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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0화 (10/127)

10화

그런 일이 있고 사흘 정도 지난 현재로 돌아온다. 자잘한 임무를 마치고 리헤로스가 그토록 가길 원했던 마을 ‘오시튼’으로 향했다.

“크리스, 업어줄까?”

“크리스라고 하지 말랬지. 오시튼 간다니까 아주 들떴구만?”

“누가 그랬어. 애칭으로 불러야 오래 산다고.”

“그건 반려동물한테나 해당하는 거 아니야? 열받네.”

힘든 임무를 마친 후에도 이렇게까지 들떠있는 건 처음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가는지 알기에 그 마음도 이해되지만, 다시금 리헤로스에게 이곳으로 가기 전에 약속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여기 가는 거 마지막이야. 알지?”

“응. 알아.”

“괜히 마음 약해지지 말고.”

“후우, 알았어.”

리헤로스는 저 자신을 다스리는 것처럼 깊게 숨을 내쉬더니 기합이 잔뜩 들어간 채 대답한다.

대도시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초반 지역인 ‘프린치피움’에 있는 도시 중에선 가장 큰 곳이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자 시장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파를 지나 어느 작은 건물 앞에 섰다. 스푼과 포크가 교차한 팻말이 달린 곳이었다.

“알지?”

리헤로스 뒤에 서서는 잔뜩 눈치를 줬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눈웃음을 보이고는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작은 규모의 식당이 드러난다. 4개 정도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젊은 여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바 안쪽에서 식기를 닦고 있었다. 도어벨이 흔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며 인사한다.

“어서 오세… 아? 오랜만에 오셨네요!”

“하하,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 잘 지내요.”

“다행이네요. 근데… 어디 갔나요?”

리헤로스가 목을 쭉 빼며 주방 안쪽을 들여다보자 주인은 작게 웃었다.

“잠깐 식자재 사러 나갔는데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럼 얼굴 보고 갈게요. 마실 거 두 잔 주세요.”

“기다린다고? 소식만 들었으면 됐지. 얼굴 보면 마음 더 약해질걸.”

“아, 아니야 진짜.”

“아하하, 프린치피움 특산물인 딸기로 만든 주스 괜찮으세요?”

“좋네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후다닥 대답해버리면서 날치기 수락을 해버린다. 바로 직전까지 신신당부해가며 약속했던 게 도루묵 되는 거 아닌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노려봤다. 리헤로스는 자연스럽게 의자 하나를 빼서 나를 냉큼 앉혔다. 순순히 그의 손길에 따라 앉았다만 한숨을 푹 쉬고서 완고하게 말했다.

“주스 다 먹을 때까지 안 오면 가는 거다?”

“봐주라, 마지막인데.”

“흐음 어쩔까. 마침 목도 말랐고 딸기 주스니까 먹고 가는 건데, 너한테 져주는 건 아니야.”

“알지 알지. 고마워. 크리스가 최고야.”

이곳은 특별히 계절이 있기보다는 지역별로 기후가 달라지는 시스템이라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낄 새도 없지만, 딸기가 나오는 거 보니 시간선은 리얼 타임제 인지도 모르겠다.

머지않아 음료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두 개의 진홍색의 표면이 보여야 했지만, 한 잔은 흰색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확인해 보니 딸기가 한 잔 만들 만큼만 남아있어서 하나는 우유로 준비했어요. 아니면 조금 기다리시겠어요? 장 보러 간 애들이 금방 올 것 같거든요.”

“아. 우유….”

우유 특유의 맛이 싫어 어릴 때부터 우유 급식을 남기거나 다른 친구들에게 넘기기 일쑤였다. 초코우유 같은 건 먹을 만해도 새하얀 우유는 그 비린 맛이 묘하게 거부감 들었다. 사람마다 입맛에 안 맞는 음식 하나 정돈 있지 않은가? …물론 나 같은 경우엔 그 가짓수가 많아 까탈스럽단 얘길 종종 들었다.

“괜찮아요. 크리스, 네가 딸기 주스 먹어.”

내 반응을 흘끔 보던 리헤로스는 우유를 자기 쪽으로 당기고 주스 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이런 사소한 배려에서 참 다정한 사람이란 게 느껴지지만 배려 때문에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나 우유 먹을 수 있는데?”

