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 으…. 머리야.”
“잘 잤… 크리스, 머리 아파? 숙취?”
“그런가….”
“허세 부리더니, 너 많이 마시긴 했어. 물 가져다줄게.”
“그래 줄래?”
리헤로스는 친절하게도 사용인을 시키지 않고 물을 뜨러 방 밖을 나섰다. 녹틸의 주류창고를 털었을 때만 해도 숙취는커녕 잠들지도 못했는데, 아무리 달라져도 격변에 가까웠다.
‘심지어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 껍데기 같던 느낌과 전혀 달라.’
낯선 미시감이 사라졌다. 처음 빙의 됐던 몇 주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감상을 주었던 것과 달리 점점 잠을 자기 시작하고, 술에 취하게 된다. 그래, 이 생활에 익숙해지는 이 세상에 사는 실존 인물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
저택 밖이 소란스러웠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창을 열어 소음의 근원을 찾았다.
“새로운 마군단이 출현한 지역이 있어 통제가 강화될 것이다! 수도 밖으로 나가는 것도 엄격하게 심사할 예정이니 라이오펠의 백성들은 백성 증서와 통행 허가서를 필히 지참하라는 왕의 명이시다!”
국가적 재난 선포가 울렸다. 며칠 전, 페로에게 마왕군을 출전시키라고 명령했는데 이제 슬슬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리헤로스가 물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크리스, 들었어?”
“어. 방금까지 듣고 있었어.”
“나도 물 뜨러 갔다가… 이곳에 묶이기 전에 나가자.”
“그래, 마군단이 나타났다니까 그 재수 없는 놈한테 증명해 보일 기회가 오기도 했네.”
“응, 나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할 거야.”
그래, 힘내주길 바란다. 설마 다음번에도 사이드킥이 참전 못하는 던전이 없길 바라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생겨도 알아서 잘할 거라는 근거가 생겼다.
‘내가 늘 리헤로스에게 과보호한다고 투덜댔는데, 알고 보면 내가 리헤로스를 과보호하고 있었나.’
백작이 맞춰준 정장 대신 고행의 길을 걸어오며 낡고 허름해진 천 망토를 둘렀다. 그도 벨트가 잔뜩 달린 장비를 모두 몸에 채우고 나서 함께 1층으로 나섰다. 우리를 발견한 보좌관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떠나십니까?”
“네,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백작님은 오늘도 광산에 가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아쉽군요. 마지막으로 백작님을 뵙고 가셨음 좋을 텐데요.”
“여행이 끝나거든 가장 먼저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가시기 전에.”
“네.”
“백작님께서 두 분께 드리라 하셨던 선물 기억하십니까?”
“선물이요? 어제 주셨던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 ‘보상’은 저택의 어딘가에서 받을 것 같았으나, 화려한 마차를 올라타며 저택을 벗어난다. 세월이 느껴지는 대형 대장간 앞에 도착한다. 쇳물을 붓고 뜨거운 쇳덩이를 물에 넣어 하얀 수증기가 시야를 뒤덮는 분주한 대장간이었다. 색깔로 보아선 모두 같은 유니폼이었던 것 같지만 팔을 뜯어내어 민소매로 만들거나, 상의 쪽을 잘라내는 등 각기 개성이 강한 대장장이들이 많았다.
─푸취익
“깜짝아.”
“열기가 엄청나네….”
“화상 입지 않게 조심하시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넵.”
살벌한 불꽃이 튀는 수십 개의 용광로를 지나 어느 크고 두꺼운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은 벽이 전부 무기가 걸려있어 어떤 모양새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분홍색 휘장 하나만큼은 눈에 띄었다.
‘이드랑제의 전용 대장간인 모양이군.’
도면을 들여다보던 고글 쓴 남자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저씨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길이 막혀서 말이야. 백작님의 손님인 리헤로스 님과 아크리스 님이라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스피나 님이 두 분께 무기를 선물해 드리라 했거든요.”
“크흠! 백작님이라고 해야지.”
“아저씨는 너무 꽉 막혔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피나 님이 괜찮다고 하셨는데요.”
“흠!”
“알았어요. 아저씨 앞에서만 백작님이라고 할게요.”
“그보다 정말인가요? 무기를 선물해 주신다는 거요.”
“네, 이 안에 있는 것 중에 하나씩 골라보세요. 안 되는 것 빼고요. 농담이에요.”
‘하나도 안 웃기는데 저게 농담이야?’
상당히 괴짜 같았다. 무미건조하게 말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 못하는 그런 부류였다. 리헤로스는 날이 잘 벼려진 장검을 한 자루 골랐고, 나는 굳이 잘 사용하고 있는 활을 교체할 필요가 없었기에 근접 싸움에 용이한 단검을 집어 들었다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정도면 돼.’
“손에 잘 맞는지 휘둘러보세요. 나중에 와서 교환해달라고 떼쓰거나 반품해달라고 해도 안 돼요. 가격표가 없으니까요.”
“….”
그의 농담에 나는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리헤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검을 뽑아 가볍게 휘둘러본다.
“이 검은… 훌륭하네요. 가벼운데 그렇다고 안이 비어있는 느낌이 아니에요.”
