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점멸하는 흰색의 스파크가 당장에 사냥감에게 달려들 것처럼 맹렬히 꿈틀댔다.
“싫다면?”
“그럼 다리라도 잘라서 같이 못 가게 만들어야죠.”
“저런, 리헤로스는 내가 필요할 걸. 나를 해하고 나서 후환이 두렵지 않아?”
겁먹기는커녕 뻔뻔한 소리를 뱉어대니 녹틸은 미간이 더욱 구겨지며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친다. 좋아, 나를 어떻게 할지 얘기해 봐.
“그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죠? 아니요! 리헤로스에겐 당신 대신 제가-”
“스승님! 가지 마여!”
“루…카?”
‘나이스 타이밍.’
당장이라도 내게 그 살벌한 구체를 던질 것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는데 루카가 잠옷 차림으로 나타나선 뒤에서 와락 끌어안아 버리는 바람에 구체는 사그라들고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사실 녹틸을 대놓고 도발한 이유도 루카가 문 뒤에 숨어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 꼬맹이, 언제쯤 얼굴만 가린다고 숨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될까.’
“용사님도 스승님이 필요하겠지만… 제가 더 스승님이 필요해여! 저랑 여기에 있어여!”
“그게 무슨 얘기니? 당연히 쭉 루카와 있을 거란다.”
“그치만… 아크리스 형 대신 용사님이랑 떠날 거란 이야기 아니었어여? 설마 저도 떠나는 거예여?! 싫어여! 여기에서 같이 살아여!”
“아, 아니란다 루카…! 어떻게 여길 두고 떠나겠어. 내가 리헤로스에게 더 좋은 동료를 찾아주겠다는 얘길 하려고 했지.”
“흐에…?”
왕실 사서를 하던 전도유망한 마법사가 수도에서 꽤 벗어난 시골로 내려와 조용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자체만으로 속세에 지쳐있다는 메시지가 강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란 걸 대충 직감하고 있었다. 기획자로 일할 당시 40대 과장들이 게임 업계에 지쳐 치킨집을 차리거나 귀농하기도 했으니까. 이어지는 소란에 리헤로스가 뒤늦게 부스스 몸을 일으키면서 낮게 속삭였다.
“크리스….”
“잘 잤냐?”
매달리는 루카를 달래주느라 정신없어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알라처럼 딱 달라붙어있는 루카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더란다. 둘만 덩그러니 남았고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어지자 맥이 빠져서 리헤로스 옆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루카는 녹틸을 가족처럼 여기는구나.”
“흐음, 가족처럼 여기긴 하는데… 조금 다른 가족이던데.”
“어떤 가족?”
“결혼하고 싶다더라.”
“정말? 그걸 어쩌다 알았어?”
“원래는 비밀인데 못 들은 거로 해줘.”
“하하, 약속할게. 그런데 크리스, 너희 종족 기준으로 너 성인 맞지?”
“당연하지. 안 그래도 나도 궁금했어. 너 몇 살이야?”
“나? 스물여덟.”
생각보다 많이 먹었네. 얼굴에서 보이는 연식은 딱 20대 초반인데 의외였다. 현실 나이로 따지면 딱 한 살 차이다. 물론 내가 연하인 쪽이지만.
“그런데 성인인지는 왜 물어본 거야? 성인식도 안 치른 것처럼 어려 보이냐?”
“아니 그건 아니고 루카 때문에 문득 궁금했거든. 너는 결혼… 생각 있어?”
“아니.”
“즉답할 정도야?”
“응. 결혼은 허울이지 않나 싶어.”
“허울? 왜 그렇게 생각해?”
“글쎄….”
현실에서 이혼 상담 프로그램 애청자였던 영향도 있을 테지만 아마 전 남자친구의 영향이 제일 클 것이다. 아직도 그를 구질구질하게 추억하는 애증. 그리 열렬하게 애정을 준 사람도 없었지만, 못 볼 꼴 다 보면서 헤어진 일도 없었기에 더욱 추억 속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매사에 그와 엮인 과거의 망령을 보며 기준을 세우는 것 같다.
“결혼한다고 다 행복하지도 않은 것 같아서.”
“꼭 행복해야 해?”
“당연하지. 그러지 않을 거면 뭐 하러 결혼해? 혼자 살아도 충분히 즐거운데.”
“그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 생기면 하고 싶어질까?”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 보통 연애하면서 말만 번지르르하지 다 잡은 고기 되면 금세 시들어버리니까.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도 구체적이지 않고, 이것저것 잴 바에 혼자 사는 게 편해.”
