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두 분 저택에서 즐겁게 지내셨어요?”
“그럼요.”
“그럼요.”
“흐음? 오늘은 의견이 잘 맞는 것 같네요?”
“하하- 그런가요.”
부츠 끝으로 리헤로스의 발을 툭툭 쳤다. 어색하게 대답할 바에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후후, 원하시는 만큼 쉬다가 가세요.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재밌는 일정이 하나 있거든요.”
“아, 그런가요…?”
“나흘 뒤에 사교모임이 있어요. 두 분도 함께 가지 않으실래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절호의 기회 아니겠어요. 후원자를 더 얻는 것도 그대들에게 중요한 사안 아니겠어요.”
“아하하…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희가 갈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암, 그렇지.”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드랑제 백작님처럼 저희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여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작위도 받지 못한 자들이 후원을 빌미로 참석하는 것이 기껍지 않을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저희를 원조해 주시는 이드랑제 가의 명성에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정쩡하게 거절할 줄 알았더니만 아주 또박또박 이유를 잘 설명하였다. 이제 그의 언변은 걱정할 일이 없었다.
“걱정하는 이유는 잘 알겠어요. 후후, 저를 그렇게나 생각해 주신다니 감동인데요. 그럼 제가 두 사람을 소개하고 싶은 이유로 초대한다면요?”
“으음….”
“이건 생각해 볼 만하죠?”
스피나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역시 군수산업을 주도하는 사업가의 화려한 말발이 어디 가지 않는다. 상대를 회유하려는 마음이 있으려면 저 정도의 집착이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이것도 무리한 부탁일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후후, 그럼요.”
“감사합니다.”
“단, 이틀이에요.”
“네?”
“이틀 안에 답을 주세요. 만일 가신다고 하면 두 분의 의상을 맞춰드려야 하니까요.”
─띠링
[시스템]
돌발 퀘스트 수행에 필요한 시간이 단축됩니다. (4일 → 2일)
‘우와 실화냐? 미친…. 어쩐지 답지 않게 길게 준다 싶었어.’
스피나의 제안을 거절하면 더는 백작저에 남아있기 민망스럽기에 강제로 퇴장되나 보다.
“…알겠습니다.”
“…….”
우리 둘은 착잡해졌다. 지금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만으로 하루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니까. 스피나의 완강한 말에 밀어붙일 수도 없었기에 그저 찻잔 안에 비친 내 심란한 얼굴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흰 바탕에 붉은 꽃이 피어난 것 같은 찻잔이 유독 시선을 끌어당겼다.
“백작님, 찻잔이 굉장히 고급스럽네요.”
“아크리스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국의 상인에게서 사들인 귀한 찻잔이에요. 그들의 고향에서 피어나는 꽃, 모란이 그려진 거라더군요.”
“그렇군요.”
[단서]
이국의 찻잔
- 이국에서 건너온 찻잔. 목걸이도 이국에서 건너왔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같은 상인에게 구매했을 수도….
뜬금없지만 돌발 퀘스트와 연관이 있는 단서인 모양이다. 첫날 대접받을 때와 달리 다른 형식이었기에 언급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후후,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하러 가봐야겠어요. 천천히 즐기세요.”
“네… 그럼.”
우리는 스피나가 방을 완전히 나간 것을 보고 나서야 앉을 수 있었다.
“크리스.”
“흐음, 아마 내일까지는 조사할 수 있을 거고… 모레에는 이드랑제 백작에게 답을 줘야 할 것 같으니까.”
“응, 아까 찾은 이 단서를 조사해 보는 게 우선이겠네.”
리헤로스의 주머니에서 섬유 조각이 나온다. 드레스룸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았던 단서.
[단서]
의문의 섬유 조각
- 큰 진열함 하단에 붙어있던 섬유 조각. 천이 모서리에 걸려 찢긴 것 같다.
“매일매일 청소하는 저택에 이런 흔적이 남을 리가 만무하지.”
“맞아. 이 천 조각의 주인이 범인일 가능성 있어. 현장을 정리하는 데에 급급해서 본인의 옷이 찢기었는지도 몰랐을 거야. 이 소재의 옷을 입은 사람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이 저택에 사용인들이 몇 명인데 이걸 다 대조해 보냔 말이지.”
“크리스, 보통은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유니폼을 입지?”
