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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23화 (23/127)

23화

“윽, 크윽…!”

“리헤로스!”

강한 충격파로 인해 그대로 맨땅에 처박힐 뻔했으나, 몸을 비틀어 대각선으로 미끄러져 넘어진다. 흠결 한 점 없는 뺨에 생채기가 나긴 했어도 큰 부상이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귀착해 있었다.

‘부러진 리헤로스의 검.’

RPG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무기를 어찌할 수가 없다. 검신이 짧아진 데에다 더 이상 뾰족하지 않은 무딘 칼로는 페르킨의 두꺼운 갑옷을 꿰뚫을 수 없다. 리헤로스의 표정에서 가시지 않은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X발…!”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을 내뱉으며 장막을 내리쳤다. 장막은 충격을 흡수하여 흡사 방음부스에 있는 것처럼 먹먹한 울림을 만들었다.

‘역시 프렉탈 놈들 사이코패스야.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페르킨의 패턴이 달라졌어.’

군단장 페르킨은 부술 무기가 없어지니 충격파 패턴을 사용하지 않는다. 검을 두 동강 내버리는 무시무시한 스킬을 리헤로스 몸에 직격으로 맞았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생물에게는 사용하지 않나 보다.

그러나 그의 무기가 온전했을 땐 페르킨도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우세한 상황이니 리헤로스보다 큰 대검을 마구잡이로 붕붕 휘둘러댄다. 휘두르는 대로 리헤로스의 얼굴과 몸에는 얕은 열상이 생겨났다.

“크하하하! 용사, 아까의 패기는 어디 갔지? 겁쟁이처럼 도망가고 있잖느냐!”

“큿….”

“나약한 인간은 마족에 대항할 수 없다. 단념하고 목을 내놓아라! 네 목을 마왕님께 바쳐 나의 힘과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겠다!”

‘미쳤군.’

내가 언제 용사의 목을 원한다 했나. 저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페르킨의 으름장에도 리헤로스는 공격을 피하는 데에 집중했다.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나 생각해 내야 한다.

‘던전은 중도 이탈도 불가능해.’

알리엔토 사가의 던전은 보스와 조우한 이후엔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해야만 종료된다. 실제 게임이었다면 전원 선을 뽑아 강제 종료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선 그럴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이 던전 안에서 다른 무기로 교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장소 선정도 예배당이라 무기 대용으로 사용할 마땅한 오브젝트도 없다.

‘설마, 페르킨이 이 장소를 고른 것도 의도적이었나?’

아주 의미 없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리헤로스의 검을 부수고 그를 무력하게 만들겠다는 목표. 용사를 없애버리겠다는 말이 허세가 아니다. 하릴없이 애타는 시선으로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뭐라도 해보자.”

내 쪽을 신경 쓸 틈도 없을 정도로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몰래 스킬 창을 열어 장막에 쏴보았다. 당연하겠지만 그 어떤 흠집도 나지 않고 견고한 모양새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 세계의 한 종족을 군림하는 마왕이지만 시스템은 절대적인 신에 가까운 존재였기에 개입이 절대 불가능했다.

‘더러운 프렉탈 놈들.’

─카랑!

리헤로스는 훨씬 짧아진 검신이 적응되지 않은 지 가볍게 막았던 휘두르기 공격조차 가까스로 막아낸다. 페르킨이 검에 체중을 실어 밀어붙이자 그는 쥐고 있던 검을 놓친다. 만신창이가 된 검은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돌무더기에 팍- 꽂힌다. 떨어진 검으로 시선을 빼앗긴 리헤로스는 페르킨의 몸통 박치기를 막을 수 없었다. 벽돌 무더기 사이에 처박힌 리헤로스는 잔기침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큿, 크하하하! 인간은 나약하다! 우월한 마족 아래에서 지배받아야 마땅하다!”

“…….”

“주제도 모르고 덤빈 네놈의 기개는 높이 산다. 특별히 페르킨 님의 군사로 이용해 주마.”

페르킨의 도발에도 리헤로스는 천천히 부서진 검을 집어 들었다. 손등의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손잡이를 꽉 쥐는 것이 보였다.

“떨고 있군, 무서운가?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겠지. 흐흐흐… 느껴진다. 너를 집어삼킨 공포가. 약하면 강자에게 잡아먹힌다. 그것이 약자의 존재 이유이자 소명! 이 마을도 그렇다. 나의 마군에게 대항할 힘이 없으니 잡아먹힌 것.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이치다!”

그 순간─

‘리헤로스의 눈이….’

리헤로스의 푸른 눈동자가 금빛으로 변했다.

“흐음? 이건 무슨 요기지.”

부러진 검을 쥐고 있는 리헤로스의 손에서부터 금색의 아우라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원래 검날이 존재해야 할 만큼의 길이로 일렁거렸다.

“인간은 네놈들의 노리개가 아니다.”

“크히히하하! 발악해라! 사냥감이 몸부림칠수록 맹수의 이빨은 깊게 파고들어 숨통을 끊어놓으니.”

“닥쳐라!”

그가 이렇게 목소리 높여 분노한 것은 생소한 광경이었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까지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리헤로스는 눈 깜짝할 사이 페르킨에게 돌진했다. 속도가 얼마나 빠르면 그가 지나온 자리에 잔영이 남을 정도였다.

금색의 아우라가 검을 감싸 검기가 되었다. 더는 짤막하고 부서진 검이 아닌 완전한 장검처럼 보였다.

─키잉

“허어?”

“핫!”

