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여성은 손을 내밀었고 리헤로스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여성은 베이비핑크 색의 머리칼을 가진 귀여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현실의 기준으로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앳된 외모였다.
“이드랑제 가문의 스피나 델 이드랑제에요.”
“아… 네. 반갑습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눌 땐 마치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숨을 죽이던 군중들은 대화가 멈췄을 때에야 저들끼리 조용히 속삭였다.
“맙소사, 이드랑제가 직접 기사를 영입하러 찾아온 적 있나?”
“저 애송이는 이드랑제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도 모르는 모양이구먼.”
“어쩌면 여우처럼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르지.”
“하긴, 요즘 젊은 것들은 워낙 약삭빨라서 말이야.”
이드랑제?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길래 술렁거리는 건지… 그보다 기사를 영입하러 왔다고?
“귀엽네. 이름이 리헤로스라고 들었어요. 리헤로스, 이드랑제 가문의 기사가 될 기회를 줄게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사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엣….”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안도했다. 안 그래도 그가 기사단에 들어가 버리면 군단장을 모두 풀어버린 보람도 없을뿐더러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볼 수 없으니 말이다. 리헤로스의 대답에 속삭이던 군중들은 파도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마다 말을 쏟아내느라 명확한 말이 들리지 않았고 잡음에 가까웠다.
“크흠.”
그때,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성이 스피나라고 불리는 아가씨에게 다가간다.
“마차로 돌아가 계시죠.”
“그렇지만 아저씨.”
“제가 해결하고 돌아가겠습니다.”
“흐응…!”
스피나 델 이드랑제는 비즈가 잔뜩 달린 고가로 보이는 드레스를 끌고 고고한 자태를 유지한 채 밖으로 나간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드랑제 가문에서 스피나 님을 보좌하고 있는 폴림입니다.”
“안녕하세요.”
“리헤로스. 혹시 소속이 있나요?”
“없습니다.”
“머무르실 거처는 있으시고요?”
“없습니다.”
“흠흠. 알겠습니다.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시느라 이드랑제 가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짧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저는….”
“이드랑제 가문은, 대대로 군사 산업을 주도하는 유서 깊은 가문입니다. 귀족가에서 기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한 최초의 가문이며, 스피나 아가씨는 리헤로스의 잠재력을 높이 샀습니다.”
“제 잠재력을 언제 보셨….”
“그래서 제안해 드리는 겁니다. 이드랑제에서 최고의 기사 리헤로스 이드랑제가 되실 기회를, 정점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를.”
리헤로스의 말은 들으려는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들의 장점을 내세워 기사를 포섭하려는 것에 가까웠지 말이다. 너희들이 그렇게 대단하냐? 따위의 물음이 목구멍에서 떠돌았다.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가문의 기사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허어… 다른 조건이 더 필요하신지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다른 가문과 이미 계약이 오고 갔는지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왜 거절하시죠? 당신에게 나쁜 것 없는 조건 아닙니까? 다른 기사들은 이드랑제 가의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말이죠. 이 제안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아시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이드랑제 가문의 기사가 되어주시죠.”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후, 만만치 않군요.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떤 것인지요?”
“한곳에 머무를 게 아니라 위험에 처한 백성들을 보살피고, 마왕을 찾아 처단해야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 거라면 우리 이드랑제의 기사들도 도모하고 있습니다. 리헤로스가 들어온다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제안해 주신 건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소속에 드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그건 핑계 같군요.”
“…….”
“하하하… 이드랑제 기사의 실력을 보시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으실 겁니다.”
폴림이 손짓하나에 뒤에 물러나 있던 분홍색 휘장으로 감은 기사가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온다. 저렇게 눈부시게 잘 벼려진 검은 처음 본다. 그가 말한 이드랑제 가문에서 만드는 검인가?
“잘 부탁드립니다.”
“네?”
─캉!
리헤로스는 새로 얻은 검을 꺼내지도 못하고 검집째 이드랑제 기사의 검을 막아냈다. 깜짝 놀란 나는 인파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야!”
“흠? 이 자는 누구지?”
“크리스!”
“저에게 집중하십시오!”
─카가가각!
날카로운 기사의 검은 검집의 장식물을 날카롭게 긁으며 지나갔다. 작은 쇠 부스러기가 공중에 흩날렸다.
“큿, 그만하세요. 이런 싸움은 무의미합니다.”
“이드랑제 기사는 쓰러질 때까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봐 아저씨, 검을 거두라고 명령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 가게에도 리헤로스에게도 실례잖아!”
“리헤로스의 대답을 듣기 전까진 거두지 않을 겁니다.”
“이 미친…!”
둘 사이에 난입할 수가 없었다. 리헤로스는 최소한의 방어만 하고 있었고 기사의 공격은 무섭게 몰아쳤기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는 검을 뽑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기사는 쉴 새 없이 검집을 내려치기만 했다. 스프링에 튀기는 것처럼 검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튕겨 올랐다.
─캉! 캉! 카칵!
‘왜 검을 뽑지 않지? 상대가 다칠까 봐 그런가?’
