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성질머리 더럽고 재수 없어야 단장 자리에 오르나 봐.”
“크리스….”
“왜. 틀린 말 했어?”
“그게 아니라, 내가 무시당하니까 대신 화내주는 거지?”
“……아니거든?”
“고마워.”
“아니라고 했다.”
삭막한 공간에서 오로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리헤로스의 미소였다.
“도둑 쥐새끼들 시답잖은 대화는 끝났나?”
처렁처렁 소리를 내는 갑옷에서 가벼운 제복의 형태로 환복하고 온 기사단장은 접견실 상석에 털썩 앉고 다리를 꼬았다.
“인성 장난 아니네.”
“네놈 인성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는다만.”
“칼리고. 용건만 말씀하시죠. 저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리헤로스의 물음에 제복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손안에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만지작댄다.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본인이 초대해놓고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이 기사단장이 허언증 환자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감사하기는커녕 명령 질을 하다니. 뭐, 그 정돈 돼야 마군단장을 죽였다는 거짓말을 배짱 좋게 하고 다니는 거겠지.”
“뭣, 거짓말?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우리한테 억하심정 있냐?”
“거짓말 아닙니다.”
칼리고인지 갈고리인지 재수 없는 놈은 당장이라도 하품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입을 열었다.
“네놈은 전쟁터엔 뭐 하러 나왔지? 프릴이 나풀나풀 달린 드레스나 걸치고 영양가 없는 풀떼기를 끓여 먹는 귀족 영애들의 시끄러운 티파티에나 어울리게 생겼는데.”
“이, 이 미친…!”
죽여버리고 싶었다. 나만 모욕하는 게 아니라 한 땀 한 땀 수놓는 드레스 장인과 찻잎을 재배하는 농업인, 찻잎을 가공하는 차장인, 그걸 소비하는 귀족 영애들까지 광역 저격한 게 아닌가. 이 사실을 널리 공표하여 1보당 돌 5개씩 맞게 하고 싶었다. 이로써 이 세계에 도착한 이래로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을 두 번째 겪는 것이다. 내가 화를 내기 전에 리헤로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칼리고! 이 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겠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태도가 영 안 좋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린 그만 가자. 리헤로스.”
“네놈들의 행적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칼리고의 말에 의해 행동을 멈췄고 이목을 끌었다. 그의 목소리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어떤 어그로 200%의 헛소리가 나올지 기대되는 것도 있었다.
“다른 마군단장을 처치해 보여라.”
“아하- 자존심 상하니 부탁은 못 하겠고, 도발에 걸려 수락하게끔 본론 내놓는 건가?”
“부탁? 웃기는 소리를 잘도 하는군. 너희들이 뭉그적거리며 뒤늦게 도착하는 동안 세 지역에 걸쳐 나타난 군단장은 모두 소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하나는 페르킨과 거의 동시에, 나머지 하나는 페르킨이 쓰러지고 일주일이 된 오늘 나와 내 기사들이 섬멸하고 돌아왔지.”
“…잠시만요. 페르킨이 쓰러지고 일주일이 지났습니까?”
“그래. 일주일 전에 페르킨이 소멸한 것을 왕궁 마법사들이 확인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페르킨을 쓰러트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잠을 일주일이나 잤다는 것에 충격받은 것도 잠시, 리헤로스 홀로 페르킨과 싸우는 동안 벌써 군단장이 둘이나 소멸했다니. 이 재수 없는 기사단장과 기사단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인 듯했다.
“내 가장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했다. 주신 크레아누스의 축복을 받은 자가 군단장 페르킨을 쓰러트린 거라고. 그런데 옷에 빵 부스러기나 붙이고 다니며, 신의 선택받은 자를 사칭하고, 능멸하는 사기꾼을 기사도 정신으로 용서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리헤로스가 선택받았다는 걸 못 믿겠으니 믿게 해달라 이거지?”
“아니! 나는 알 수 있다. 너희는 선택받지 않았다! 신의 선택받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면 글라디우스 기사단장인 나 칼리고가 우선이었을 터.”
‘크레아누스가 자길 선택할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 뭐야? …주인공 용사의 첫 라이벌인 건가. 그래서 열등감이 큰 거고?’
