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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24화 (24/127)

24화

어느샌가 나도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잠들기 직전에 분명 아침이 된 것을 보고 눈을 감았는데 정신이 들 때 즈음에 비슷한 온도의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체감상 최소 하루는 지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하루가 꼬박 지났는데 아무도 안 일어난 거야?’

그런데 하루 지난 것치고 나와 리헤로스의 몸 위에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시가 불타고 난 이후였기에 잿더미가 가라앉은 거겠거니 싶었다. 이번엔 특별한 꿈을 꾸지 않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정말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미동도 없는 그는 내 허릴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있었다. 잠긴 목소리로 리헤로스를 불렀다.

“리헤로스. 이제 그만 일어나.”

“….”

“일어나.”

어깨를 흔들자 그는 내 몸에 더욱 푹 파고들었다. 이러는 걸 보니 이미 잠은 반 정도 깬 것 같은데 두들겨 깨울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며칠 전,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과로했죠? 앞으로 무리하지 않게 보호자께서 잘 관리해 주세요.’

이번에도 며칠을 걸쳐 마군 토벌한다고 잠을 한숨도 못 잤기에 기절하듯 잠들었을 것이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게 좋겠지.’

작게 한숨을 쉬고 내 망토를 끌어다 그의 몸 위를 덮어주었다. 예배당 천장에 나 있는 구멍에 해가 가득 차올랐을 즈음에야 리헤로스는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 잘 잤어?”

“응, 네 덕에 온몸에 혈액순환이 안 돼서 죽기 직전이었지.”

“미안. 그래도 덕분에 푹 잤어.”

“그렇게 말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냐?”

“아하하.”

─쿵

“깜짝아! 뭐야?”

갑자기 뒤에 있던 예배당 단상이 힘없이 무너졌다. 뿌연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느낌의 금속 상자였다. 여태껏 봐왔던 투박한 모양의 보상 상자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상자…다.”

“리헤로스. 네가 직접 열어.”

“왜? 내가 연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음… 이왕이면 고생한 사람이 여는 게 좋지 않겠어.”

또 내가 먼저 손을 댔다가 열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됐다. 리헤로스야 지난번 마법서가 왜 열리지 않았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는 역시나 쓸데없는 궁금증을 거두고 군말하지 않고 그 상자로 다가갔다. 그러자 긴 상자는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열렸다.

“크리스, 이거 봐. 검이야.”

“뭐? 웬 검이지?”

“안 그래도 부서졌는데 잘 됐다. 그렇지?”

“그러게. 딱 필요할 때 검이 나와주네.”

상자 안에서 나온 검은 전체적으로 눈부신 백금색을 띠고 있었고 손잡이 부분에 금색 문양의 장식이 박혀있었다. 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형태의 무기다.

‘잘하면 전설급 아이템일 수도 있겠는데.’

“이번엔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

“그래야지. 귀한 물건 같으니까.”

리헤로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빛을 잃고 초라해진 검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새로 획득한 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폐허가 된 마을을 빠져나와 원래의 목적지인 수도 ‘라이오펠’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탈것은 구하지 못했네. 수도까지 가려면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은데.”

“응, 어쩔 수 없지. 우리에게 빌려줄 만큼 여유 있는 곳이 없었으니까.”

“나는 괜찮지만 네가 문제야. 수도까지 걸어가고 난 후에 또 퍼지면 어떡해.”

“네가 걱정하지 않게 컨디션 잘 조절해 볼게.”

“…내, 내가 언제 널 걱정했냐?”

리헤로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자 수풀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는 흰 말과 검은 말이 눈에 띄었다.

“저기 봐!”

안장이 있는 거로 보아 습격당한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말 같았다. 이것이 두 번째 보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리헤로스, 주인 없는 말 같은데 타고 가자.”

“응, 그러는 게 좋겠어.”

신나는 발걸음으로 말에게 다가가는데 리헤로스는 말이 아닌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안 타고 졸졸 따라오고 있어?”

“너 타는 거 도와주려고 했지.”

“아 제발, 애 취급 좀 그만해.”

