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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1화 (11/127)

11화

모은 골드로 여관방 하나를 빌려 묵기로 했다. 무일푼일 때보단 많이 벌었지만, 방 두 개를 빌릴 만큼 여유 있는 건 아니어서 트윈베드 룸으로 만족해야 했다.

“3층 끝방이에요. 테라스 맞은편.”

여관 주인이 열쇠를 카운터 위에 올려두자 리헤로스가 계산을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사이 열쇠를 홱 낚아채 계단으로 향했다.

“어? 같이 가. 크리스.”

“징그럽게, 계산하고 와.”

판타지 장르에서 동료끼리 같은 방 쓰는 것쯤은 별일 아니지만 리헤로스와 나란히 침실에 들어서는 그 모습을 상상하자니 묘하게 소름 돋았다. 그윽한 눈빛으로 미소 지으면서 들어가라고 에스코트해 주는 리헤로스? 상상만 해도 느끼했다.

‘3층 이랬지.’

포탈 쓰고 싶다고 중얼대며 올라가던 중, 난간에 기대어 있는 불량배 둘이 눈에 띄었다. 복도가 떠나가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모습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괜히 엮여서 좋은 거 없단 생각에 인적을 숨기듯 계단을 올랐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대화를 멈추고 나를 주시한다.

“휘익~♪”

“아가씨. 혼자 왔어?”

내 뒤에 누가 있나?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딱히 그들의 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매우 어이가 없어 자동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

“뭐야. 남자야?”

“곱상하니 아가씨인 줄 알았네! 와하하!”

“….”

저런 놈들은 안 잡아가나 개 짜증 난다. 무시하고 갈 길을 마저 가려고 했다. 그 옆을 지나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데 놈들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에헤이, 사람이 말을 걸었는데~”

두 놈 중 얼굴에 크게 흉터 나 있는 한 명이 내 팔을 훽 잡아당겼다. 팔이 빠질 것처럼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열쇠가 떨어진다. 어디까지 미끄러져 가는지 눈으로 좇느라 놈들 사이에 끼이게 된 내 처지를 살피지 못했다.

“아니 미친…. 무슨 짓이야?”

“어구 화났쪄?”

“아저씨는 남자도 괜찮은데, 어때? 용돈 좀 벌어볼래?”

‘진짜 죽여버릴까?’

끈적거리는 손놀림으로 몸을 더듬어대는데 점점 허리로 내려가는 감촉이 더럽기 그지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머리끝까지 피가 쏠려 어지러울 정도였다. 가볍게 죽탱이만 날리자는 생각에 놈들의 스탯을 눈으로 훑어봤다

불량배1 / 불량배2

[전투 스탯]

공격력: 728

방어력: 543

치명타 확률: 10

회피: 5

둘 다 한주먹 거리다. 초보자 무기를 착용했을 때 ‘스탯 보정’으로 공격력이 일시적으로 낮아졌던 거지 무기 보정이 없으면 웬만한 놈들은 원펀*처럼 한 방에 때려눕힐 수 있다. 활을 벗어던지고 온 힘을 집중하여 주먹을 옹골지게 쥐었다.

“여기서 벗으려고? 화끈한데?”

‘너넨 뒤졌다.’

“크리스.”

계단에서 막 올라온 리헤로스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뭐야? 좋은 말로 할 때 지나가라?”

“안 들려? 샌님, 꺼지라고 얼른.”

불량배1이 가만히 서 있는 리헤로스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으려고 뻗는데 그 손목을 가볍게 잡아 비틀고는 놈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어 쓰러트린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컥컥대는 불량배1을 가볍게 즈려밟고 불량배2에게 다가온다.

“어린 놈의 새끼가. 말로 하니까 못 알아 처먹네 엉?!”

불량배2는 붙들고 있던 나를 밀어 넘어뜨리고 리헤로스에게 대응하려 했는데 리헤로스는 최소한의 가벼운 동작으로 다리를 쳐서 놈을 넘어트렸다. 그 거구가 공중에 붕 뜨다가 낙하하자 복도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쿠당탕!

“크윽…! 이… 미ㅊ… 히, 히익…!”

맹수가 사냥감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기 직전의 모습처럼 리헤로스의 검이 놈의 목 근처에서 사납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약한 존재라 한들 당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없습니다.”

“히…윽… 자, 잘못….”

“악행은 그대로 돌아갑니다. 이건, 당신보다 강한 제가 드릴 수 있는 교훈이고 자비입니다.”

리헤로스는 검을 검집에 꽂는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열쇠를 주워와 내 손에 쥐여주었다.