“먹을 수 있는 거지, 좋아하는 건 아니란 소리네?”

“허.”

정확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내가 다른 말 하기 전에 재빨리 우유를 들이켜고 씨익 웃었다. 짜증 나, 저 여유로운 미소가 얄미웠다.

─끼익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데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귀에 익은 도어벨이 짤그랑 흔들렸다.

“매그, 저 왔어요.”

짐을 품에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남자는 낯이 익었다. 그도 테이블에 앉아있는 우리를 발견하고서는 잠깐 긴가민가하더니 금세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리헤로스는 곧장 일어나 그에게 다가간다.

“어? 용사님이랑 아크리스 님 아니세요?”

“리키. 오랜만이야.”

“이야, 마지막에 뵀던 게 사흘 전이였나요? 몇 달은 지난 것 같네요.”

“그러게 말이야.”

리키는 곧바로 짐 더미를 옆의 테이블에 내려두고 리헤로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꽉 맞잡은 손은 서로의 존재, 안부를 묻는 느낌이었다.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다.’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왕!”

뒤늦게 문을 들어선 자그마한 형체 또한 눈에 익었다. 잘그락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달려온다. 꼬질꼬질했던 모습과 달리 보송보송 해진 털이 몸집을 더 크게 보이게 만들었고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먹었는지 윤기가 흘러 몰라볼 뻔했다.

“루미!”

“헥헥헥, 왕!”

루미는 리헤로스에게 몸을 던지듯 뛰어들었다. 안아 올리자 사정없이 그를 핥아댄다. 좌우로 몰아치는 꼬리에 무자비하게 맞고있는 리키는 눈을 뜨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리헤로스의 어깨에 얹은 루미의 발하나가 눈에 띄었다. 뜀박질할 때마다 들렸던 잘그락거리는 소리의 근원, 보송한 털이 달린 대신 금속 형태의 발이었다.

“의족은 잘 맞나 보는구나?”

“어휴, 말도 마세요. 처음엔 물어뜯고 벗어버리고 그랬어요.”

고개를 젓는 리키와 그런 사소한 근황마저 마냥 귀엽다고 웃는 리헤로스의 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였다. 가족 같달까. 그 사이에 끼지 못한 채 딸기 주스나 홀짝대는 나는 이방인에 가까웠고 말이다.

‘그래. 너무 마음 주지 말아야지. 어차피 이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할 존재인데.’

다행히 지금은 정체를 들키고 있지 않지만, 엄연히 적대 세력인 마왕이니 말이다. 이런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머쓱해져 눈을 돌렸다. 리헤로스는 동떨어진 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루미. 크리스한테도 인사해야지. 크리스~ 오랜만이에요.”

“나 참. 뭐 하냐?”

말은 이렇게 해도 픽 웃음이 나왔다. 마치 루미가 말하는 것처럼 얇은 목소리로 흉내를 내는 리헤로스가 우스꽝스러웠다. 용사라기보다는 그냥 공원 산책하다 보이는 흔한 팔불출 집사잖아. 의식하려 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향해 해맑게 웃는 루미의 표정과 상반되는 의족이 계속해서 눈에 걸렸다. 안타깝지만 이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미동조차 없던 루미. 그 모습을 본 그 누구도 나쁜 결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곁으로 다가간 리헤로스를 바라보며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리헤로스… 우리는 최선을 다했….”

“아직.”

“어?”

“아직… 아직 심장이 뛰어.”

“뭐라고?”

“아주 미약하지만… 뛰고 있어.”

그 길로 바로 루미를 안아 들고 뛰쳐나왔다. 다행히 눈치 빠른 리키가 마차를 대기 시켜 놓았었고, 곧장 마을의 의원을 찾아갔다. 의원에서 응급 처치 후 고비를 넘겼지만, 다쳤던 오른쪽 앞다리에 더 깊은 상처 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그 과정이 비위생적이었는지 상처는 곪다 못해 괴사했었다. 어쩔 수 없이 절단하는 방법을 택하고 의족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네.”

“다행이야. 루미.”

루미를 치료하는 동안 리키를 경비대에게 넘겼는데 그의 신상을 자세히 조사하자 실종 신고된 상태로 가족이 찾고 있었다. 범죄 조직에 가담했다는 누명은 벗어서 다행이었고 나는 무고한 그를 죽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때만큼은 리헤로스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리헤로스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고 한들 우쭐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비현실적인 인간임이 와닿았다.