“그렇겠지.”
“그 유니폼은 개인별로 할당된 개수가 있을 거고.”
“그러지 않을까?”
“그런데 주인님 앞에서 찢긴 옷을 그대로 입고 다닐 순 없을 테니 옷을 수선하거나 교체를 하게 되면 눈에 띄지 않을까.”
“오? 그러겠네.”
“저택 내에 재봉사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좋아, 가보자.”
복도로 나가 세탁실로 이동했다.
“죄송하지만, 저택에 전속 재봉사가 있나요?”
“재단사는 외부에서 모셔오고요. 재봉사는 따로 없습니다만, 보통 하녀 마롤라가 그 일거리를 많이 해요.”
“마롤라는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나요?”
“지금쯤이면 2층에서 빨랫감을 수거하고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2층으로 곧장 올라가자 빨랫감을 잔뜩 쌓은 수레를 도르륵 밀고 있는 연갈색 머리의 여성이 보였다.
“성함이 마롤라 맞나요?”
“예,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이 천 조각이 이드랑제 저택의 하녀들이 입는 옷과 재질이 같나요?”
마롤라는 리헤로스가 건넨 조각을 검지와 엄지를 교차하여 문지르더니 수레 안에서 하녀 복 한 장을 쑥 빼낸다.
“네, 맞습니다. 하녀들이 입는 게 맞는데요. 이 원단은 작년부터 들어온 하녀들이 입는 옷에만 사용되었어요. 제 옷의 팔 부분과 이 옷의 재질을 비교해 보면 티가 나죠?”
“작년부터 사용된 원단이 조금 더 어둡네요.”
“맞아요.”
“그럼 최근에 재봉을 부탁한 하녀가 있을까요? 작년부터 들어온 하녀 중에서요.”
“음… 아니요. 제가 재봉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맞지만, 웬만한 아이들은 간단한 바느질 정도는 할 줄 알아서요. 보통 큰 수선이 필요한 것을 제가 합니다.”
“그렇군요….”
“옷이 찢어진 사람을 찾고 계신지요?”
“네. 하녀 사이에 이야기가 오간 건 없나요?”
“사실 긴 치마를 입고 일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걸리고 밟고 찢어지기 부지기수입니다만… 아, 최근에 옷이 찢어져서 곤란하다는 아이들은 몇 있었어요.”
“누구죠?”
“세탁실에서 일하는 콜린, 티니, 홀 청소를 하는 멜다 이 셋이에요.”
[단서]
최근 옷이 찢어진 적 있는 인물
- 세탁실: 콜린, 티니
- 홀 청소: 멜다
단서 창으로 뜨는 것을 보니 이 안에 범인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크리스, 세 사람을 찾으러 가보자.”
“그래야지. 우선… 아까 다녀온 세탁실부터 가보는 게 좋겠지.”
“응. 길이 익숙하니까.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아.”
굽이굽이 구부러져 있는 2층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오늘만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는지.”
“힘들어? 여기 있어. 나 혼자 다녀올게.”
“됐어. 나도 이 사건에 대해 궁금하니까 갈 거야.”
─턱
아 미친! 요즘은 잘 안 넘어진다 싶었더니 또 이 난리다. 계단에 깔린 카펫에 발끝이 걸려서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크리스!”
“으아앗!”
─쿵!
그가 나를 받아주려 팔을 벌렸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성인 남성이 넘어지는 무게를 온몸으로 받기란 쉽지 않다. 당연하게도 그와 함께 계단 위를 데굴데굴 굴렀고 1층에 도착하고서야 멈췄다.
“웁….”
“아… 으….”
리헤로스가 꽉 끌어안고 있었기에 가슴에 얼굴이 푹 박힌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의 팔을 팍팍 때리자 천천히 풀어주었고 가까스로 고개만 들어 숨을 몰아쉬었다.
“푸하-아!”
“크리스… 괜찮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그보다 넌 괜찮아?! 나 감싼다고 그대로 굴렀잖아.”
“어어… 그냥 가볍게 부딪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해? 나 혼자 굴러도 되는 걸 같이 굴러버렸잖아!”
“몸이 자동으로 튀어 나갔어… 미안….”
“…….”
이 미련한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그의 말대로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고맙다고 이야기했으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일을….’