그의 가슴팍을 때리듯이 밀치고 흑마의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윤기가 흐르는 흑마를 보니 금세 짜증이 가셨다. 이런 멋진 말을 자주 볼 기회도 없을뿐더러 현실의 교통수단은 자전거나 지하철 버스뿐이니 말은 꿈에서나 그리는 로망에 가까웠다.

‘말이라곤 제주도 수학여행을 갔을 때 체험으로 타본 게 전부인데 괜찮으려나.’

천천히 등자에 발을 걸고 안장 머리를 잡아 올랐다. 걱정과 달리 말은 얌전히 나를 등에 태워주었다. 실제 생물과 달리 ‘탈것’이라는 목적으로 시스템화되어 그런지도 모른다. 고삐를 쥐고 가볍게 흔들자 말은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발을 떼니 리헤로스는 곧장 흰색 말위에 올라탔고 금세 옆까지 따라왔다.

“같이 가.”

***

이틀을 걸쳐 야영하다가 수도 라이오펠에 도착한다. 꼬박 일주일이 걸릴 거리를 탈것이 있어 꽤 많이 단축했다.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게 솟아있는 성벽 아래에 창을 든 문지기 병사 둘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니 창을 교차하여 막아선다.

“멈춰라!”

“무슨 일이죠?”

“백성 증서를 보이고 신원을 밝혀라.”

“저희는 다른 지역에서 왔어요. 증서는 없습니다.”

“원래 수도로 드나드는 것도 검문해?”

“물러서! 최근 마군으로 인한 피해로 통행 제한을 시행하고 있다. 신원이 불분명한 자는 들여보낼 수 없다는 왕의 명이시다.”

“리헤로스. 그거 꺼내 봐.”

“응.”

리헤로스는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서신을 꺼내 보였다.

“왕명을 받고 온 용사 리헤로스입니다.”

“흠, 그 문양은… 틀림없군. 들어가도 좋다.”

미간을 구기며 자세히 확인하고 나서야 창을 거두고 진로를 터주었다. 문을 들어서자 성벽 안에 펼쳐진 광경은 어마어마했다.

“엄청나네.”

“수도는 정말 크구나.”

중앙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원뿔 모양의 지형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솟아있는 왕성이 눈에 띄었다. 외부의 어떤 마을과도 비교 안 될 만큼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거인국에 도착한 소인의 기분이 이런 느낌이겠구나 이해가 될 정도의 웅장함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안에서 말을 타고 질주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마방에 맡겼다.

‘현실로 따지면 공영 주차장 같은 곳이겠지. 뭔가 웃기네.’

“크리스, 표지판 보니까 글라디우스 기사단 훈련장은 이 방향으로 가면 될 것 같아”

“그래? 잘 찾았네.”

“칭찬해 주는 거야?”

“일일이 칭찬 듣고 싶어 하네.”

“이해해 줘. 칭찬 고플 나이야.”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붉은색의 깃발이 걸린 포장도로를 걸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고소한 빵 내음이 풍겨왔다.

“맛있는 냄새….”

“크리스? 어디 가?”

리헤로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어찌나 향긋하던지 표지판이 없어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지나쳐 온 마을의 식당과는 차원이 다른 큰 규모의 빵 가게였다. 가판대에 갓구 운 빵이 진열되는 모습을 보고 이성이 마비되었다.

“크리스? 배고팠어?”

“빵…….”

“응.”

“…맛있겠다.”

“아하핫, 들어가자. 사줄게.”

“진…짜? 진짜로? 많이 산다? 엄청 많이?”

“많이 사도 괜찮아. 먹고 싶은 만큼 골라.”

빵 가게 내부를 돌며 트레이에 뺨을 산처럼 쌓아 올렸다. 금화 다섯 닢 정도 지불한 리헤로스는 불편한 기색 없이 빵 봉투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나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가게를 빠져나오면서 생크림이 가득 들어간 빵을 베어 물었고 생크림이 빵 표면을 뚫고 동그랗게 튀어나온다. 리헤로스가 손을 뻗어 코끝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준 덕에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단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게 좋아?”

“몰라 맛있다…. 행복해….”

“크리스는 빵을 좋아하나 보네.”

“어… 그런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청 행복해 보여.”