“그럼 말씀하신 대로 다른 군단장을 처치해오면 인정해 주실 겁니까.”
“그때 가서 생각은 해보도록 하지.”
“어쩌란 거야. 시키는 것도 판단하는 것도 제멋대론데.”
“하든 하지 않든 너희 자유다. 허언증 환자의 망상을 들어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하겠습니다.”
“뭐? 리헤로스! 우리가 뭐 하러 이딴 놈한테 증명을…!”
“단, 돌아왔을 때 아크리스에게 했던 무례는 사과해야 할 겁니다.”
어그로 먹이 금지라는 말이 있듯이 이놈에게 관심을 끄면 시비 걸 명분도 사라지기 때문에 무의미한 기싸움은 끝난다. 그런데 리헤로스는 어떻게든 증명할 예정인 듯 확답을 받아낸다. 왜 나에게만 사과를 해야 하나, 가장 먼저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업적을 거짓말 취급당한 리헤로스다.
‘내가 리헤로스를 어떻게 키웠는데!’
“흥, 아크리스?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군. 하찮은 놈을 위해 군단장을 처치하고 나를 무릎 꿇리게 만들겠다? 어디 한번 해보시지. 기대되는군.”
“너 무릎 잘 닦아놔라. 내일 당장 연골이 없어지도록 무릎을 꿇어야 할 테니까.”
“내일? 머리가 작으면 뇌가 작다는 말이 있던데 그 이론을 네놈이 증명해 주는군.”
“뭐야?”
“그 단순한 머리로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현재까지 출현한 군단장은 모두 쓰러트렸다. 지금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마군단장을 어디서 어떻게 찾고 증명해 보일지 잘 꾸며 내봐라.”
이 새끼, 군단장이 없으니까 군단장을 없애는 걸로 증명하라는 것이었군. 그냥 인정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바보 취급당한 거다.
‘재수 없는 놈, 그런데 어쩌냐? 아직 내보낼 마군단은 더 남아있는데.’
“아킬라!”
“넵, 단장님.”
“자.칭. 용사님을 그만 배웅해 드려라. 나는 제2 훈련장으로 가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칼리고는 더 이상 우리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기사들이 그의 어깨에 훈장이 잔뜩 달린 코트를 걸어주었다. 우리에게 예를 표하긴커녕 먼저 접견실을 나가버린다. 칼리고가 나가자 아킬라라는 기사가 안절부절못해서는 어서 밖으로 나가자는 듯 손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용사님, 이만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네.”
“…하 진짜 분하네.”
하는 수없이 칼리고의 뒤를 따라나섰다. 용사의 이름을 달고, 용사의 일행으로서 문전박대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훈련소 공터까지 나왔다. 먼저 나왔던 칼리고는 우리 쪽을 무미건조하게 한번 쳐다보다가 방향을 틀어 움직였다.
“맞다 용사님, 앞으로 정찰이 필요한 지역을 모험가, 기사단별로 나눈 게 있는데 아직 공유 받지 못하셨죠?”
“네, 아직 못 들었습니다.”
“그럼 절 따라오세요. 아, 그…. 일행분은 보안 규정상 못 들어오시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찬밥 신세네.”
“크리스. 금방 다녀올게. 아까 빵집 앞에 카페 있었는데 거기에서 뭐라도 마시고 있어.”
“그건 언제 봤대? 알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굳이 나까지 갈 필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리헤로스 말대로 카페에 가기 위해 훈련장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개방된 훈련장 앞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양산을 들고 있는 귀족 영애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알리엔토의 대륙에서는 귀족 가문마다 기사단이 있는데, 그 규모로 부를 과시하기도 한다. 실력이 뛰어나든 외모가 빼어나든 훈련소에서 지켜보다가 영입하는 예도 왕왕 있다고 들었다.
“하아아… 칼리고 님 너무 멋있어.”
“칼리고 경과 혼인할 사람은 누가 될까?”
“과묵하고 차가운 눈빛이 언제 봐도 고혹적이야.”
영애들 속고 있는 거예요. 저 새끼 아가리만 열면 재앙이 따로 없다고요. 가까이에서 그를 경험해 볼 리 없으니 저렇게 아름답게 봐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생긴 건 멀쩡했으니 말이다.
