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칼리고에게 전해. 리헤로스와 아크리스가 왔다고.”
“아… 예에.”
말단으로 보이는 어리숙한 기사가 단장실을 노크한 후, 말을 전했다.
“단장님, 리헤로스 용사 일행이 단장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합니다.”
“그 허언증 환자들 말인가? 오늘은 무슨 헛소리를 하러 행차하신 지 모르겠군. 안으로 들여보내라.”
‘그건 우리가 할 소리다 이 자식아.’
리헤로스와 함께 단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찰나였지만 칼리고의 시선이 리헤로스의 허리춤 쪽, 검으로 향한 것을 보았다.
‘역시 이놈의 짓이다.’
“무슨 일이지?”
“칼리고, 왜 우리의 일에 훼방을 놓는 겁니까? 우리는 힘을 합쳐 싸워야 할 협력관계 아닙니까.”
“바른 대로 말해. 그럼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줄 테니.”
“뜬금없이 쳐들어와 하는 소리가 역시나 헛소리군.”
“리헤로스의 검을 훔치려고 했던 거, 네 사주로 움직인 사설 용병인 것을 확인했어.”
“하하하하! 망상증이 또 도졌나? 터무니없는 소리. 저 고물 검을 탐낼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이 글라디우스 기사단엔 존재할 리 만무하다.”
“…녹틸! 데려와.”
밖에 있던 녹틸은 포박한 아킬라를 데리고 단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녹틸이 들어오자 칼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턱을 괸다.
“허어, 이게 누구야? 요술쟁이. 오랜만이군.”
“누가 요즘 요술쟁이라는 말을 쓰나.”
“내가 쓰면 뭐든 유행이 되지.”
“서로 구면인가 보네.”
“……그다지 반가운 얼굴은 아니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비겁자.”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심히 궁금하지만, 현재의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녹틸이 데리고 들어온 아킬라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그는 포박되어 있는 탓인지 균형을 잃고 비틀대다가 한쪽 무릎을 꿇는 모양새가 되었다. 단장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고개를 들지 못하고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무례한 놈들. 왜 나의 기사를 묶어놨지?”
“그래. 아킬라는 너의 오른팔이잖아. 그가 이미 털어놨어. 우리가 마법에 잠긴 무기를 해제하기 위해 마법부를 찾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네게 보고 했더니 검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며.”
“…….”
“왜 이렇게까지 리헤로스를 괴롭히지? 더러운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검을 훔치려고 했던 거야.”
턱을 괴고 있던 칼리고는 화려한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변했다.
“아킬라, 대체 왜 그랬나? 남의 것을 탐내다니. 천박하기 짝이 없군.”
“다, 단장님!”
“칼리고! 부하에게 뒤집어씌울 셈이야!”
“저 녀석은 원래 남의 것에 욕심이 많았어. 그 욕심으로 타인을 밟고 올라 이 칼리고 님의 오른팔이 된 것이지. 네놈이 언젠가 그 탐욕으로 일을 저지를 줄 알았다.”
“크흑… 단장님…. 어째서….”
“멍청한, 질질 짜지 마라! 너는 영예로운 글라디우스 기사가 될 자격이 없다! 오늘부로 아킬라는 글라디우스 기사단에서 영구 퇴출이다.”
“칼리고!”
“허어?”
“아끼는 부하를 버리면서까지… 이럴 필요 없잖아! 인정하고 사과하기만 하면 되는데!”
“…….”
“단장님….”
리헤로스 대신 분노를 퍼붓고 있었다.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토사구팽 하는 모습은 내가 가장 치를 떠는 인간의 군상 중 하나였다.
‘역겨워.’
칼리고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도 어쩔 줄 몰라 굳어 있었다. 자신을 최전방에서 보호해 주어야 할 지도자가 한 명의 기사를 필요 없는 부품인 양 버리는 행위를 보고도 그를 옹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삽시간에 얼어붙은 장내는 어떠한 불순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 정적을 부수는 것은 칼리고의 회중시계를 여는 소리였다.
─찰카닥
“할 말은 끝났나? 곧 국왕 폐하와의 오찬 시간이군. 나갈 채비를 해라. 카펫을 더럽히고 있는 울보와 선동꾼들은 쫓아내도록.”
“하… 뭐 이런 새끼가….”
“…….”
“뭐 하고 있나. 단장의 명령이다.”
“아, 알겠습니다!”
칼리고의 개수작질이 분명했는데도 끝까지 잡아떼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 기가 막히는 광경에 뭐라 나무라지도, 혀를 찰 수도 없었다. 우리를 내보내기 위해 기사들이 다가와 쭈뼛대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진해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흐어으으윽…. 흐아아아아…!”
아킬라는 우리 손에 의해 함께 훈련장으로 나왔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의 수장, 칼리고의 오른팔인 것을 자랑스레 여겼는데 내쳐진 충격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겠지.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리헤로스가 손을 내밀어도 이성을 놓고 울기만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더 없겠어요. 그만 돌아가시죠.”
“…네.”