내 취향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런 것도 같았다. 정제된 탄수화물이 맛없을 수 없지. 리헤로스는 원래의 목적지에서 벗어나도, 지갑이 털려도 그저 배실배실 웃고만 있다. 원래 이 세계에 온 이래로 허기를 느끼거나 밥을 불필요하게 먹은 적이 없는데 현실에서 곧잘 먹었던 빵만 나타나면 식욕이 왕성해진다.

“배도 채웠으니까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가보자.”

“움- 그래. 이제 진짜 다른 길로 안 샐게.”

머지않아 글라디우스 기사단 훈련장에 도착했다. 모든 건물이 거대했지만, 왕성을 제외하고 멀리서부터 눈에 띌 정도로 불쑥불쑥 솟아있는 화려한 건물이 기사단의 건물이었다는 것을 도착하고 나서 알았다.

‘귀족의 저택인 줄 알았는데 기사단이 이렇게 사치스러워도 되나?’

건물 앞에는 시민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탁 트인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 허수아비나 중장비들을 두고 훈련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훈련장 안으로 발을 들이자 많은 기사가 훈련을 멈추고 우릴 보며 수군댄다.

“우리 뭐 잘못한 거 있나?”

“글쎄…?”

“흠흠, 용사 리헤로스. 맞나.”

평기사들과 달리 조금 더 묵직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원래는 바로 기사단 전력에 투입될 예정이었는데 얼마 전, 네가 군단장 페르킨을 쓰러트렸다는 소문을 입수한 기사단장님께서 좀 보자고 하신다.”

“저를요? 그건 어떻게 아셨나요?”

“대박… 리헤로스, 출세하는 거 아냐?”

“흠흠, 자세한 건 단장님과 이야기 나누도록. 접견실로 가봐.”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해요.”

기사들이 뒤로 물러서며 길이 만들어졌다. 말단 기사로 보이는 어리숙한 남자가 앞장서 안내했다. 훈련장을 벗어나 어떤 건물로 들어갔고 긴 복도를 지나 접견실로 보이는 곳에 나란히 앉아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을 기다렸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신분 상승의 길 펼쳐진 거 아니야? 작위 같은 거 받고?”

“대단한 일한 것도 아닌데 뭘.”

“대단한 일이거든? 너는 그게 문제야. 지나치게 겸손하다니까. 군단장 쓰러트리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네 업적을 인정해.”

한창 그에게 잔소리하던 중, 접견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발성이 얼마나 좋은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왕궁에 쥐새끼가 들어왔나? 바닥이 빵가루 천지인 건 나만 보이나?

“죄송합니다. 사용인들이 곧 청소하러 올 겁니다”

“무릇 기사란 청결에서부터 정신 수양이 되는 법이다. 내가 오기 전에 살필 수 없던 거냐? 이런 정신머리로 무슨 검을 다루겠다는 거지?”

“시, 시정하겠습니다!”

“그게 주둥이만 산 대답이 아니길 바란다. 알겠나?”

─끼이이익

큰 문이 양옆으로 젖혀지더니 일개 기사들과 비교할 수없이 화려한 갑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붉은 망토를 천천히 휘날리며 걷는 검은 머리의 남자. 그도 외모가 꽤 준수했다. 리헤로스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여러 명의 기사를 거느리며 절그럭대는 갑옷 소리가 긴장이 가득한 장내를 메운다. 이윽고 남자는 리헤로스의 앞에 멈춰 서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군단장 페르킨을 쓰러트린 용사라고?”

한 점 흔들림 없이 오로지 눈동자만 움직여 리헤로스를 훑는다.

“기저귀도 못 뗀 것 같은 애송이가? 말 같지도 않은 괴소문임이 틀림없군. 시간 낭비했어.”

“…….”

“…이봐, 초면에 무례하네. 가정교육을 허투루 배운 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만.”

“네 이놈! 감히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병사들은 나에게 일제히 창을 겨누었다. 그 창은 내가 아닌 앞을 막아서 준 리헤로스에게 향해있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병사들은 한둘씩 창을 내려 경계 태세를 푼다.

“아아, 됐다. 떠돌이 잡배의 예법 수준은 기대도 안 했다.”

“뭐라고?”

붉은빛 눈동자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빛이었다. 이 세계에 온 이래 낯선 위압감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 새끼… 정체가 뭐야?’

“나는 데반레르 데 칼리고. 글라디우스 기사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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