“그보다 뒤에 있는 금발의 남자는 누구지?”
“차림새가 좋진 않은데 미남 아니야?”
“새로 들어온 기사인가? 잘생겼다~ 우리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잘 씻겨놓고 옷 입히면 칼리고 님 못지않게 빛날 거야.”
“줄 서. 내가 먼저 알아봤거든?”
역시 리헤로스의 외모는 대체로 잘 먹히는 것 같다. 그거 하나만큼은 인정이다.
‘이러다가 용사 실직해서 어느 가문 기사로 들어간다고 하면 큰일인데, 서둘러서 마군단을 풀어야겠다.’
마침 방해받지 않을 때, 페로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페로.’
‘넷,네…! 주인니임….’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나한테 잠깐 와봐.’
‘네에….’
페로를 부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최근엔 딱히 페로에게 지시할 일도 없을 정도로 바빴기도 했으니 말이다. 마을의 외진 곳의 공원을 찾았다. 관리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는지 잡초가 무성했다. 대체 세금을 어디에다 쓰는 건지, 대한민국이었으면 구청에 벌써 민원 넣었을 것이다.
머지않아 페로는 내가 있는 공터에 도착했고, 내 어깨가 아닌 맞은편 나무에 착지했다.
“호, 화내지 마세요!”
“응? 화 안 났어.”
“에? 세 군단이나 전멸했는데도 괜찮으신 거예요?”
“그것 때문에 기죽어 있었어? 그거야… 마군단이 전멸한 건 상대편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잖아. 책임을 물으려면 군단을 지휘하지 않고 나돌아다니는 내 탓이 크지.”
“주인님은 더 큰일을 도모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다른 것보다 주인님이 전쟁터에 뛰어드셨다는 이야기 듣고 무서웠어요.”
“응? 그걸… 들었어?”
“그럼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셨다면서요! 그렇게 무지막지한 인간 놈들이 우리 주인님 어떻게 해버렸을까 봐 노심초사했어요….”
내가 전쟁터를 누비며 뛰어든 것은 맞지만 용사 편에서 싸운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다. 오히려 잘 됐다.
“난 끄떡없어. 이런 데서 죽지 않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주인님 잘못되면 저도 따라갈 거예요!”
“불길하게 그런 얘기 하지 마…! 잘 들어. 우리가 저번에 3군단을 한꺼번에 보냈었잖아?”
“네네, 그렇죠.”
“그 녀석들은 더 강해진 상태거든.”
“히이이이…!”
“그러니까 남은 세 군단도 한 번에 풀어.”
어차피 두 군단 정도는 여러 곳에서 소집한 파견군을 포함한 왕국 군, 재수 없는 기사단장이 커버가 가능하다. 한 군단 정도는 리헤로스의 명예를 위해 희생되어도 썩 괜찮은 서사일 것이다.
“알겠어요. 주인님, 이제 정말 돌아오셔야 하지 않을까요? 용사랑 있다간 주인님이 잘못될까 봐 무서워요!”
“걱정하지 마.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히이이잉….”
“뚝.”
“뚝…!”
“잘했어. 그럼 이만 가볼게. 부탁한다.”
“네!”
마지막 군단을 내보낼 지령을 받은 직후여서 그런지 페로의 날갯짓에서도 결연한 느낌이 있었다. 나의 최후도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입에 쓰고 텁텁한 것을 물고 있는 것처럼 턱이 당겨왔다. 리헤로스를 떠올리자 착잡한 기분을 이루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아, 벌써 리헤로스 왔겠는데.’
이미 해는 넘어가 하늘이 다홍색에서 남 보라색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카페는 몰라도 빵집은 워낙 인상 깊었기 때문에 금방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목적지인 카페 앞에 금장으로 잔뜩 장식된 화려한 마차가 세워져 있었고 가게 내부를 구경하는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이 시간에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카페는 보통 저녁엔 사람이 없지 않나?’
겨우겨우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고 모두가 한 곳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드랑제에게 선택받았네. 부러워라.”
“그런데 금발 기사 쪽도 잘생겼어.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장사 아니야?”
그 금발 기사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남자, 리헤로스였다.
그가 어떤 낯선 여성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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