몰아치는 리헤로스의 공격에 페르킨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런데도 검이 맞부딪혔을 때, 굴하지 않고 무게를 더 싣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그 큰 거구가 뒤로 퉁겨진다.

“이건 무슨 힘이지! 어떤 얕은수를 쓰는 거냐!”

“네가… 모든 걸 부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리헤로스는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바르게 고쳐 잡고 페르킨 쪽으로 겨누었다.

“부수지 못할 것으로 베어주마.”

“크큭, 그 작고 무딘 검으로 말이냐!”

짧고 가늘게 일렁이던 검기는 장검이 되어 날카롭게 솟아오른다. 리헤로스는 검에 힘이 실리자 지체하지 않고 페르킨에게 달려들었다.

“쥬바르메!!”

페르킨은 다리를 최대한 넓게 벌려 지탱하여 부딪혀오는 힘을 버티려 했다. 검이 다시금 맞부딪히자 아까와는 달리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번쩍이는 스파크가 튀었다.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고음에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카가가가각!

끽, 끼기긱기기기긱─

금빛 검기가 대검의 시퍼런 날을 파고드는 것이 먼발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거짓말…! 이 페르킨의 검은 완벽하다! 그 어떤 것도 부술 수 있단 말이다!”

“하아아아앗!”

─캉!

페르킨의 묵직한 대검은 리헤로스의 것처럼 절반이 힘없이 부서져 버렸고, 그대로 리헤로스의 검기는 페르킨의 가슴 정중앙의 갑옷을 꿰뚫고 들어간다.

“커헉…!

─촤악

“그윽, 큭, 에엑… 어째… 서….”

관통한 검을 뽑아내자마자 검기는 사그라들었고 그와 동시에 검은 투구 안에서 붉은 액체가 울컥 쏟아져 나온다.

“이 몸은…지지 않… 질리가-”

페르킨은 대검을 손에서 떨어트렸고 무력하게 몸이 앞으로 기울자 무릎을 꿇는다. 검은 갑옷은 서서히 재색으로 변하더니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겼다!”

전투를 최대한 눈에 담기 위해 몸을 밀착하고 있었던 장막이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앞으로 굴러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그의 승리에 정신이 팔려있어 어떤 짜증 섞인 감정도 들지 않았다.

─털썩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마음도 잠시, 리헤로스가 무게 중심을 버티지 못하는 마네킹처럼 풀썩 쓰러지고 만다.

“리헤로스!”

곧바로 달려가 그를 품에 안은 채 상태를 살폈다.

“하아… 윽… 크리, 스….”

“왜 그래? 어디 아파?”

물음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마치 다른 사람 같던 그의 금색 안광도 푸르고 맑은 벽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아, 후우우… 정말 괜찮아.”

“그 검기… 마법 쓴 거 맞지? 어저께 녹틸이랑 배웠을 땐 못 썼던 거 아니었어?”

“나도 잘 모르겠어.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해준 걸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야.”

“누가 머릿속에서…?”

마법을 배운 당시, 쓸 수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각성하기 위한 기폭제가 필요했던 걸까. 이 던전이 그런 역할이었고 리헤로스처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면 무사히 넘어가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잘하면 영원히 이곳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정체했을 수도 있겠다.

‘프렉탈이 원하는 용사의 요건이란 리헤로스 그 자체 같아. 본인들이 만든 캐릭터여서 그런가.’

“…크리스?”

“……뭐가 됐든 무사해서 다행이야.”

“나….”

“응, 말해.”

“…잘했어? 멋있었어?”

“하아아… 너는…… 너는! 이 상황에도!”

“아야야. 아파아파.”

주먹을 쥐고 리헤로스의 팔뚝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힘에 겨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가벼운 소리를 하며 잔망을 떤다. 아주 잘나셨다 잘 났어.

“어휴…… 아니다 무사하면 됐지.”

“네 주먹질에 안 무사하게 됐는데. 스으읍.”

“부족하다고? 정신 차리게 더 해줄까?”

“아니야. 잘못했어.”

“옳지. 걸을 수는 있지?”

“팔이 저린 거 빼고는 괜찮아.”

“다행이네 수도까지 가는 길에 널 치료해 줄 만한 마을이 없거든. ”

“그건 걱정하지 마. 나는 그냥….”

“어?”

리헤로스는 내 무릎에 머리를 툭 기댄다. 긴장이 풀린 그의 숨소리는 작은 새의 숨소리처럼 가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해 자연스럽게 손이 그의 뒷머리로 향했다.

“조금 지친 것 같긴 해.”

“…그럼 쉬었다 가자.”

“수도로… 라이오펠로 얼른 가야 하는데….”

“다른 곳은 왕국 군이 잘 막아주고 있을 거야. 너 혼자서 군단장을 처치한 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거야! 전시상황에 큰 기여했어.”

“나 혼자 한 거 아니야. 크리스 너랑… 같이 한 거지.”

“내가 뭘 했다고? 네가 한 건 네가 했다고 생색도 내. 누구한테 공 넘긴다고 아무도 안 알아줘.”

“아하하, 알았어….”

“…….”

대화를 마치고 리헤로스가 몸을 일으키거나, 내가 그를 밀어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서로 기대어 지친 마음을 쉬어주고만 있었다. 내 무릎에 누워있는 그의 눈꺼풀 위로 반짝이는 빛이 들었다.

“눈부셔….”

눈치채지 못한 사이 날이 밝았다. 예배당 위 뚫린 천장 틈새, 우리가 있는 자리 위로 따스한 햇볕이 올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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