“크리스, 먼저 가. 정리하고 갈게.”

“…어, 어.”

얼떨떨한 상태로 먼저 방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 시트 위에 노을이 불그레 스며들어 있다. 그 위로 천천히 몸을 굴리듯 누우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히로인이 겪을만한 RPG 판타지 클리셰를 겪다니. 이 얼굴이 그래 보이나?’

뺨을 잡아 죽죽 늘여대다가 팔을 떨어트리듯 툭 내려놓았다.

“고맙다고 말이라도 할 걸 그랬나….”

혼잣말에 파드득 놀라 제 뺨을 짝짝 두드렸다.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데 뭘. 그보다 리헤로스가 칼까지 겨누며 저렇게 화난 건 당황스러웠다. 나 역시 놈들을 죽이고 싶을 만큼 화났었지만, 내가 100만큼 화났을 때 누군가 200만큼 대신 화내주면 오히려 당황해 말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가장 크게 분개했던 루미 납치 사건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혹시… 내가 납치되거나 잘못됐어도 같은 반응을 보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상한 클리셰에 빠졌더니 머리까지 이상해졌나. 정신 차려 유자현. 리헤로스의 반응이 안 나오면 서운해하기라도 할 거냐.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망상이었다. 눈앞에 아롱아롱하는 노을이 감성을 자극했는지도 몰라 눈을 감았다.

‘아무에게도 마음 주지 말고 내 할 일만 완수하면 돼.’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도미노같이 기억이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다시는 떠올릴 일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이제 그만해라. 내가 얼마나 더 빌어야 해?’

‘잘 가.’

‘다신 볼일 없었으면 좋겠다.’

‘행복해.’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다. 넌 개새X야. 그렇게 말이라도 내뱉으면 속 시원할 텐데. 상상에서조차 그에게 모진 말을 하지 못한다. 가슴이 점점 타오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져 눈을 번쩍 떴다.

“…밤?”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이상하다. 이전엔 그렇게 잠들려고 해도 못 잤는데 설마 잠든 건가. 몸 위에 이불이 덮여있었다. 리헤로스일게 뻔했다. 옆을 돌아보니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금발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언제 돌아온 거지.

‘…주인님.’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페로?’

‘…흐윽….’

‘왜 그래?’

‘히욱….’

리헤로스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방에서 빠져나왔다. 방의 맞은편 테라스에서 페로의 기척이 느껴졌다. 격자창을 당겨 테라스로 나가자 맞은편 나무 위에서 노란빛의 안광이 희번덕했다.

“페로…?”

“…끄아앙! 주인님!”

달려들어 얼굴에 찰싹 붙는다. 녀석의 털이 코며 입에 잔뜩 들어가고 나서야 등 가죽을 쭈욱 잡아당겨 떨어트렸다. 큰 눈망울에서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아니… 무슨 일인데?”

“머릿속에 근육으로만 찬 무식한 마군 놈들이 제가 쭈인님한테 말 제대로 안 전했다구…! 그래서 안 돌아오신다구… 흐아앙!”

“….”

그렁그렁 걸린 눈물을 애써 참으려 하지만 못내 서러운지 울음을 터트린다. 누굴 달래는 데에는 소질이 없지만, 리헤로스가 루미를 안고 달랬던 것처럼 페로의 작은 등을 천천히 도닥여줬다. 녀석이 이렇게 우는 이유는 내가 마왕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안 해서이니 말이다.

“히꾹, 주인님… 돌아오실 거예요?”

“그게…… 마음처럼 안 돼.”

“히이잉…!”

겨우 울음을 그치나 했는데 대답이 시원찮아서인지 턱을 잔뜩 구기며 시동을 건다. 하지만 지금은 리헤로스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거짓말할 순 없다.

“내 지시를 네가 전해주면 되지 않을까?”

페로는 고갤 갸웃거렸다. 이 어린 박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덧붙였다.

“녀석들은 ‘지시’가 필요한 거잖아. 굳이 직접 가서 할 필욘 없는 거고.”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네가 마왕의 전령 일을 톡톡히 해내는 거지. 아주 중요한 역할이야.”

중요한 역할이라는 말에 눈물에 젖었던 촉촉한 눈은 금세 반짝거렸다.

“헤헤,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럼 6군단부터 진군 지시 내려줘.”

“알겠습니다! 어디로 보낼까요?”

프린치피움 다음 지역이 어디였는지 허리에 꽂힌 지도를 펼쳐보니 ‘듀스리아’ 라는 곳이었다.

“듀스리아로 보내.”

