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루미를 찾아야 할 것 같아.”
“루미를…!”
“그때까지 계속 몰려들 거야.”
여기까지 대화를 마치고 다시금 몰려드는 도적 떼의 처리에 전념했다. 놈들은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점차 시위를 당기는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남은 시간: 0시간 45분]
‘이제 정말 한계다.’
한계에 다다르자 나의 강력하고도 소중한 스킬들이 떠올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넘사벽 먼치킨 마법사인 척 접근했으면 저 착하고 단순한 남자를 속이면서 사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첫발을 잘못 디딘 제 잘못임에도 머릿속에선 괜히 애꿎은 리헤로스를 힐난하고 있었다. 누군갈 탓하기라도 해야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젠장!”
끊임없이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을 후회하던 중 뒤로 돌아온 도적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도적은 잘 벼려진 단검을 내 옆구리에 찌르기 위해 파고들었다. 급히 몸을 비틀어 방향을 틀었지만, 균형을 잃어 넘어지고 말았고 놈은 거침없이 덮쳐왔다. 몸 위에 올라타고서 치켜세운 단검이 정확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크으윽! 꺼… 져!”
“헤헤, 죽어라!”
─촤악!
피부가 벌어져 나오는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도적은 입에서 검붉은 액체를 울컥울컥 토해내며 내 몸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묵직한 몸을 옆으로 밀어 넘기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니 놈을 쓰러트린 주인공의 손이 불쑥 내밀어진다. 여기저기 손톱이 깨지고 얼룩 한 흉터로 가득 새겨진 손이었다.
“리헤로스…!”
“아크리스,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어서 가!”
“뭐? 내가?”
“너라면… 루미를 찾을 수 있어! 부탁할게!”
“…알겠어!”
그가 이렇게까지 나를 신뢰하고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평소처럼 누가 하느니 마니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바닥에 버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 던전의 구조를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니야. 그럴 만도 해. 앞선 퀘스트가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면 클리어 되는 구조였잖아. 역시 프렉탈 놈들 제정신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뒤통수칠 줄이야.’
당연히 플레이어는 여태껏 파훼하며 학습해온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일쑤인데 여유로운 메인 퀘스트도 아니고 돌발 형태의 긴급한 퀘스트에서 클리어 기조를 바꿔버린다는 것은 유저들을 물 먹이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리헤로스 혼자였다면 당연하게도 클리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본적인 던전의 난이도도 못 맞출 거면서 AI를 개발하기는 무슨, 다른 유저들 말마따나 이 회사는 게임을 만들면 안 됐다. 개발자를 만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섞어 퍼붓고 싶었다.
─쿵!
우뚝 솟아있는 큰 건물 중 하나의 안으로 박차고 들어갔다. 건물의 내부는 나무로 지어졌지만 제법 견고해 보이는 3층의 감옥 형태를 띠고 있었다. 보통의 감옥은 문에 철창이 붙어있어 방 내부가 보이지만, 이곳은 창이 없는 모양의 문에 자물쇠가 걸려있는 모양새였다. 쭉 둘러보며 원하는 인질만 꺼낼 수 없는 그런 구조라고 할 수 있었다.
‘젠장, 번거롭게 됐네. 그래도 잘하면 여기 있을 수도 있겠는데?’
건물 내부를 지키고 있는 도적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놈의 머리에 활을 겨누니 놈은 양손을 들어 저항하지 않겠다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루푸스니스 어디 있어.”
“루푸스니스? 그,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인질을 이런 건물에 가둬놓는 건 맞아?”
“에… 예에… 인질을 가두는 감옥이라서….”
대답을 듣자마자 활시위를 놓았다. 고꾸라진 놈의 허리춤을 뒤져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들었다.
[남은 시간: 0시간 36분]
‘해보자. 할 수 있어.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정직하게 1층부터 차근차근 열쇠로 따서 확인했다. 뒤늦게서야 2층에 올라와서야 리헤로스가 보지 않으니 스킬을 사용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미처 가볍게 문을 부수고 다녔다. 마법이 이렇게 편리한데 그를 의식하느라 쓰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2층을 모두 확인했지만 허탕이었고 적어도 이 건물의 3층에는 있을 거라 작디작은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애석하게도 허탕이었다. 루미가 아닌 낯선 얼굴의 인질들이 건물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남은 시간: 0시간 18분]
‘…서둘러 다음 건물로 가야겠군.’
─콰앙!