몇 분을 지속해서 쉬지 않고 휘두르던 기사는 슬슬 내려치는 속도가 처음에 비해 느려진 것 같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리헤로스는 검의 손잡이로 기사의 손등을 세게 내려쳐서 검을 떨어트리게 했다.
“아…!”
“후우, 후… 이걸로 된 겁니까?”
“…검을 뽑지 않고서 이드랑제의 기사를 이기다니. 리헤로스의 고집이 느껴지는군요.”
“제가 검을 뽑지 않았다고 해서 적당히 봐 드린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맞붙은 것입니다. 제 행동에 의미 부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에게 공격을 쏟아낸 상황에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수치스럽군요. 패배를 인정합니다.”
“보면 볼수록 리헤로스는 탐나는 인재예요. 언젠간 이드랑제로 모셔올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결과는 깔끔히 승복하는 것이 이드랑제의 철칙. 돌아가자. 스피나 님에게는 어쩔 수 없이 비보를 전해드리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다행히 아무도 피를 보지 않고 깔끔하게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드랑제가 떠나자 구경꾼들도 한둘씩 해산하기 시작해 카페 안은 금세 썰렁해졌다. 저녁이 되자 펍으로 변한 카페에서 가볍게 술을 마시는 소수의 인원만 남게 되었다.
“리헤로스! 이게 무슨 무슨 일이람.”
“괜한 걸로 신경 쓰이게 한 것 같네. 미안해.”
“미안해하진 않아도 돼. 그런데 검은 왜 안 뽑았어? 무식하게 달려드는 놈을 뭐 하러 보호해 주는 거야? 큰일 날 뻔했잖아!”
“아하하… 사실 검이 검집에서 안 뽑히더라고.”
“뭣, 뭐?”
“검집의 소재 때문인지 검이 튕겨서 오히려 기사가 다칠 것 같았거든, 그래서 검을 뽑으려고 했는데 뽑히지 않았어.”
“뭐라고?”
“미리 살폈어야 했는데 사용 못 할 줄 몰랐어.”
“하아…그랬단 말이지. 아니다. 그 기사 덕분에 알아차린 게 오히려 다행인 것 같아. 마물 앞에서 알았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
“맞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왜 안 뽑히는 거지?”
“모르겠어. 혹시 이것도 마법서처럼 마법에 의해 잠겨있는 거 아닐까?”
“흐음, 그럼 녹틸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텐데….”
“한번 연락해 볼까?”
“응, 여기까지 직접 오진 못하더라도 이 근처에 자문 받을 마법사 정도는 소개받을 수 있겠지.”
얼마 전 잡몹을 처치하면서 얻었던 마법 전령 스크롤을 꺼냈다. 스크롤을 펼쳐 리헤로스가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무리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대륙이라 해도 한글을 사용하는 게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요소다.
그의 글씨체는 디지털 폰트처럼 정갈한 바탕체의 소유자였다. 내 또래의 남자들이란 대충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고 지렁이를 연성해대는데 그와 상반되는 이 남자는 역시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유니콘이었다.
‘글씨체도 그렇고…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히 고집스럽다니까.’
그의 고집을 떠올리면서 목 언저리에 맴도는 바람에 간지러움을 유발하는 호기심을 꺼내 보았다.
“…나 궁금한 거 있어.”
“응? 뭔데?”
“왜 이드랑제 밑으로 가지 않았어?”
“아….”
“지금보다 생활은 더 편해지고 고생할 일 없이 강해질 수 있잖아. 사람들이 말하는 거 보니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던데.”
“강해지는 게 물론 목표에 가까워지고 도움은 되겠지만, 강함만 쫓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아아.”
“난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습득하고 싶어.”
“그 마음도 이해된다. 경험으로 학습하는 것이랑 이론은 차이가 크지.”
“그리고 난 아크리스와 여행하는 게 좋아.”
“뭐….”
“네가 나를 많이 보살펴 주기도 하고….”
“그거야 네가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같이 굴어서 그렇지.”
“아하하, 바보 같다니 너무해.”
“사실인데 뭐. 바보.”
스크롤에 내용을 다 작성한 후에 내 손에 쥐여준다. 스크롤에 달린 끈을 감으니 끝의 끝에 매달린 마법 석에서 작고 노란색의 뱁새가 퐁 튀어나온다. 작은 뱁새는 스크롤을 쥐고 있는 내 손가락 위에 쫑쫑 올라앉았다. 실체가 없는 마법 생물이지만 견딜 수 없는 사랑스러움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 네가 날 지켜주는 만큼 나도 널 지켜주고 싶어.
“어?”
“네가 살아갈 이 세계도.”
“뭇….”
얼굴로 피가 확 몰리는 것 같았다. 왜? 나 지금 열받았나? 아닌데.
“무슨 소리야! 바보야! 검을 어떻게 뽑을지나 생각해!”
닭살 돋는 소리 하고 난리야. 사람과 부딪혀본 경험이 없는 어리숙한 사람이었으면 고백으로 들릴법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어느 정도 사회의 때가 묻어있는 어른이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분위기에 휩쓸릴 뻔했다.
뒤늦게 스크롤을 구깃구깃 쥐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화난 노란 뱁새는 내 손을 사정없이 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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