“알겠습니다! 6군단의 군단장에게 전달할게요.”

“전략은… 군단장에게 전적으로 맡긴다고 전해.”

“에에… 그래도 되려나요?”

“왜?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그놈들은 마왕님이 안 계시면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는데요?”

“그 정도로 통제가 안 돼?”

“그런 편이죠.”

“흐음… 괜찮아. 너무 무모한 짓 한다 싶으면 이야기해 줘.”

“헤유, 걱정스럽긴 하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페로는 날개를 펴다가 말고 입을 연다.

“주인님, 혹시 용사 인간에게 정든 것은 아니지요?”

“내가 미쳤어?”

아까 했던 망상들이 떠올라 괜히 찔린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때가 되면 정말 돌아갈 거야.”

“이러나저러나 저희는 마왕님이 필요하니까. 서둘러주세요!”

페로는 크게 날갯짓하며 날아오르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페로 말대로 언제까지 마왕성을 떠나있을 순 없으니 내 선에서 어떤 핑계든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명 <분리 불안 리헤로스 독립시키기>.’

자연스럽게 멀어질만한 서사를 고민하며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뒤돌아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코앞에 약간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물체와 부딪히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잡았다. 시야에 들어온 물체는 얼마 전 떠돌이 상인에게 주고 산 리헤로스 내피랑 아주 비슷한 패턴을 가진….

“악!”

“크리스?”

“뭐야? 리헤… 깜짝 놀랐잖아!”

서슴없이 가슴을 더듬은 치한은 내 쪽임에도 못 만질 거라도 만진 사람처럼 손을 떼어냈다.

“왜 그리 놀라?”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봐라 누가 안 놀라?”

“…흐음, 그때도 이랬는데.”

“어?”

“그때도 네가 누군가랑 얘기하는 것 같았는데. 오늘도 비둘기?”

숲에서 페로와 이야기를 했을 때 말인가? 당시에도 마왕성으로 돌아가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는 정신없어서 어영부영 지나갔었지.

“…오밤중에 깨서 헛소리는.”

“또 일부러 세게 말한다.”

“일부러 아닌데? 들어가서 잠이나 자.”

푸스스 웃는 미소가 한없이 따뜻함에도 한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나의 비밀까지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 피하게 된다. 지금은 이러나저러나 심경이 복잡해서 그와 얘기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으니 돌아가서 다시 잠드는 것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는 내 말에도 여전히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크리스 너는 운명을 믿어?”

“…운명?”

술이라도 마셨나 갑자기 감성에 젖은 붕 뜬 이야기를 한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테라스에 배치된 의자에 앉았다. 대화라도 하자는 것처럼. 오늘은 유독 리헤로스의 태도가 이상해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까운 벽에 서 기대었다.

“글쎄. 난 믿지 않는데.”

“왜?”

“…딱히 그 단어에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우린 운명이라며 울고불고 짤 땐 언제고 필요 없어지니 부속품처럼 갈아 끼웠던 과거의 ‘그 사람’이 생각났다.

“안 좋은 기억?”

“그런 게 있어. 구구절절 말하기 민망해.”

“….”

“….”

“…….”

“……하아아~ 진짜 별거 아니야. 누가 운명이니 뭐니 그런 말을 일장 연설해놓고서는 떠나갈 때는 남보다 못하게 떠나가더라고.”

최대한 표정을 죽이고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아까 꿈에서도 본 데에다 현실에선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기억을 들출 때마다 마음이 채 아물기도 전에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게 운명이면 안 믿으려고. 너는? 물어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난 믿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상주의적인 면모를 알아봤었으니까. ‘그’와 비슷하다. 무의식중에 리헤로스의 모습에서 전 남자친구를 연상케 하는 면을 찾았고 그렇기에 그에게 나의 모서리조차 내어주지 않으려도 애쓰고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운명은 완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흔히 생각하는 ‘운명이 찾아왔다’라는 것은 ‘기회’인 거고, 그 기회가 비로소 내 곁에 머무르게 될 때가 ‘운명’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리헤로스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아파 보일 정도로 꾹 쥐었다.

“그래서 늘 기회가 오면 최선을 다할 거야.”

“…그래?”

“너와 만나게 된 이 기회도… 운명이 되도록 노력할 테니까.”

“…….”

“그러니…”

설마.

“나에게 숨기지 말고 네 모든 생각을 알려줘.”

누군가에겐 로맨틱한 말이지만 나에겐 아녔다. 내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확신한 말이다. 되묻기 무서웠다.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겨우 한 단어씩 뱉어낸다.

“…너 혹시……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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