있는데, 인사는 안 해도 돼?”
“인사는 무슨,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해.”
“으응, 알겠어.”
그는 이제 NPC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처음 경험했던 사건인 루미와 리키만 해도 구질구질 미련을 남겨대더니, 이제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세계 전부라는 것을 알아서일 것이라. 자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길을 떠났다. 탈것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첫 모험 시작 때의 추억을 떠올리듯 걸었다.
***
“이제 정오 됐으려나? 볕이 뜨거워질 테니까 조금만 더 가서 쉬자.”
“응. 그러자.”
“어제 일 많이 안 한 것 같은데 어깨가 뻐근하네.”
“……네가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난데없이 무슨 말이야?”
“얼굴 반쪽이 피범벅이 될 정도였는데도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잖아.”
“글쎄, 그걸 헌신이라 할 수 있나?”
리헤로스가 여태 해왔던 봉사에 비해서는 약소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네가 너무 걱정돼. 네 몸을 우선으로 살폈으면 좋겠어. 그래서 잠깐이었지만… 아이들이 미웠어.”
“…….”
사사로운 감정에 사상이 휘둘릴 캐릭터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크리스, 네가 너무 행복해 보였어.”
“…행복해 보였다고?”
“내 눈엔 그래 보였어. 아이들 사이에서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널… 말릴 수가 없었어.”
평소보다 의욕적으로 참여하긴 했다. 어릴 때의 날 이렇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었음 좋았겠다는 생각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난… 그 정도로 안 죽어 괜찮아. 힘들지도 않고.”
“…….”
“그러니 걱정 말라고.”
어째선지 리헤로스가 할법한 대사를 하고 있었다. 역할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어라… 용사님 아니에요? 큰일-이네.”
대화에 심취하고 있어 숲 사이 길목을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단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는데 그 인물들은 하나같이 붉은색의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글라디우스 기사단…?’
“뭐라고? 용사님? 설마 리헤로스 님?”
“안녕하세요?”
“어떡해…! 진짜 용사님이다.”
리헤로스 쪽에서는 기억을 못 하지만 기사단원들은 그를 알아보고 옹기종기 모여 수군댔다.
“잠시만요. 왜 기사단이 이 지역에 있죠? 이쪽은 모험가들이 담당하기로 했던 거 아닌가요?”
“아… 그게….”
“분명 담당 지역을 나누었는데, 변동됐으면 공유해 주시겠어요?”
그의 요구는 당연했다. 협업하는 관계에서 업무 공유 안 되는 건 최악이다. 경로가 겹치면 남은 한 곳은 아무도 안 간 게 아닌가. 늦었지만 우리라도 그쪽으로 가서 마군을 쳐야 한다.
“죄송한데…”
“네, 말씀하세요.”
“제발 다른 길로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게 용사님-들 한테도 좋을 거예요…. 불필요한 싸움의 전조 냄-새가 난다. 킁킁.”
“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철거덕 거리는 요란한 갑옷의 마찰음을 내며 숲을 가로질러 오는 여럿의 인영이 시야에 들었다. 그러자 우리 쪽에 있는 기사단원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못 보게끔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는 굴하지 않고 어깨너머로 실체를 확인했다.
“마법 무기는 아직 못 찾았나!”
“죄송합니다! 단장님!”
“칼리고 경?”
“흐음?”
기사단원들은 제 이마를 두드리며 자책했고 리헤로스와 칼리고는 별다른 말없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숨 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 것과 같은 마법 무기를 찾고 있습니까?”
“…….”
“그래서 제 검을 탐내셨던 겁니까?”
“하! 어지간히 하지 그래? 못 들어주겠군.”
“칼리고 경!”
“시끄럽다.”
“마법 무기가 수백 명의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여기에서 지체하는 동안 민가는 마군에 의해 피해를 보고 있을 거 아닙니까!”
“시건방진 놈. 이 세상을 너만 구하나?”
“예?”
“그게 바로 위선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용사님, 용사님, 하며 치켜세워주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멍청하기 짝이 없어.”
“…….”
“야이 씨, 뭐라고 말했어. 뭐? 멍청해?”
리헤로스는 칼리고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날을 기다려왔기에 오늘만은 그 사이에서 빠져주려 했다. 그런데 여전히 칼리고는 대화할 의지가 없었고 리헤로스를 깔보고 무시하는 태도에 참을 수 없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다음에 나올 마물은 얼마나 강할지 계산하는 것이 전쟁의 시작이다. 머릿수로도 감당하지 못할 강한 힘을 가진 군단장이 나오면 넌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이 있나?”
“…….”
“없겠지! 그저 누군가 도와주겠거니 팔 벌려 하늘에 바라기만 하겠지. 갓난쟁이처럼.”
“닥쳐, 리헤로스가 어떻게 고난을 넘어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나불대지 말란 말이야.”
내 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 칼리고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내 쪽으로 겨우 시선을 돌린다.
“넌 용사 옆에 쭐레쭐레 쫓아다니며 대체 뭐 하는 거지?”
“네 깟 놈이 알 거 없잖아.”
“내가 맞춰보지. 그래, 용사의 밤 시중을 드는 역할인가? 그를 얼마나 즐겁게 해주는지 내게도 보여줄 수 있나?”
“이… 역겨운 새끼가…!”
─빠악!
내가 놈의 턱을 날려버리기 전에 다른 이의 주먹이 선수를 쳤다.
“리헤로스…!”
“내가 경고했을 텐데! 더 이상의 무례는 참지 않겠다고!”
“….”
칼리고는 투- 하는 소리를 내며 입에 고인 붉은 타액을 뱉어냈다. 찢어진 입안을 혀로 굴리다가 헛웃음 소리를 낸다.
