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크리스!”
“일어났어?”
그는 내 뺨을 양손으로 쥐었고 볼이 꾹 눌렸다. 내가 그의 상태를 살폈던 것처럼 그도 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아주 길게 뱉었다.
“다행, 다행이다. 하아아아….”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천천히 흘러내려 어깨를 잡는다. 그의 손 위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나보단 네 걱정을 해. 심한 일을 당해서 기절까지 했잖아.”
“그 납치범들은 어디 있어?”
아직 성인도 채 못된 청소년이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 옆에 멀뚱히 앉아있는 녀석이 ‘대장’이란 걸 알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다.
“납치범… 어디 있는지는 알아. 심지어 주동자까지 알아냈어.”
“어디?!”
“바로 앞에.”
갑자기 내 손을 쥐고 일으키더니 자기 뒤로 숨기듯 굴었다.
“무슨 꿍꿍이지? 마왕의 수하인가?”
‘그럴 리가 있냐. 나도 당했는데.’
“먹고살기 급급해서 그랬어.”
“…….”
녀석의 뻔뻔함에 그 착한 리헤로스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이미 겁줬으니까 됐어.”
“그렇지만…! 지금 네 몰골을 봐!”
“응? 내 몰골이 왜?”
진흙 묻은 것 때문에 그런가 싶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궁금해져 구석에 달린 울퉁불퉁한 거울 앞으로 갔다.
진흙이라 생각했는데 검 붉은색의 핏자국이었다. 뒤통수 맞고 기절했을 때, 이 지경으로 피를 흘렸나? 힘이 대단하네. 물론 금방 회복되어서 건강에 지장은 없는 것 같았다.
‘딱히 상태 이상이나 경고 뜬 건 없으니 괜찮지 않나.’
피 칠갑인 상태로 앉아있으니 리헤로스가 보기엔 얼마나 공포였을까.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부러 목에 힘주고 말했다.
“야, 이 지경으로 만들어두고 사과를 안 해?”
“…안 죽었음 됐지….”
“이거 안 되겠네. 왕궁 지하 감옥에 들어가서 음식물 쓰레기 비빔밥을 먹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이봐요. 아직 앞날이 창창한 청년 같은데, 잘못한 건 사과를 해야죠. 이건 살인 미수 아닙니까?”
“야야, 됐어. 무슨 살인 미수까지야.”
“죄송요.”
“야 인마! 사과할 거면 똑바로 해!”
“크리스. 지금 되게 오락가락해. 머리 다쳐서 그런 거야?”
시작은 장난이었지만 막상 건성의 극치인 사과를 받으니 울컥했다.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리헤로스에게 설명했다.
“이놈들, 제대로 된 생존 교육도 못 받은 애들이야.”
“…….”
“마군에 의해서 가족을 잃거나 학대당해서 자기들끼리 뭉쳤다고 해.”
“그런 일이….”
“나는 얘들에게 짧게 생존 지식만 알려주려고 했거든, 근데 네 의견을 안 물어볼 수 없지.”
“으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나를 투영시키고 안타까워한들, 리헤로스의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중이기에 원하지 않는다면 깨끗하게 포기할 계획이었다.
“나는….”
“편히 생각해.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야. 책임을 모두 질 필요 없어, 저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겠지.”
그가 편히 생각하길 바라서 말을 덧붙이는 거였지만 어째 설득에 가까운 모양새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오래 체류하는 건 어렵겠지만… 크리스 말대로 생존 지식이나 기반을 알려주는 건 괜찮을 것 같아.”
“그럼 그렇게 할까?”
“…응.”
“자, 어때? 고맙지?”
“음… 감사요.”
“얘는 존댓말부터 배워야 해.”
***
“크리스. 전령 왔어.”
“녹틸은 매일 전령만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반응 빠른 거 봐라.”
“하하하, 우리 소식을 기다려준다면 고맙지.”
흰 비둘기 모양의 마법 전령은 묵직한 책 묶음을 쾅 떨어트렸고, 그 후에 서신을 리헤로스 손에 건네주었다.
“리헤로스에게.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연락이 와서 걱정했습니다. 인제 그만 놀라게 해주세요.”
“푸핫, 놀랄 만도 해. 용건이 있어 불러놓고 얼마 안 되었는데 연락이 오니 말이야.”
