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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7화 (7/127)

7화

고요한 숲속에서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린다.

“허억, 헉…”

현실이었다면 숨 쉴 때마다 목에서 피 맛이 느껴질 정도의 강행군이었지만, 다행히도 이 껍데기는 그 지경으로 체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다리 전체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고 살갗이 팽팽히 땅겨와 내일 근육통으로 꼼짝 못 할 것만 같다는 감상은 현실과 다를 것 없지만 말이다.

─한 시간 전

포근한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어둠이 삼켜버린 야영지. 루미와 리키가 누워있던 자리의 흔적만이 그들이 분명히 여기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루미… 리키…!”

“하아아…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하필이면 가장 전투력이 높은 사람 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혀를 쯧 차다가 리헤로스 쪽을 봤다. 무거운 책임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띵

[!][돌발 퀘스트] 한밤의 습격자

[시스템]

미지의 적으로부터 동행자를 구출하세요.

‘이것도 퀘스트냐.’

정말 시도 때도 없다. 그것도 그가 용사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니 유달리 고된 일이 많아진 것 같다. 현실의 게임이었다면 사소한 돌발 퀘스트 정도는 무시하고 넘어가도 될 텐데 리헤로스는 무조건 이행하도록 설계된 모양인지 하기 싫다고 빼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이번 경우엔 리헤로스에게 있어 루미의 존재가 ‘사소한 퀘스트’가 아니므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잠깐이었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여기에 흔적이 있어.”

리헤로스가 몸을 낮추더니 바닥을 살폈다. 손끝이 루미가 자고 있어야 할 자리를 천천히 더듬고 지나간다. 그을린 채 불씨를 아릿하게 머금은 나뭇가지를 들어 올리자 눈앞에 맑은 시스템 음과 함께 창이 떠올랐다.

[타다 만 나뭇가지]

- 불에 타다 만 나뭇가지. 불이 꺼진 지 10분가량 된 것으로 보인다.

리헤로스가 습득한 정보는 파티라고 불리는 동행자에게도 보이는 모양이다. 이번 퀘스트는 수색, 추적의 키워드를 가지고 있으니 오브젝트 설명이 ‘단서’로 사용되게끔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나도 무언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발밑에 훼손되지 않은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찍혀있었다. 일반적인 발자국과 달리 등산화처럼 요철이 있어 바닥이 푹푹 패인 모양새였다. 하지만 내가 조사해도 리헤로스에게 전달되진 않는 것 같았다.

“리헤로스. 여기 봐. 수상한 흔적이 또 있어.”

“발자국?”

[습격자의 발자국]

- 습격자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신발 모양과 크기를 보니 2~3명으로 추정된다. 산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밑창을 개조한 것 같다.

그가 확인하자 단서 창이 떴다. 무조건 주인공인 ‘용사’를 거쳐야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단서를 조합해 보니 신발 모양도 그렇고 어쩌다 재수 사납게 털린 게 아니라 조직적인 움직임일 가능성이 컸다.

“산적일지도 몰라.”

“산적?”

“응.”

알리엔토 대륙에는 이름조차 없는 비공식적 세력이 드문드문 포진해있다. 마을과 꽤 떨어져 있는 산중이기에 암시장이 있을 수 있었듯이 공권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약탈을 일삼으며 영위하는 놈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 산적들의 본거지가 있었다면 짐승이나 여행자들을 낚을 덫이 천지에 깔려있다던 지 불이 필요할 테니 나무를 벤 흔적이 당연하게 있을 텐데 이 주변은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도출한 결론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암시장에서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미행당했을지도 몰라.”

“그럼….”

“하여튼, 자리를 잠깐 비웠다고 노려진 게 아니란 말이야. 어떤 상황이었든 우리는 공격당했을 거라고. 네 잘못도 아니란 이야기와 일맥상통하지. ”

“….”

조금 전까지 자신이 용사의 자격이 있는지 고뇌에 빠져 있던지라 분명 자책할 게 뻔해 선수 쳐서 말했다. 용사님의 그런 점은 참 의롭고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물이 엎질러졌다면 닦으면 된다.’

“리헤로스, 서프라이즈 파티에 초대받았으니 응하러 가야지.”

“그렇지만 단서가 너무 부족해.”

“흐음.”

게임 퀘스트는 아무리 추리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한들 대책 없이 던져놓고 알아서 하라고 하진 않는다. 분명 이어지는 단서가 더 있을 것이다. 그가 단서를 찾아내야만 스토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으니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하나씩 던져보기로 했다. 그 안에 실마리를 찾길 바랄 뿐이다.

“리키와 루미 둘 다 데려가긴 힘들었을 거야.”

“그렇지, 리키는 저항하기 힘든 상태이긴 했지만, 루미는 아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리헤로스는 자신에게 답변을 마친 것처럼 말을 갈무리한 후, 뭐에 홀린 사람처럼 움직였다. 그가 향하는 쪽에 퀘스트 오브젝트의 위치를 표시하는 다이아몬드 모양 지시표가 떠올랐다. 뒤에 바짝 다가서 어떤 단서가 떨어있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루미의 송곳니]

- 새끼 루푸스니스의 송곳니. 유치인 듯하나, 자연스럽게 발치 된 느낌은 아니다.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살점과 피가 묻어있다.

‘…루미가 침착히 단서를 남기는 게 아니라 당했을 상황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군.’

이 단서 안에 소득은 있었다. [인간의 살점]. 저 살점이 리키 것일 리는 만무하고 아직 성체만큼 날카롭지도 않은 뭉툭한 이빨로 범인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나 보다. 루푸스니스가 기개와 용맹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다시금 머릿속에 새기게 되었다.