“엣헴, 그것이 이드랑제 가문표 기술체의 집약이죠. 선대 백작님부터 오지 산간을 돌아다니며 영입한 기술자들을 먹이고 재워주시면서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셨죠. 우리 가족은 3대째 이드랑제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대단하네요.”
“백작님이 먹여주고 재워주시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좋은 결과물을 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
“상부상조하는 거군요.”
남자는 팔짱 끼고 자랑스럽게 콧소리를 내었다.
“그럼 감사히 잘 사용하겠습니다.”
“잘 사용해 주신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크레아누스의 은총이 깃들길.”
“크레아누스의 은총이 깃들길.”
무기를 챙겨 들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대장간을 벗어나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흐와. 대장장이는 위인이야 위인. 나는 저런 데에서 일 못 해.”
“대단한 일을 하는 분들이긴 하지.”
“두 분,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요?”
“네, 정말 마음에 듭니다. 마침 필요했던 거라 더욱이요.”
검이 부러진 리헤로스는 아마 검을 이 근방 무기 점에서 사려고 했을 것이다. 보상으로 얻게 된 것이 좋을뿐더러 그 대단한 이드랑제 표 무기를 얻은 것은 실로 이득이 아닐 수 없다.
“그럼 무사 귀환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시 뵐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크레아누스의 은총이 깃들길.”
보좌관은 우리 쪽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우리도 맞인사를 마친 후 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방에서 말을 찾은 뒤 마을 밖을 빠져나왔다. 이제 나는 이곳에 돌아오리란 기약이 없어서일까? 저곳의 빵을 다신 못 먹게 된다는 사실 하나가 매우 아쉬웠다. 물론 그만큼 재수 없는 칼리고의 낯짝을 보지 않는다는 점은 좋았기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칼리고… 상판대기만 멀쩡하면 다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 외모 지상주의적인 마인드를 교정하는 캐릭터다.’
칼리고를 떠올리자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알리엔토 사가가 현실에서 쭉 서비스해 왔다면 칼리고의 캐릭터성 때문에 하차 선언할 사람들이 매우 수두룩할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디자인한 건지 프렉탈 소프트 개발자 놈들의 머릿속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이고 목말라.”
“음?”
말을 타고 마을을 조금 벗어나자 길 한복판에서 한껏 연기 톤으로 목마르다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예상했다시피 리헤로스는 말에서 내리더니 그자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물이 필요하세요? 이거 드세요. 떠온 지 얼마 안 된 물이라 시원할 거예요.”
“허어억! 꿀꺽꿀꺽.”
“고맙다는 말도 안 하네.”
“괜찮아.”
보통 남에게 물을 얻어 마실 땐 주인을 위해 조금은 남기는 것이 암묵적인 예의일 텐데, 그 남자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목구멍에 쏟아붓는다.
“실화야?”
“많이 목마르셨군요. 더 필요하시면 더 떠올게요.”
“아아, 아니야. 고마워 젊은이! 내가 이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아니에요. 별말씀을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흠… 뭐 좋은 거 주려나?”
이런 사소한 선행에도 퀘스트 보상이 있다면 잘 됐다. 역시 리헤로스의 착한 마음이 다시금 보답받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남자는 등에 지고 있던 산만한 보따리를 풀어 바닥에 늘어뜨렸다. 각양각색의 보석과 정체불명의 물체, 환약 같은 게 보였다.
“내 진귀한 상품을 착한 청년에게만 할인가로 제공할게!”
“…….”
‘장난하냐. 그냥 장사치잖아.’
“와, 이건 뭐예요?”
“뭘 구경하고 있어? 얼른 와.”
“허허헛, 젊은 친구가 안목이 좋네. 이건 요정의 씨앗이야.”
“요정의 씨앗이요? 그걸로 무얼 하나요?”
“이걸 요정의 샘 근처에 묻어봐. 그럼 아주 재미난 일이 펼쳐지지.”
“이거 살게요.”
“야야, 아서라. 딱 봐도 사기잖아.”
“헤헤이, 깐깐한 친구. 내 물건은 다 진품이야. 전 대륙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진귀한 물품이라네. 단돈 금화 다섯 닢!”
“…다섯 닢이면 빵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먹을 수 있어.”
이런 사람들이 바르기만 해도 주름이 쫙쫙 펴지고 몸에 매달고 있기만 해도 살이 쪽쪽 빠지는 운동기구 따윌 파는 사기꾼들 아닌가. 봉이 김선달은 몇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지만, 판타지 세계까지 끌고 와선 쓸데없이 고증을 지킬 필요는 없지 않나. 순진한 용사님을 등쳐먹기 위해 등장해버린 것 같다.
“그래도 재밌잖아. 여기요.”
“진짜 사려고?!”
“아이고 탁월한 선택이우! 자자, 여기에서 요정의 샘은 멀지 않아.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면 요정의 샘이 있어. 거기에서 씨앗을 심으면 요정들이 나타난다네.”
“기회가 되면 꼭 가봐야겠네요.”
“그래그래. 청년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런데 거기에서 야영하려면 조건이 있어. 불을 피우면 안 돼. 그리고 요정들이 놀라니까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쥐 죽은 듯이 보기만 하는 거야.”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불도 못 피운다고? 찬 데서 자면 입 돌아간다.”
그래도 그의 이런 순진무구함이 나쁘진 않다. 아직 재정적 여유가 있으니 참아주는 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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