“꼭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정곡을 찔렸다. 아직 대한민국에서 동성혼은 불가능하니 제도적 연결이 없어도 같이 살갗을 비비며 동거하는 정도도 내겐 결혼이니까. 백 퍼센트 경험담에서 나온 이야기긴 했다.
“…경험해 보지 않아도 연륜을 가진 사람들은 알 수 있지. 애송아.”
“그래봐야 너희 종족으로 따지면 나랑 또래 아냐?”
“그럴지도.”
“성인이 훌쩍 넘는 나이면 부모님은 뭐라 안 그래? 내가 크리스 부모님이었으면 어떤 애인 데려올지 궁금할 것 같은데.”
부모님이라. 마왕에게 가족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고, 현실의 나 역시 비슷한 처지였기에 간단히 답변했다.
“부모님은 안 계셔.”
“아… 미안.”
“괜찮아.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
갓 태어난 마족보다도 이 세계의 생활을 모르니 현실에서의 내 배경을 마왕의 배경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가족이 없다는 건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내 몸뚱이를 찾아 줄 사람 하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평소에는 먹고살기 바빠서 외롭다던가 박탈감을 느껴 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사려 깊은 그를 위해 화제를 전환해 주었다.
“너는 결혼에 로망이 있나 봐?”
“가정을 꾸리고 싶긴 해.”
“그래?”
얼굴이 흐리게 처리된 여성과 그 옆에 서 있는 리헤로스, 쏙 빼닮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었다. RPG 용사의 엔딩으론 아주 정석적인 모습이군. 이 게임의 엔딩에는 그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려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라 티 났어?”
“…그거 알아? 너 다른 생각할 때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아…? 진짜?”
“응. 그래서 속눈썹이 더 길어 보여.”
“아닌데?”
“진짠데.”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뒤로 빠지기엔 반사 신경이 너무나도 둔해 눈동자만 데록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이런 말 듣는 거 부끄러워하네. 그렇지?”
“부끄러워한다고? 이상한 소리…. 원래 이렇게 느끼하냐?”
“이것 봐. 듣기 부끄러우니까 괜히 톡톡 쏘잖아. 내가 평소에 이러는 거 봤어?”
그러고 보니 여행을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났어도 이렇게 부담스럽게 느끼하게 군 것은 본 기억이 없다. 그럼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역지사지로 생각해 봤다.
“…날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렇지.”
“뭐?”
“반응 보는 게 재밌으니 그러는 거잖아. 맞지?”
“너…….”
“표정 보니 맞네.”
불만스럽다는 듯 삐죽 들어 올려진 그의 오른쪽 눈썹을 보았다. 치졸한 사람으로 만들어 불쾌한가. 뭐 틀린 말 했나 싶다. 고작 일주일 넘게 본 사이지만 성격이 잘 맞아 금방 친해져서 이런저런 장난쯤은 우습게 넘어가는 것 같다. 그가 나의 성격을 많이 받아주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곧이어 녹틸이 서재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오셨어요?”
“수업은… 내일 이어서 하시죠. 괜찮죠?”
“알겠습니다. 그럼 올라가 볼게요. 가자 크리스.”
“아크리스.”
지금 상황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내 이름이 녹틸의 입에서 불려진다.
“잠시 얘기 좀 하죠.”
“….”
진짜 다리를 잘라버릴 속셈은 아니겠지. 정말로 싸우고 싶다면 전력을 다할 생각이다.
문 앞에 서 있던 녹틸은 리헤로스의 발소리가 계단 꼭대기 즈음으로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스킬창을 열어 무엇으로 대응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그는 힘없이 맞은편 의자에 풀썩 앉는다. 그의 얼굴은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고 조금은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 얘길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뭐… 엿들어도 상관없는데, 중요한 얘길 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제가 아크리스를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단 걸 인정할게요.”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은 거야?”
“…….”
침묵은 길었다. 짧았던 리헤로스와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녹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리 잡고 있던 오해를 해소할 만큼 무게감 있고 진솔한 대화였나? 전혀 아니었다. 대화를 청해도 들을 생각이 없었고 속단해버린 그의 마음 어디를 쑤셨기에 태도가 변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헤로스가 당신을 무척 의지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 것 같긴 하다만… 어디에서 그렇게 느꼈는데?”
“…그를 잘 부탁해요. 그는 흔한 모험가가 아니에요. 이 세계를 구할 위인입니다.”
내 질문을 아주 가볍게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한다. 그가 이 세계의 주인공인 것은 알고 있다.
“후우,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정말 리헤로스를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제가 왜 마족을 싫어하느냐 물었었죠.”
“그랬지.”
