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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22화 (22/127)

22화

“그에엑!”

몸통을 뚫린 마군병사는 외마디 비명만 남기고 붉은 액체를 쏟아낸다. 검을 타고 흐르는 마군의 선혈은 리헤로스가 걸어온 길을 검붉게 수놓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금발과 눈부신 그의 외모는 여전히 진창 같은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은 무사할까.”

“괜찮을 거야. 다른 지역은 사병이나 왕국 군이 간 것 같으니까.”

부상자가 즐비하던 첫 번째 마을을 떠나오는 길에 마군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냈고, 다음 마을에서 집결해있던 마군단을 발견했다. 이것이 꼬박 이틀 밤을 새우며 일어난 일이었다.

이전에 봤던 곳도 입에 올리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는데 이곳은 더욱 심각했다. 생존자의 흔적은커녕 마을의 형태도 온전치 않았다. 건물의 터 크기로 추측해 본다면 여태 지나왔던 마을 중에선 가장 큰 마을이었을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큰 마을이 마군단 하나로 황폐해지다니….’

“크리스! 뒤!”

리헤로스의 외침에 달려드는 돼지머리의 마군 병사를 쏘아 맞혔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고꾸라지는 놈에게 다가가 꽂혀있던 화살을 뽑아선 목의 정중앙을 내려찍어 마지막 숨까지 확실히 끊었다. 스스럼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에 조금 머쓱해졌다. 아무래도 이런 궂은일은 그보다는 내가 잘 어울리는 듯싶었다.

“후우… 나 이제 꽤 도움 되지?”

“어어. 엄청나게 도움 된다.”

아양 떠는 톤은 아니어도 자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리헤로스의 말이 퍽 애교스럽게 느껴졌다. 불과 며칠 전, 마왕을 처단하겠다는 선고를 내린 그 마왕이 나인 것을 알 턱이 없으니 이러는 거겠지. 당장은 리헤로스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게 마군 졸개들을 쓰러트렸다.

‘어차피 리헤로스 손에 죽는 건 죽는 건데, 기만했다고 나중에 곱게 죽지도 못하는 거 아니야?’

죄책감 때문인지 몇 번이고 최후를 생각하고 있지만, 점점 최악의 상황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단순 칼에 베이는 거에서 사지가 찢겨나가는 모습을 가상 시뮬레이션 하는 자신이 비참해질 지경이었다. 헌신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니 내가 현생에서 얼마나 큰 업을졌기에 이런 삶을 받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걸로 끝인가?”

“글쎄, 잔챙이들은 모두 처리한 것 같은데….”

더는 파란 휘장을 단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음에도 보상이나 어떤 클리어 안내도 없었기에 의아했다.

“크리스, 저기에.”

리헤로스가 가리킨 방향에 아직 숨을 헐떡거리는 돼지머리의 마군병사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화살촉을 목살에 비스듬히 눌렀다. 놈이 다음 퀘스트 스텝으로 가는 방법이나 목적지를 알려줄 마지막 생존 몬스터 임을 확신했다.

“네놈들 우두머리가 여기 남아있나?”

“케헤헤… 제 발로 목을 내놓으러 들어가려는 건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계실 거다. 교회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의 군단장은 숨는 걸 싫어하시지… 용사 놈과 정면 승부 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셨단 말이다. 크크큭….”

“….”

섬뜩했다. 악의 존재란 어떤 우연한 기회로 만나거나 오히려 선의의 쪽이 찾아 들쑤셨으면 쑤셨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니. 어떤 의도이든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페로가 군단장 놈들은 통제하기가 어렵다고 했던 게 괜한 말이 아니었네.’

마군 병사의 목을 한 번에 깊게 찌르고 나서 얼굴에 튄 혈흔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마군이 교회에서 기다린다니… 위치 선정 한 번 재수 없는데?”

“…크리스, 가보자.”

“보통 놈이 아닐 것 같은데 괜찮겠어?”

“응, 나는 준비됐어. 너는?”

