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적당히 딱딱한 느낌의 팔,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 잠깐 얹혀살며 느꼈던 편안함을 연상케 했다. 나의 곁에 남아있던 유일한 혈육에게 깊은 유대를 느꼈더랬지.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현실을 어렴풋이 깨닫자 눈이 번뜩 뜨였다.
“아, 일어났어…?”
“뭐, 뭐야?!”
할머니의 팔베개가 아닌 리헤로스의 팔을 베고 있었다. 감전된 사람처럼 파드득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너, 넘어오지 말랬잖아!”
“그렇지만 네가 목이 꺾인 채로 불편하게 자길래….”
“그런데?!”
“바른 자세로 고쳐주려다가 내 팔을 배길래… 그니까, 빼기도 좀 이상해서….”
…….”
내가 잠결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는데 그뿐만 아니라 손등까지도 붉어져 있었다. 욕실로 뛰어가 이 열기가 식을 때까지 세안용 사기그릇에 얼굴을 처박았다.
***
물기를 닦아내고 불현듯 낯선 루틴을 곱씹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잠을 자주 자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영향으로 이렇게 변한 거지.’
“하아암….”
“…….”
“…오해하지 마. 너 때문에 못 자서 하품한 거 아니야.”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그렇지만 엄청나게 노려보고 있었는걸.”
나 홀로 개운하게 일어난 꼴이란, 가까스로 잊은 부끄러움이 불쑥 들이닥쳐 찬물에 얼굴을 처박으러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맛있는 빵이 나오자 깔끔히 잊었다. 빵을 반으로 갈라 쭉 찢은 다음 따뜻한 수프에 푹 찍어 입안에 넣으니 몇 번 채 씹지도 않았는데 녹아내렸다.
“그 표정. 또 나왔다.”
“우음?”
“엄청 행복해 보이는 표정. 역시 빵 좋아하는 거 맞네.”
“왜, 왜 내 얼굴을 관찰하고 있어?! 죄수 관찰하는 간수야?”
“간수라니, 보이는 걸 어떡해.”
“밥이나 먹어라?”
틱틱거리는 대답에도 리헤로스는 그저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뭐라 쏘아붙여도 기죽지 않게 되어버려 열받는다.
‘이렇게 된 거 너도 한번 느껴봐라.’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음식을 뜨던 은 식기를 내려다보더니 고갤 푹 숙이고는 멋쩍은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왜 저래?’
가끔 리헤로스의 반응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잘만 웃다가 갑자기 기죽은 사람처럼 쩔쩔대는 이유, 추측되지도 않았다. 그의 감정을 헤아릴 새도 없었다. 금세 고갤 들더니 불특정 사용인에게 말을 건넨다.
“저기.”
“말씀하세요.”
“그러고 보니 백작님은 식사 안 하시나요?”
‘이드랑제가 안 보여서 그랬나?’
“백작님께선 아침 일찍 철광산 주인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하네.”
“주인분도 안 계신 데 계속 있기도 민망하네요. 저희도 식사만 마치고 가보겠습니다.”
“두 분이 충분히 휴식하다 가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선물이 준비될 때까지는 기다려달라 하셨습니다.”
‘선물’이라 함은 보상일 게 뻔했다. 그를 회유해서 선물이 완성되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
“괜찮다는데 더 있다가 가자. 어차피 백작님의 친구로 정당하게 초대받은 건데.”
“그래도….”
“저희가 있어서 자리가 불편하신 거라면 비켜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게 생기시면 벨을 울리고 말씀해 주세요.”
“그런 이유는 아닌데 죄송합니다.”
‘착해빠져서.’
그는 다시금 충치 때문에 식사가 불편한 사람처럼 풀이 죽은 얼굴로 앞에 놓인 식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졸려서 그래?”
“크리스. 혹시….”
“뭔데?”