그가 다쳤을까 봐 잔뜩 예민해져 괜한 성질을 부리고 항상 화 내놓고 후회한다. 그의 착한 마음씨를 알고 있는데도 가끔은 답답하다.
“저, 저 괜찮으세요…?”
도무지 풀어질 기미가 안 보이던 어색한 분위기는 한 여성의 목소리에 의해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 높은 곳에서 구르셨는데…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아아, 네… 괜찮아요.”
“조, 조심하세요…. 저도 얼마 전에 저기에서 넘어졌거든요…. 계단에 깔린 카, 카펫이 조금 들떠있어서 잘 걸리더라고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
그녀가 넘어졌었단 말에 치맛단 끝을 무의식적으로 보았는데, 검은 실로 기운 모양새가 눈에 띄었다.
“저기, 혹시 성함이…?”
“저, 저는 멜다예요.”
“멜다!”
“까, 깜짝아!”
“홀 청소 담당 멜다 맞으세요?”
우리 둘은 바닥에 뒤엉켜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네?! 네, 네에… 어떻게 아셨….”
“안 그래도 찾고 있었어요.”
“저, 저를요?! 저를 왜…?!”
“그렇게 놀라실 필욘 없고, 잠깐 몇까지 조사를 하고 있거든요.”
“휴우우- 네에….”
“시간 괜찮으시죠?”
“자, 잠깐이면 괜찮아요….”
홀에 함께 이동하여 긴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저희가 백작님의 목걸이를 찾고 있는데, 멜다를 범인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멜다의 진술을 통해 종합적으로 추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 예에- 잘 부탁 드, 드려요.”
“멜다. 치맛자락이 찢어진 게 최근인가요?”
“네에… 말씀드렸다시피 얼마 전에 계단에서 굴렀거든요….”
“흐음, 제가 안 입어봐서 그런데 계단을 구르면서 치마가 찢어질 수 있나요?”
“치, 치마를 밟아서 구르다가 넘어져서… 그럴 수 있지 않나요… 그, 근데 제가 평소에 많이 덜렁거려서… 많이 찢어먹거든요. 그래서 아닐, 아닐 수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근래 백작님의 드레스룸에 들어간 적이 있으실까요?”
“제가 홀 청소이긴 한데… 다, 다른 곳도 부탁받으면 체크를 해요.”
“들어가 보셨다는 거네요?”
“그, 그럼요…!”
“그럼 최근, 드레스룸에 진열해둔 백작님의 목걸이를 본 적 있나요?”
“아니요. 못 봤습니다….”
멜다의 대답이 어딘가 모르게 수상했다.
“백작님 같은 어마무시한 재력의 귀족이라면 목걸이가 한두 개가 아니실 텐데, 멜다는 우리가 말한 목걸이가 뭔지 아시나 보네요.”
“옛? 그, 그게… 대충 추측해 본 건데, 다이아몬드가 박힌… 조금 투박하게 생긴 목걸이… 아닌가요? 그, 그게 요즘 안 보이길래… 그, 그걸 찾고계신가 해서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저흰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본 적이 없어서 여쭤본 거예요.”
“어, 어휴휴… 그러셨군요.”
“목걸이의 생김새를 그려주실 수 있나요?”
“제, 제가 그림에 조예가 어, 없어서요…. 2층 계단에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그림에 그 모, 목걸이가 그려져 있어요”
“그런가요? 확인해 봐야겠다.”
“응.”
“멜다!”
“히익….”
“한가롭게 농땡이를 치고 있어? 어서 가서 식당 닦아! 저녁 시간 전에 마쳐야지!”
“죄송해요. 멜다, 저희 때문에….”
“아,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멜다는 황급히 왼손에 마대를 들고 식당 방향으로 사라졌고 하녀 장 시릴은 우리 쪽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으와… 눈빛 한번 살벌하네. 나머지 둘 조사하다가 쫓겨나는 거 아니야?”
“일에 지장 가지 않게 조심해서 진행해야겠어.”
[단서]
멜다의 진술
- 치마는 계단에서 구르면서 찢어진 것이라고 주장.
- 평소에 덜렁대는 스타일이라 옷을 찢어먹는 건 다반사라고 함.
- 드레스룸은 수시로 드나들지만 찾고 있는 목걸이는 본 적이 없다고 진술.
- 이 단서 안에 거짓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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