“나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지. ”

무너져내린 잔해들 사이에 교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달린 건물이 보였다. 건물 일부가 무너졌음에도 그 높이가 상당해서 이 지역의 상징적인 건물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군단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그곳이 음산하고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입구에는 알리엔토 대륙에서 주신으로 모시는 크레아누스의 석상이 처참히 부서져 있었다. 종교적 의미가 담긴 상징물을 부순다는 것부터 노골적인 적의와 혐오를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잠깐.”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리헤로스를 불러 세웠다.

“리헤로스,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할 게 있어.”

“응?”

“내가 어떻게 되든 네 몸을 우선으로 지켜.”

“…뭐라고?”

“내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희생해가면서까지 구하진 말라고.”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안 그럼 못 가.”

비스크라 던전에서 리헤로스가 대신 공격을 받고 죽어가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돌발행동 때문에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미쳤다고 그 짓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이번엔 어떤 효과를 가진 몬스터인지 파악도 못 한 상태로 가는 거였고, HP 포션 따위로 그를 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습관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물끄러미 보던 리헤로스는 마지못해 새끼손가락을 마주 건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가락을 풀었다.

“약속한 거야. 어기면 안 돼.”

“으응.”

그의 흐린 대답에서는 확신이 전혀 없었다.

‘이 녀석 지킨 약속도 나 몰라라 하고 달려들겠군.’

그냥 다칠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다. 굳은 다짐 후, 가까스로 매달려있어 제구실하지 못하는 문짝을 지나치고 교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로로 긴 복도는 양옆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부서진 잔해로 인해 진입이 불가해 무조건 예배당으로만 향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중앙에 있는 게 그놈인가?”

“응. 그래 보여.”

예배당으로 향하는 문 건너에 칠흑 같은 검은색 갑옷에 화려한 모양의 파란 휘장을 두른 형체가 우뚝 서 있었다. 틀림없는 마군단장이었고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섬뜩한 자태였다. 말마따나 여태껏 리헤로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마군단장…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

“너도 느꼈어? 영 꺼림칙하긴 한데 그래도 우린 둘이니 한 놈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어.”

“맞아. 너와 합심하면 가능할 거야. 그러니 두렵지 않아.”

“…닭살 돋는 얘기하지 마.”

“응? 어디 가?”

“그냥 물어보지 마.”

그의 등을 꾹꾹 밀어 예배당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의 말만 들으면 몸의 어딘가 간지러운데 어디가 간지러운지 몰라서 긁을 수 없는 그런 답답함이 밀려온다. 간지러움이 가실 때 즈음 그를 따라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시스템 알림음이 울린다.

─띵

[던전]

파괴된 낙원 : 제6군단장 페르킨

[시스템]

사이드킥은 참전할 수 없는 던전입니다.

‘사이드킥 참전 불가? 미쳤네.’

인원 제한에 따라 페널티가 있는 던전은 경험해 봤어도 플레이어를 조력하는 사이드킥이 참여할 수 없다고 못 박은 던전은 처음이었다. 비스크라도 장난 아니었는데, 갈수록 난도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어 당혹스럽기만 했다.

“크리스?”

앞장선 리헤로스는 내 발소리가 멈춘 걸 깨닫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불렀다. 설마, 정말로 진입할 수 없을까 싶어 시스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따라가려고 했지만,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튕겨 나간다.

“왜 그래? 괜찮아?”

“어… 나 들어갈 수가 없어.”

“어째서?”

그걸 네게 어떻게든 설명해 주고 싶다만, 게임의 시스템이니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든 이해할 리 만무했다.

“너만 들어갈 수 있나 봐. 어쩌면 군단장이 설치한 마법일 수도 있겠어.”

“저쪽으로도 들어올 수 없어?”

“잠깐만 시도해 볼게.”

이루어지는 공간은 플레이어를 제외하곤 완전히 출입이 불가한 것 같다. 막을 부수려고 주먹으로 두들기고 화살을 쏴보아도 그 안으로 스르륵 흡수되며 아무런 변화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던 리헤로스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마. 금방 다녀올게.”

“…조심해.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응, 알겠어.”

주먹을 펴 보이지 않는 장막을 짚었다. 내 손에 맞대듯 그의 손바닥이 올라왔다. 그를 이렇게 미련 뚝뚝 남겨두고 혼자 전쟁터에 보내기엔 영 마음이 좋지 않아 손을 뗐고 그제야 그의 손도 천천히 떨어지고 뒤로 물러섰다.