“저는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려고요. 두 분… 정말 감사했습니다.”

“루미를 잘 부탁할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보살필게요!”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던 리키는 원래 일하고 있던 가게로 돌아갔고 방랑해야 하는 우리 대신 루미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리키가 돌봐주기로 했다.

…그러고 사흘이 지난 바로 오늘, 오랜만에 재회했다. 리키랑 루미가 투덕거리는 관계여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무사히 적응한 모양이다.

“오늘 시장 다녀오면서 의원에서 루미 진찰받았는데 말씀하기론 한 달 뒤면 방생해도 좋을 것 같대요. 아직 루푸스니스 개체가 소수 남아있는 구역에 풀어줄 예정이라고 하셨어요.”

“다행이네. 루미는 거기서도 잘 지낼 거야. 그렇지? ”

“왕, 우웅.”

그의 어깨에 납작 기대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우는소리를 내며 응석 부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이상한 방향으로 분위기가 흐를까 우려되어 딸기 주스로 입을 축이다가 열었다.

“얌마. 사람 너무 좋아하지 마. 우리 같이 착한 사람 몇 없다?”

“꾸웅….”

현실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같은 종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인간을 찾아 내려왔다가는 또 이상한 사람들에게 잡혀 이용당할 수 있으니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루미에게도 좋았다. 리헤로스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던 것도 다 야생에서 적응해야 할 루미를 위한 말이니 말이다.

“자자, 얼굴 봤으면 이제 그만 가자. 리헤로스.”

“응… 그래야지.”

“다음에 또 오실 거죠?”

“아니. 이제 안 오려고. 정 붙으면 안 되잖아.”

리헤로스가 날치기 대답하기 전에 이번엔 내가 먼저 선수 쳤다. 그는 내 말을 이해하고 있으니 저항 없이 끄덕이다가 루미를 내려놓았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진 못하는 루미도 이번이 마지막임을 직감한 것 같다. 바닥에 내려지자 꼭 끌어안아 주고 싶어질 정도로 낑낑거렸다.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리헤로스가 혹여 다시 루미를 안아 들까 봐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 돼.”

“…응.”

그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듯했다. 루미가 리헤로스의 망토를 물어 죽죽 끌자 리키가 대신 떼어놓았다.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리헤로스를 보니 내가 손을 잡지 않았으면 그대로 용사 그만두고 루미와 같이 살겠다고 징징댔을 게 뻔했다. 이제 정말 작별할 시간이다.

“우린 이제 가볼게.”

“아아, 조심히 가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너도, 루미도 그리고 매그도 잘 지내세요.”

“주신 크레아누스의 은총이 깃들길.”

“크레아누스의 은총이 깃들길.”

리헤로스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문을 밀고 나서자 도어벨이 종언을 고하는 천사의 나팔 소리처럼 들렸다.

“잠시만요! 용사님!”

리키가 곧바로 따라 나오더니 작은 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아까 시장에서 사 온 약재인데, 해독에 좋거든요. 여행 중에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아? 고마워.”

“네에, 그럼….”

리키는 꾸벅 눈인사하고는 식당으로 다시 들어간다. 문이 잠깐 열렸을 때, 안에서는 서럽게 울어대는 루미의 소리가 들려와서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내가 너무 매몰차지 않았나 하는 그런 죄책감도 있었다.

‘아냐, 이건 모두를 위한 거야.’

그렇게 저 자신을 설득시켰다. 이 상황에서 나까지 흔들리면 안 되니 말이다.

“자… 그럼 묵을 곳을 찾아보자.”

“응, 근방에 여관이 있을 거야.”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잔뜩 들떠있던 거에 비해 많이 풀 죽은 게 느껴졌다. 이래서는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리헤로스.”

“나 정말 괜찮아. 크리스 네가 있으니까.”

“….”

이건 마치 루미가 없는 대신 나라도 있으니 망정이란 소리로 들렸다.

‘하아아아… 젠장….’

이래서는 나마저 사라지면 정말 용사를 그만둘 것 같아서 아직도… 애착 인형처럼 그의 옆에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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