두 번째 건물은 처음부터 마법을 사용해 부숴가서 시간을 단축했지만, 머리 위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두 개의 층이 보였다. 제한 시간 안에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불가능하면 어쩔 건데,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야 한다.’
애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가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남은 시간: 0시간 7분]
분명 게으름을 피우고 있지 않음에도 시간은 야속하게도 속절없이 흘렀다. 쉬지 않고 문을 따던 중 눈이 하나 더 있었으면 싶었다. 그리고 나에게 또 하나의 눈이 있음을 깨달았다.
‘페로!’
‘예, 주인님?!’
‘내가 있는 위치로 와서 다른 건물에 루푸스니스 새끼가 있는지 찾아줘.’
‘알겠습니다아!’
중요한 NPC니까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감옥 내부를 계속해서 찾고, 개방된 곳은 페로에게 부탁하여 갈라져서 찾으면 시간 단축이 가능하다. 왜 이리 오늘따라 머리가 뒤늦게 굴러가는지 답답했다.
‘바보. 멍청이!’
현실에서는 소위 말하는 얍삽한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약간의 부정 플레이도 서슴지 않았던 내가 리헤로스와 있다 보니 너무나도 정직하게 퀘스트를 수행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만 같아서 괜한 짜증이 밀려왔다.
─또롱
[알림] 돌발 퀘스트 종료 5분 전 카운트다운은 노출되지 않습니다.
더러운 프렉탈 놈들, 사람을 들들 볶는 데에 능통하다. 그냥 난이도 조절을 못 하는 바보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면 플레이어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지 따위에 심혈을 기울인 게 아닌가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판 고문 지옥인지도 모른다. 불법 경로로 저작물을 즐기고 지식을 취하려 했던 나에게 내리는 형벌과도 다름없었다.
“젠장!”
압박감에 몰아 붙여져서인지 아까보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부숴댔다.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쾅!
어리석은 나를 향한 분노인지,
─쾅!
순진하고 바보 같은 용사를 향한 것인지,
─쾅!
나를 이런 수렁으로 빠트린 프렉탈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발… 나와라… 제발!’
─콰앙!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려 젖혀졌다. 굳게 닫혀있던 문의 경첩이 너덜너덜해져서는 끼익 끼익 흔들리는 소리가 공포영화의 효과음처럼 음산하게 들려온다.
“하아…. 학, 헉….”
이번에 연 문은 이전의 방과 달리 묘한 공기가 느껴져 다음 문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안에서부터 빠져나오는 불길하고 서늘한 한기가 얼굴의 솜털을 쭈뼛쭈뼛 세운다. 동물적인 본능이란 이래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
원래 같으면 수상한 기척에 힘차게 짖을 텐데, 그럴 텐데. 이상하다. 조심스레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 어둠 속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회갈색 털 뭉치가 어렴풋이 보였고 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은 죽음의 여신이 내려와 돌이킬 수 없는 선고를 내린 것만 같았다.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 했던 아주 작은 세계의 종말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머릿속에선 이미 결론이 났지만, 그걸 애써 부정이라도 하고 싶은 듯 육성으로 내뱉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들어가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가 싫었다. 그저 얼어붙은 것처럼 문 앞에서 멍하니 그 형체를 보고 있었다.
멸종 위기종인 루푸스니스라는 특성, 조건 없이 마음을 주던 존재. 알리엔토에 태어난 이래로 마음 붙일 곳 없던 리헤로스에겐 충격 그 이상일 것이다. 나 역시 잠깐이었지만 케르베로스에게 유대감을 느껴봤으니 그 감정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았다.
“…….”
점차 건물 밖의 소란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역시나 추측한 대로 루미를 찾으니 전투가 끝난 걸까?
‘리헤로스가 오기 전에 숨겨버릴까?’
‘그냥 못 찾았다고 하면?’
이런 저열한 방법까지 떠올릴 만큼 그의 사기가 꺾이지 않길─마음이 다치지 않길─바랐다. 하지만 머지않아 멀리서 귀에 익은 보폭 넓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내 곁에 멈춰 서기까지 끝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기는 커녕 그를 쳐다보는 것도 벅찼다. 그를 탓했지만 결국엔 이 모든게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크리스?”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아주 천천히 내부로 들어선 리헤로스는 나와 같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검은 차갑고 높은 소리를 내며 지면을 굴렀고, 그 금속에 반사된 달빛이 형체가 있는 구석을─
─그 어떤 미약한 움직임도 없는 루미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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