“아무래도 그렇지. 마저 읽을게? 우선 부탁하신 텃밭 농사 책과 식용 식물도감 책을 소소하게 몇 권 보낼게요. 무슨 일로 요청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유용하게 사용해 주길 바라요.”
“몇 권…인 거 치고 많이 보내주지 않았나. 열 권 정도 되는데.”
“추신.”
“이번에도 추신이 있어?”
“아크리스. 리헤로스가 귀농한 건 아니죠? 제 말을 다시금 상기하시길 바라요.”
“아오. 이 인간 한결같다.”
“저번에도 비슷한 추신 달지 않았어? 무슨 얘길 한 거야? 궁금하다.”
“뭐어… 정 궁금하면 이야기해 줄까. 대단한 건 아니거든.”
“그럼 고맙지.”
“요약하자면 네가 용사 일을 끝까지 잘 할 수 있도록 보좌해달라는 거였어.”
녹틸이 전해온 직접적인 말은 그는 이 세상의 희망이고 해를 가하지 말라는 게 중점이긴 했지만 어쨌든 보좌와 일맥상통한다.
“그랬구나.”
“네가 부담 가질까 봐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컸거든. 그 왜 네 마나 흐름이 좋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잖아.”
“맞아, 그랬지. 녹틸의 기대에 부응해야겠네.”
“이러니까 말 안 하려고 했다니까. 괜히 의식하고 오버하다가 다치지 말고 네 몸만 조심히 해.”
“알겠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 아니거든.”
다 읽고 나니 서신은 빛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책을 하나둘씩 펼쳐 보기 시작하니 통나무집의 문이 열리고 ‘대장’이 들어온다.
“…저기. 애들 다 모았어.”
“언제까지 저기라고 부를 거야? 아크리스라고 불러. 얘는 리헤로스.”
“으응.”
“너는?”
“에?”
“네 이름은 뭐냐고.”
“코멜.”
“그래 코멜. 조를 짜줄래? 수렵조, 채집조, 재배조. 이렇게 셋으로.”
코멜은 현실로 따지면 고등학생 정도 된 것 같은데, 가장 통제하기 힘들 사춘기 나이대의 아이들을 잘 통솔했다. 엇나가지만 않으면 좋은 리더가 될 상이다.
가장 먼저 채집조로 분류된 아이들에게 곧바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식물 채집에 대해 알려주기로 하였다. 녹틸이 보내준 책 한 권을 들고 하나하나 더듬더듬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산 열매는 먹어도 돼. 독성이 있는 거랑 구분이 안 된다 싶으면 확실히 구분되는 것 위주로 먹어.”
“네에.”
“자, 여기 책에 나와 있지. 이런 건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아이들 품에 각종 풀떼기와 열매가 한 아름 채우고 작은 마을로 돌아왔다. 리헤로스는 재배조 아이들과 함께 거친 땅을 갈아엎고 있었다.
“많이 했네.”
“응, 이 정도면 심을 수 있을 거야.”
“코멜, 창고에 못 먹을 정도로 싹이 난 감자가 있다고 했지.”
“응.”
“그거 가져와 봐.”
코멜은 군말하지 않고 포대 자루를 가져왔다. 안에는 손을 뻗고 있는 것 같은 싹 난 감자들이 마구잡이로 엉켜있었다.
“이런 건 이렇게 반으로 잘라서….”
단도를 뽑아 싹 난 감자를 반으로 잘라 잘 갈린 땅에 던졌다.
“이렇게 씨감자로 활용하면, 감자를 잔뜩 재배할 수 있어.”
“우와 그렇구나.”
“감자는 비교적 잘 자라니까 키우기 쉬울 거야. 구워 먹던가 으깨 먹던가 수프를 하던가 활용도도 높고.”
“맛있겠다!”
“다른 작물을 키우기보다 우선 감자를 많이 재배하고, 나중에 인근 마을로 가서 감자와 다른 채소의 씨앗을 교환해 봐. 그렇게 하나씩 늘려가는 거지.”
아이들은 아직 자라지도 않은 감자로 무얼 해 먹을지 들떠있었다. 이후로 수렵조를 불러 덫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고, 덫으로 잡은 토끼를 손질하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토끼를 만져본 적은 없지만, 닭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익힌 것을 적용해 보았는데 조금은 다르지만 어떻게든 되더라.
“내장 같은 건 마을 주변에 두면 짐승들이 오니까. 멀리 버리던가 해.”
“알았어.”