“….”

리헤로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만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만다. 뒤돌아 꿋꿋이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럽고 불안했다.

‘이 모습이 마지막이 되진 않겠지.’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 혹여 예상치도 않은 방향에서 위협이 들어오면 말해줄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보이지도 않은 곳에서 사고당하는 것보단 보이는 곳에서 어떻게 어떤 상황인지 아는 것이 현재로서 최선이니까 말이다.

“후우우우우….”

리헤로스가 놈의 주변으로 다가가니 고개를 쳐들고 긴 숨을 내뱉는다. 리헤로스는 검을 뽑아 들고 페르킨쪽으로 곧게 겨누었다.

“어리석은 인간 용사여, 용케 나를 찾아왔구나. 내게 대적하려는 용기는 가상하게 생각하나 살아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나 파괴의 페르킨이 네 육신을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도륙 내 버릴 테니.”

“네놈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리헤로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맞붙었다.

검을 휘두르는 형식의 기본 공격은 다른 몬스터에서도 보여온 패턴이라 익숙한 데에다 대응이 쉬운 편이었지만, 묵직한 대검이 위에서 아래로 찍어누를 때마다 리헤로스는 무릎이 자연스럽게 굽혀질 정도로 무게를 버티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대검을 튕겨내고 곧바로 떨어지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크윽!”

리헤로스는 다시금 머리 위로 높게 쳐들어 찍어 내리는 검을 피하지 못하고 검으로 막게 되었다.

─즈즈즈즈, 쾅!

페르킨의 대검이 리헤로스의 얇은 검날과 맞닿았는데 강한 에너지가 검을 중심으로 모이더니 발산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다. 그 충격으로 리헤로스가 뒤로 밀려났다.

“으읏, 충격파인가?”

“크크큭, 이런 건 본 적 없겠지.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니까.”

“흣!”

리헤로스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페르킨이 묵직한 대검을 붕 휘두른다. 그는 몸을 낮게 숙여 회피하고 돌아와 검을 고쳐 잡았다. 페르킨은 어깨를 전방으로 향한 상태로 돌진했고 가까스로 피한 리헤로스는 검을 느슨하게 잡았다. 우선은 공격하지 않고 패턴을 익히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론 아까의 충격파 스킬을 제외하고서는 특수한 패턴은 없는 것 같았다. 몸통 박치기, 검 크게 휘두르기, X자로 휘두르기 정도였다.

“리헤로, 끄응…!”

그에게 패턴을 이야기해 주려다가 괜히 집중력만 분산될까 우려되어 입을 다물었다. 불안하더라도 이번만큼은 그를 믿고 지켜봐야겠다. 페르킨은 한 손으로 대검을 붕붕 휘두를 정도로 괴력의 소유자였는데, 충격파 패턴을 할 땐 양손으로 쥐고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강하게 내려치는 모션을 취했다.

‘저거구나.’

마찬가지로 페르킨의 준비 자세를 알아본 리헤로스는 곧바로 검을 들어서 막아냈다.

─즈즈즈즈즈

─콰앙!

─키이이잉

금속이 충격 때문에 빠르게 진동하니 흡사 초음파 같은 높은 소리를 낸다. 리헤로스는 검의 흔들림을 심각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가 들었던 모양이다.

“큿, 하하하하! 눈치챘나!”

눈을 가늘게 뜨며 더 자세히 보려 애썼다. 대검을 마구 휘두르는 루틴이 지나고 다시 충격파 패턴이 왔다. 이번에도 넓은 사정 범위에 드는 바람에 가까스로 검을 들어서 막았지만 이번에 발생한 마찰음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즈즈즈즈즈

까드드드득….

“이 파괴의 페르킨이 부수지 못하는 것은 없다!”

─카강!

‘거짓말…!’

금속 파편이 스파크를 동반하며 공중에 흩어졌다. 리헤로스의 검날 절반이 힘없이 부러진다. 그는 부서져 버린 검을 보며 충격에 빠진 듯했다.

“크하하핫! 죽어라!”

그러나 마음과 자세를 추스를 시간도 없이 군단장 페르킨의 대검이 리헤로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리헤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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