“루카는 전쟁고아에요. 왕군과 마군의 전쟁으로 지금은 폐허가 된 마을의 아이였죠. 걸음도 못 뗀 아기였을 때였죠.”
“마군이 루카의 가족을… 그런 건가?”
클리셰적 소재였지만 마군으로 인해 한 가정이 파탄 나버렸다는 것에 책임을 느꼈다. 물론 루카가 고아가 되었을 때의 시간대는 빙의하기 전, 원래의 마왕이 지도하던 시기였겠지만, 현재의 내가 내보낸 마군단도 제2의 루카를 만들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아니요. 아이의 가족은 왕국 군이 마군을 잡겠다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잃게 되었습니다.”
“맙소사 그래서 당신이….”
“네, 더는 왕명이라는 목줄에 끌려다니는 충견이기를 거부해 나오게 됐습니다. 그러던 와중, 피난소에서 루카와 임시 보호자를 만났죠. 그녀는 루카의 이웃 주민이라고 했습니다.”
꽤 고통스러운 기억인지 말을 잠깐 멈춰 서는 이마를 느리게 문질렀다. 가벼운 손짓 하나로 와인잔이 허공에 띄워지다가 녹틸의 앞에 놓였다. 그는 와인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나서야 입을 다시 열었다.
“둘이 거처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집에서 머물러도 좋다고 했죠. 그리 평화롭기만 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마족을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나오겠군.”
“…네. 어느 날, 낯선 방문자가 찾아옵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당신처럼 뾰족 귀를 가진 아이였죠.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에 걷는 것도 힘겨워 보였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참전했던 몸이기에 그가 걸친 옷의 의미를 알았죠.”
“마군이었나?”
“그래요. 파란색의 휘장을 두르고 있었죠. 마군이기도 하고 이미 둘을 보살피고 있었기에 거절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루카의 보호자는 다친 자를 못 본 채 지나칠 수 없다고 저에게 부탁했죠. 저는 뛰어난 마법사이니 통제할 힘이 있다고 여겼기에 안일하게도 수락하고 맙니다.”
“….”
녹틸은 연신 와인을 들이켰다. 잔이 비워지면 와인병이 손대지 않고도 공중에 떠올라 기울어지면서 텅 비어버린 잔을 채웠다.
“처음에는 제 말을 잘 따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진짜가 아니었죠. 가장 믿고 받아들여 준 그녀를 살해하게 됩니다.”
“대체 어떻게? 무기 같은 건 빼앗았을 거 아냐.”
“그렇죠. 그를 완전히 믿지 못했으니 무기가 될 만한 건 만지지 못하게 방어 마법을 모두 걸어두었습니다. 그러니 서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더군요. 우리 같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나니 이 은혜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치료사가 되고 싶다며… 그래서 그에게 약초학 서적을 몇 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설마….”
“며칠 동안 숲속에 들어가 느지막이 집에 돌아오더니… 저녁 식사에 독초를 넣었어요. 저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그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루카는 이유식을 따로 챙겨줬을 때라 다행히 피해 갈 수 있었죠.”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악의가 담긴 행위임이 느껴졌다. 고위 마법사인 녹틸은 HP가 높았기에 살았겠지만, 일반 NPC 들은 금세 HP가 떨어져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라. 보육교사 수준으로 루카를 돌보던 이유를 깨달았다. 책임감을 가지고 돌보고 있었구나.
“그 마족은… 어떻게 됐는데?”
“정신을 잃은 사이 이미 사라졌더군요. 루카가 잘못됐을까 두려웠는데… 아이를 건드리진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한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루카의 보호자는 목숨을 잃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지….”
“…이제 됐어. 괴로우면 그만해. 그 말을 들으니 나를 싫어했던 것도 이해돼.”
“대의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왕국도 신물이 나지만, 저는… 마족이란 개체를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이해하기 싫었습니다.”
“그런 거라면 영원히 이해하지 마. 그 분노를 원동력 삼아 루카를 잘 보살펴.”
“괜찮은가요? 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싸잡혀 멸시를 받아도?”
“칼에 베여봐야 아픔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냥 경멸하고 분노하는 거에만 그치지 마. 너와 루카는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하니,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키워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어.”
“…이상한 자예요 당신은. 리헤로스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율 어렴풋이 알겠군요.”
어깰 으쓱였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면에 지적을 자주 받았기에 낯간지러운 칭찬이었다.
“누구에게 마음을 사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냐. 너는 그런 아픔을 겪었더라 해도 나를 믿어준다 했잖아.”
“…확실히 하겠습니다. 당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리헤로스의 눈을 믿는 겁니다.”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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