“하…! 감히 내 얼굴에 손을 대?”
“…….”
“용사를 붙잡아라.”
“…예! 단장님!”
“이거 놔!”
“리헤로스!”
기사들은 주저하는 기색 없이 리헤로스를 붙잡았다. 그들을 떼 놓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나 역시 남은 기사들에 의해 양팔을 붙잡혔다.
“아크리스 님, 가만히 계시는 게 용사님을 위한 일입니다…!”
“어떻게… 가만히 보고 있으란 말이야! 너희들까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칼리고는 옆에 서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시건방진 야생 짐승을 기를 땐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 누가 서열 위인지 말이야.”
“크읏, 뭐 하는….”
“이 눈깔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뭐 하나 잘난 것 없으면서 빳빳하게 치켜든 얼굴하며….”
칼리고는 리헤로스 얼굴에 닿을락 말락 단검을 겨누고 있었다.
“여기, 이마에서부터 눈, 입술까지 찢어버리면 다신 까불지 않으려나? 응?”
─빠아악!!
기사들을 뿌리치고 달려 나와 칼리고의 허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칼리고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볼품없이 옆으로 꽈당 넘어져 버렸다.
“헉… 다, 단장님!”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무거운 갑옷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칼리고를 부축하기 위해 기사들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사이, 리헤로스의 손을 잡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달렸다.
“리헤로스, 뛰어!”
얼마나 뛰었을까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에 멈춰서 숨을 고른다. 리헤로스도 지쳤는지 주저앉아버린다. 그런데 뒤편에서 자박자박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헥-헥- 용사니임.”
“아까 칼리고랑 있던 기사… 맞지?”
“…쫓아왔나…!”
나른한 말투를 가지고 있는 붉은 휘장을 매단 기사. 머리 위엔 고양이 귀가 솟아있었다. 고양이족 아인종인가 보다.
“쫓아오지 마. 사과 안 할 거니까.”
“그게 아니라- 저 기사단 그만두려고요…. 킁-킁”
“갑자기?”
“아까 보셨다시피 단장님은 너무- 무섭잖아요… 단장님 목소리만 들리면 꼬리가 안으로 말려-들어간다고요.”
“…딱히 안 그래 보이는데."
“히힛. 그런가요.”
녀석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용사님들 많이 지치신 것 같은데… 조-금 더 가시면 요정의 샘이 나와요. 거기서 회복하시는-게 좋겠어요.”
“진짜 있는 거였어?”
일전에 떠돌이 상인에게서 금화 다섯 닢이나 주고 산 요정의 씨앗이 떠올랐다.
“그럼요. 저 이 지역 토박이-니까 믿어주세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 뵙길.”
“……어어, 그래.”
이상한 녀석이었다.
***
얼떨떨한 기분을 뒤로하고, 인근의 자잘한 마물을 처치하는 가벼운 퀘스트를 진행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재수 없는 놈. 역시나 무기 찾는데 정신 팔려서 마물 처치는 하나도 안 했네.”
“기사단은 되돌아간 것 같으니까. 이 길을 쭉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러자. 이제 날이 질 것 같은데 근처에서 야영할까.”
“있지, 거기 가볼까?”
“응? 어디? 아… 요정의 샘?”
“응. 속는 셈 치고 한 번 가보자.”
가고 싶다는데 딱히 만류할 이유도 없어 그러기로 했다. 고양이 기사 말대로 요정의 샘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른 숲보다도 더 잘 가꾸어진 숲속의 샘. 동화 속에 나올법한 그런 느낌이었다.
“정말 나올까….”
“나오든 안 나오든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야지. 어쨌든 덕분에 운치 좋은 곳에서 자게 됐잖아.”
“…네가 좋으면 됐다.”
리헤로스는 샘 바로 옆에 손으로 파서 씨앗을 심었고 우리의 잠자리는 조금 떨어진 나무 사이에 자리 잡았다. 일찍 누울 수 있다는 것만은 좋았다. 모닥불을 지피기 위한 나뭇가지를 모으는 것이 생략되어 모포만 깔고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진짜 이러고 자면 입 돌아가겠는데.’
덜 추울 때 잠을 청하지 싶어 눈을 감으려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방금 무슨 소리가….”
“쉿,”
리헤로스가 검지로 입술 위를 가로막았다. 그의 시선을 좇아 조용히 몸을 일으켜 샘 쪽을 바라보았다. 씨앗을 심은 곳에서 어느새 노란 꽃이 피어났다. 그 꽃의 향기를 따라온 요정들은 샘을 둘러싸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요정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노란빛 가루가 떨어졌고, 꽃을 피워냈다.
─또롱
[이벤트]
요정의 연회
‘아름답다.’
프린X스 메X커 에서 나오는 무사 수행 이벤트의 오마주인듯했다. 역시 프렉탈 놈들은 고전 게임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사기당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렇지?”
“속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세상엔 비열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아. 칼리고를 봐. 그건 너도 부정할 수 없을걸.”
“…….”
“그런 인간들을 위해 네가 싸워야 한다니, 불공평한 느낌도 들어.”
내가 왜 이런 소릴 꺼내게 되었는지… 그의 소명을 무시하라는 건가,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물론… 세상에 선한 사람만 존재할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런데 법과 규칙, 도덕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내가 중심을 지키면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힘을 얻겠지. 그러니 난 끝까지 악에 맞서 싸울 거야.”
“…….”
“그리고… 말했잖아. 너를 지키고 네가 살아갈 이곳을 지킬 거라고.”
“……바보 같아.”
아무리 잘생겼다고 한들 흐리멍덩하고 바보 같았던 그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해 보였다. 요정들의 장난질로 그리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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