“속성 과외이긴 했지만, 대충 알았지? 자세한 건 책 두고 갈 테니까 읽어봐.”
“…….”
“왜 대답이 없어?”
“아크리스, 고마워.”
“어?”
“사실 우리,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면서 배부른 거… 양심에 찔렸거든. 그렇지만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 사람도 없으니까 계속 그렇게 지내왔던 거야.”
“…….”
“알려줘서 고마워. 아크리스는 우리 스승이야.”
마음 한편이 찡해졌다. 처음으로 인간의 감정을 느낀 양철 로봇이 된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어 다행이었지만, AI니까 이 정도겠지. 현실이라면 사실 기대도 못 할 수준의 범죄를 저질러 시설 보호가 필요한 수준이었다.
“아크리스, 잘 됐다.”
“하하, 뭐어… 뿌듯하긴 하네.”
“아크리스! 이거!”
구석에 있던 여자아이가 앞으로 튀어나와 무언가 내밀었다.
“아크리스가 밖에 있을 때 만들었어.”
“목걸이네?”
허리를 조금 숙여 보니 검은색 끈에 반질거리는 하얀색 원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목에 자연스럽게 걸어주었다.
“선물이야. 우릴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건 리헤로스가 받아야….”
“나는 한 게 없는데? 다 아크리스가 했지.”
돌이켜보니 이번만큼은 리헤로스보다 내가 먼저 앞장서 주도적으로 진행하긴 했다. 아이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을 투영해서 본 결과일까. 어찌 됐건 이렇게 입을 모아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하얀색 원석은 해 질 녘의 노을빛을 머금고 있었다.
***
‘이렇게 하루를 날려버려도 괜찮은 건가.’
마군의 진군 소식을 듣고 하루가 지났다. 그 사이 재수 없는 기사단장 칼리고가 싹쓸이해버렸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모험 길에 오르기로 했지만 유독 신경 쓰였다.
‘리헤로스가 주체적으로 퀘스트를 한 게 아니라, 내가 주인공의 분량을 빼앗아버렸다는 것도… 너무 주제넘은 거 아니야?’
그렇지만 아이들이 입을 모아 나를 향해 ‘고맙다’라고 말했던 장면이 뇌리에 느리게 지나갔다. 이런 따뜻한 세계가 또 존재할까. 현실보다도 이곳에서 나의 존재와 가치가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이건… 이건 허상이야. 꿈이라고.’
머지않아 깨어질 꿈이다.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끼익
“왜 밖에 나와 있어?”
리헤로스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김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나를 찾고 있었을까.
“그냥… 별 보고 있었어.”
“와, 별 진짜 많이 떴네.”
“…….”
“근데 밤공기 차다. 감기 걸릴라… 이거라도 덮고 있어.”
그는 두꺼운 모포를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모포를 들고 우연히 나를 보러 나온 건 아닐 테고, 이걸 덮어주려는 게 원래 목적이었나 보다.
“……고마워.”
“어?”
“고맙다고 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 아니. 미안.”
“미안할 것까지야. 그러고 보니… 너한테 사과는 했는데, 고맙다고 말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놀랄 만도 하지.”
“…….”
“고마워. 정말로.”
멀거니 서서 무어라 말도 잇지 못하고 머뭇대더니 나를 꼭 끌어안아 준다.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억세지도 않은 그런 포옹이었다.
“나도 고마워. 네가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
“추우니까 조금만 보고 들어와.”
“…응.”
그가 안아주었던 품에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다. 정말 따뜻하다. 이건 꿈도, 착각도 아니다. 내가 생애 느껴본 온기 중 가장 따스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진짜’였다. 누군가에겐 평범하고… 어쩌면 당연할 다정함이 욕심나기 시작한다.
“이대로… 그냥 이곳에서 살아가고 싶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정말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건가? 나는 이 세계의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 시켜주는 소스에 불과하다. 그런데 감히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오만이지 않았나 싶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일을 벌여놓고선 인제 와서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그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은 내 이기심이다.
‘그렇지만…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나는 현실에서도, 이곳에서도 그럴 자격 없는 거야?’
그가 덮어준 모포에 얼굴을 묻었다. 은은하게 그의 체취가 남아있었다. 늘 감정은 하찮은 것이라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유독 북받치고 통제되지 않았다. 잔잔하기만 했던 감정의 파도가 점점 높아져 해일이 되어 나를 덮친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소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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