녹틸이 말을 꺼내고 나서야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마차가 늘어서 있는 곳에 서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저와 루카는 이만 돌아갈게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 도와줬는데… 고생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두 사람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에요. 저 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저리도 비열한 인간이어서 놀랍지도 않아요. 부디 조심하세요. 칼리고는 자신의 사욕을 위해선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루카도.”
“잘 가라 꼬맹이.”
“형아들 안녕!”
그 진창을 따라 들어오지 않아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루카는 해맑게 인사를 했다. 그 덕에 무거워진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지지 않았나 싶었다. 루카를 먼저 마차에 올리고 난 녹틸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참, 리헤로스. 계약 무기는 언젠간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만이라도 다른 무기를 사용하도록 하세요.”
“언젠가…라면 확실치 않은 거군요.”
“예, 하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빛의 정령왕과 공명을 했잖아요? 그러니 시간은 리헤로스의 편이 되어줄 겁니다.”
“…네, 힘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탄 마차가 떠나고 나서야 여관으로 돌아가려 했다. 심신이 지쳐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상해.’
나는 현실에서 그다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까지 분노했을까, 왜 칼리고 같은 부류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는가 생각 해보았다. 생각 끝에 결론은, 리헤로스가 전 남자친구의 사랑한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면 칼리고는 그의 최악일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 단면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내 문제 아닌가.
‘그 새끼가 뭐가 예쁘다고 나는 자꾸만….’
“크리스, 괜찮아?”
“어?”
“표정이 많이 안 좋아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물어본 걸까.
“아… 괜찮아.”
“…쉽지 않겠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 나중에 칼리고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 그때 푸는 거야.”
“…….”
리헤로스가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있는데도 평소처럼 손길을 거부하거나 툴툴대지 않았다. 마비된 것처럼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자.”
“그래도 되나… 목적지도 정해야 하는데.”
“아직은 급한 임무는 없으니까 괜찮아. 요 며칠간 너무 많은 일이 있었잖아.”
“…….”
“네가 좋아하는 빵도 사서 들어가자. 어때?”
“…정말?”
“응.”
그도 상당히 분개했던 상황이었고 스트레스가 꽤 높은 상태일 텐데, 내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하는 이 남자를 거부할 수가 없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한 따뜻한 마음을 보내오고 있었다.
‘당신, 리헤로스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벽을 세우는 거죠.’
녹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다정함을 오롯이 받아도 되는 건가. 벽을 세워지지 않아도 괜찮나. 깊게 팬 상처가 양심에까지 염증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내가 마왕이어도 괜찮아? 너는 지금처럼 따뜻할까?’
충동적으로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리헤로스….”
─다그닥 닥.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크고 화려한 무늬의 마차가 눈앞에 멈춰 섰다. 이 정도로 휘황찬란한 것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다. 마차에 나 있는 작은 창이 도르륵 열리며 분홍빛의 머리칼이 살랑이는 것이 보였다.
“리헤로스, 나예요.”
“이드랑제 님?”
“흠흠, 정확히는 백작님이시지요.”
“안녕하십니까. 이드랑제 백작님.”
뒤따라온 작은 마차에서 중년의 보좌관이 내리더니 호칭을 정리해 준다. 리헤로스는 정정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나도 따라 묵례하고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 타이밍에 한차례 시비를 붙었던 집단의 등장이라니, 이게 무슨 악연의 연속인가 싶어 걱정스러웠다.
“우리 사이에 격식 차리지 말아요. 저 이런 거 안 좋아해요. 그 옆에는… 소문의 그 사람?”
“네? 소문이라뇨?”
“미모가 출중한 동행자라고 들었어요. 그날 저와는 엇갈려서 처음 보지만요.”
“…….”
“소문 그대로라 알아봤네요.”
‘왜 저딴 수식이 붙는 거야?’
프렉탈 소프트 놈들 마왕의 외모를 어느 정도로 설정했기에 이런 말을 불쑥불쑥 듣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거의 세계관 통틀어 절세미인 히로인 아니냐고. 점점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그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인데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요. 어때요? 함께 차나 마셔요.”
“아, 저희는….”
“지난번처럼 막무가내로 결투를 걸어오지만 않으시면요.”
어떤 의도이든 적대적인 상황을 더 만드는 것은 사양이다. 리헤로스가 물렁하게 답하기 전에 어깨를 잡아 제지하고 대신 답했다. 스피나는 내 쪽을 보며 토끼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내 웃었다.
“아저씨! 마차로 가 있으라고 하더니, 또 기사 내세워서 힘자랑했던 거예요?
“송구스럽습니다.”
“갑자기 싸움을 걸어와서 많이 놀랐겠어요. 결투하지 않는 것이 티타임의 조건인가요?”
“그렇죠.”
“좋아요. 그 어떤, 누구의 개입도 없을 거예요. 이드랑제 백작가의 명예를 걸고 약조해 드리죠.”
“좋네요.”
“저도 좋습니다.”
보좌관은 두껍고 묵직한 마차 문을 열며 귀족 세계의 첫 입성을 맞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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