“이런 곳에서 유복한 생활을 하고 싶은데,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험 다니는 거야?”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네가… 이곳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편해 보여.”
“흐음 그래 보이나.”
“나는 너한테 편안한 잠자리도,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도 못 주는데…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했던 건 이기적이지 않았나 싶어.”
“…….”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꽤 지난 후라 까마득했지만, 녹틸의 저택에서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술에 취해 달아오른 얼굴로, 애타는 목소리로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던 리헤로스의 모습.
‘미친… 감성에 절어서 내가 사라져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봤었잖아.’
그래서 내가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편안하고 좋은 건 맞지만, 딱히 이 삶을 가지고 싶거나 선망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왕정 판타지물은 계급사회이고 계급 간의 암투가 살벌하지 않던가. 귀족들의 세계에선 그들만의 고충이 있을 테니 그런 것만 생각하면 절대 사양하고 싶다. 잠깐 누릴 수 있는 객이면 충분했다.
“그런 거 아니야. 이드랑제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며 호감 사고 싶어 하니까 호의를 받으려는 것뿐이지.”
“…….”
“뭐 어떻게 증명이라도 해줄까? 바로 저택 나가는 걸로 보여줘?”
식사를 팽개치고 일어나려는데 검은색 하녀 복을 입은 사용인 한 명이 다가오더니 작게 속삭였다.
“저… 용사님, 한 가지…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시죠? 편히 말씀해 보세요.”
“사실… 백작님이 가장 아끼시는 목걸이가 사라졌는데, 아직 백작님은 모르십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백작가의 사교 모임을 가실 예정이라 분명히 그 목걸이를 찾으실 거예요.”
“저런….”
“간수를 못 한 저에게 경을 치시겠죠…! 새,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백작님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사정이 딱하네, 어쩔 거야?”
예상치 못한 부탁인 모양인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목걸이 찾는 거 도와드릴게요.”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띠링
[!][돌발 퀘스트] 이 목걸이가 네 목걸이냐?
[시스템] 남은 시간: 4일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알림 메시지가 노출되었다. 생각보다 향토적인 퀘스트 제목이다. 배경은 가상의 서양 판타지래도 역시 제작자들은 한국인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돌발 퀘스트여도 넉넉하게 시간을 주기도 하네? 설마 4일이나 걸쳐서 하라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이렇게 장르가 달라지다니.”
“응? 뭐라고 했어 크리스?”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하긴 RPG라고 하면 몬스터를 때리고 부수는 것뿐만 아니라 의뢰 속성의 퀘스트도 꽤 있기 마련이다. 그간 마음이 피폐해지는 스토리의 연속이지 않았던가. 지쳤을 우리에게 휴식용 퀘스트를 줬는지도 모른다.
“의뢰인 성함이?”
“웰라에요. 우선 목걸이가 사라졌던 현장부터 보여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앞장선 웰라를 따라 긴 복도를 지나 높은 계단을 오르고, 또 복도를 쭉 걸어 어느 문 앞에 도착한다.
“여기예요. 백작님의 드레스룸입니다. 원래 외부인은 절대 출입 금지인데… 백작님 오시기 전에 잠깐은 괜찮을 거예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와… 엄청 넓다. 게스트룸만 한 것 같은데.”
“여기, 액세서리를 보관하는 서랍이고, 그 위에 엎어져 있는 건 목걸이를 진열대에요. 말씀드린 대로 곧 사교 모임을 가실 예정이라 꺼내어 진열해두었었습니다.”
“언제부터 목걸이가 안 보였죠?”
“꺼내고 난 후에… 잠깐 헝겊과 세척제를 가지러 지하에 다녀온 사이에 사라졌어요.”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사라졌군요.”
“그러니까요! 진짜 어이가 없다니까요!”
[단서]
부서진 흉상 모양 진열대
- 사람의 흉상 모양으로 조형된 진열대이다. 겉은 벨벳 천으로 감싸져 있지만, 내부는 석고로 만들어진 것 같다. 오른쪽으로 넘어진 상태. 천 안으로 오른쪽 빗장뼈 부분이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벌써 뭘 찾았어?”
“이 진열대, 안쪽이 부서진 것처럼 보이는데… 보통 백작가에서 부서진 것도 재활용해서 사용하나요?”
“아니요. 부서지면 새로 구매하는 게 보통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건 왜 부서져 있는지 모르겠네요. 겉으로 봤을 땐 티가 안 나서 몰랐어요.”
“누군가 이 거치대를 건드렸고, 오른쪽으로 넘어트린 것 같아.”
“그래? 여기서 일하는 사람 중 누군가 떨어트린 적은 없는 거야?”
“목걸이의 무게가 무겁긴 하거든요. 종종 올려둘 때마다 휘청휘청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제가 떨어트린 적은 없어요. 맹세코!”
“그럼 실수든 고의든 누군가 손을 댔다는 거네?”
“그런데 목걸이가 그 정도로 무거우면 목에 걸기 힘들지 않나요?”
“그게… 이국의 상인에게 산 희귀한 물건이라 특수한 광물이라고 하더라구요. 다이아몬드 큰 알알들이 박혀있고요.”
리헤로스는 진열대가 쓰러졌을 예상 방향을 살피더니 바닥을 매만진다.
“여기. 무거운 물건을 떨어트린 흔적이 있어.”
[단서]
흠집이 난 대리석 바닥
- 강한 충격 때문에 대리석의 표면이 거칠어진 것 같다.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인다. 금이 간 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부자연스러운 스크래치가 많이 나 있다. 아마 금속에 의해 생채기가 난 것 같다.
“아마도 범인은 진열대를 떨어트렸고, 충격 때문에 손상된 목걸이를 숨기려고 했을 것 같네요.”
“정말요? 누, 누가 그 귀한 걸 떨어트린 거야!”
“오오-”
“나 이제 잘하지?”
“칭찬에 목말라 있냐? 너 원래부터 찾는 건 잘하긴 했어. 그 단서를 연결하는 속도가 빨라졌지.”
“잘하고 있다는 거네? 고마워.”
“참 내.”
‘내가 평소에 리헤로스를 많이 답답해했던가?’
칭찬받고 싶어 안달 난 멍멍이처럼 구는 게 혹시 내 태도 때문인가 싶어, 지난 행동을 돌이켜보았다. 칭찬이 박하긴 했던 것 같다. 의욕적으로 성장하려면 칭찬을 자주 해줘야 하는 걸까.
‘어이없어…. 이게 무슨 육성 게임이냐고.’
“저어….”
“네? 말씀하세요.”
“제가 이제 일을 하러 가봐야 하는데 두 분께 전적으로 맡겨도 될까요?”
“그럼요.”
“휴우, 한시름 덜었네요. 감사합니다!”
“범인이랑 목걸이를 찾으면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고맙죠. 참, 하나 당부드릴 사항은 점심 먹기 전에 백작님이 돌아오시니 그전에는 나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퀘스트 수행 기간을 4일씩이나 주는 이유가 이거였다. 조사 구역을 오래 살펴볼 수 없다는 것. 아마 이 드레스룸을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 장소마다 제한사항이 있을 것이라. 웰라는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그럼 지금까지 나온 단서는 두 개 맞지?”
“응, 두 가지 단서를 통해 알게 된 건 누군가 이 진열대를 떨어트렸다는 사실, 하나야.”
“음? 그로 인해 은폐했다는 것은?”
“은폐했는지 아닌지는 우리 추측이니까 좀 더 명확해지면 확정 지어야 할 것 같아.”
“오….”
‘리헤로스는 어쩌면 추리 게임에 더 어울릴 법한 캐릭터일지도.’
바닥을 중심으로 최대한 낮은 자세로 살피던 리헤로스는 무언가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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