‘장하다 루미.’

그다지 유쾌한 단서가 아님에도 루미라면 살아있을 거라 확신했다. 리헤로스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입을 열었다.

“아크리스, 핏자국을 찾아보자.”

“알았어.”

우리는 서로 10미터가량 떨어져 걸으며 수색에 나섰다. 단서가 훼손될라 무성한 수풀은 잘라내지도 못하고 걷어내며 나아가니 다리에 척척 감기는 식물의 줄기들이 피로감을 느끼게 했다. 각자 작은 횃대로 길을 밝혔지만, 야심한 밤의 산중은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맵핵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그러던 중 조금 떨어져 있는 리헤로스의 횃불이 쑥 낮아졌다. 곧이어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데시벨로 나를 불렀다.

“아크리스!”

“찾았어?!”

[풀잎에 묻은 수상한 피]

- 누군가 흘린 피다. 상처를 지혈하지 못한 채 이동을 한 모양이다. (이 단서는 일정 시간 지나면 휘발됩니다.)

눈앞에 단서 창이 뜨자마자 그가 있는 위치에서 5m 간격으로 다이아몬드 지시표가 주르륵 떠올랐다. 다이아몬드로 수놓은 길처럼 말이다.

‘다행이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그는 가자는 외마디를 던지고 바로 달려나갔다. 나무뿌리나 덤불에 걸려 휘청이더라도 금방 자세를 고쳐 뛰었다. 방해되는 것은 제치고 나아가겠다는 집념 하나로만 움직이는 철인 같았다.

…여기까지가 한 시간 전의 이야기다.

무작정 뛰고 또 뛰었다. 아득하게 펼쳐진 지시표의 끝을 목표로. 우리가 수색하는 사이에 이렇게 멀리 갔다니.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루미는 그 귀하디귀한 루푸스니스의 새끼이기 때문에 어디로 빼돌려질지, 아니면 최악의 시나리오로 향할지 모든 게 불안감으로 연결되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루미 걱정만 한 게 아닌가? 리키는 어떻게 됐지.’

뒤늦게 리키의 희미한 존재감을 떠올렸다. 리키는 성인 남성인데 루미가 그렇게 저항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미심쩍었다. 여태까지 발견한 모든 단서가 루미와 관련되었기에 리키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그들에게도 손이 발이 될 정도로 빌면서 목숨을 구걸했는지 심히 궁금해졌다.

‘리키가 설마… 그들과 한패일까?’

우리가 그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이 천천히 번졌다. 만일 이 사건에 리키가 가담했다면 리헤로스 대신 내가 검을 잡아 그를 처단할 것이다.

리헤로스의 뒤를 쫓으며 머릿속으로 수다스럽게 생각했다. 몸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지각은 저 멀리 날아가 있어서 리헤로스가 갑자기 멈춰 선 것에 대해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뒤쪽으로 무게를 실어서 멈추어 서려고 애썼지만, 관성 때문에 오히려 튕겨 나가 그의 등에 얼굴을 꾸욱 처박았다. 부딪히니 그의 몸도 살짝 기우뚱했지만, 오히려 팔을 뒤로 뻗어 잡아주었다. …오늘은 유독 리헤로스와 접촉할 일이 많은 것 같고 영 체면이 말이 아니라 민망해졌다. 그의 등을 밀어내고 나서야 물어보았다.

“…왜 갑자기 멈춰?”

“핏자국이 끊겼어.”

선명하게 빛나고 있어야 할 다이아몬드 모양의 지시표가 더 이어져 있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이전의 핏자국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휘발된 건 아니고 핏자국이 데려다준 다음 단서의 위치가 이곳이라는 뜻이렷다. 핏자국 외의 다른 단서를 찾아야 한다.

“하아… 또 조사인가?”

“힘들겠지만 부탁할게. 아크리스.”

“어쩔 수 없지.”

그런 말은 됐다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온갖 나무며 수풀이며 덤불이 무성한 숲을 나와 들판같이 비교적 트인 공간이기에 시야가 확장되었다. 선명한 달빛이 횃불보다 밝아서 멀리 가지 않아도 확연히 눈에 띄는 흔적이 보였다.

“리헤로스. 저거 누가 봐도 몸싸움 흔적이지?”

내 말에 곧바로 흔적에 다가가더니 몸을 굽혔다. 이번엔 두 개의 단서가 동시에 떴다.

[몸싸움 흔적]

- 무언가 수풀 위로 구르거나 눌린 것 같다. 강한 힘이 작용한 모양인지 풀이 뽑혀있기도 한다.

[이동 방향]

- 발자국은 없지만, 풀이 누운 방향을 보아 두 갈래로 흩어져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도망쳤을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

“여기서 더 흩어지면 안 돼. 같이 행동하자.”

“그럼 어디로 갈까?”

“이런 말 하면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뭔데?”

“이쪽으로 가면 실마리가 나올 것 같아.”

두 갈래 중 한곳을 지목했다. 풀이 덜 누워있는 방향이었다.

“나올 거야 분명히.”

내가 수긍하자마자 그가 마음을 정한 모양인지 끄덕였다. 그러자 틱- 하는 스위치 음이 들리더니 지시표 대신 내비게이션처럼 바닥에 하얀 선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이 세계의 사는 사람들은 이게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겠지?’

이곳은 현실만큼이나 생생함이 느껴지지만, 때론 게임적인 인터페이스가 나오면 가상의 세계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점점 익숙해지는 게 불편했다. 이러다가 정말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아서.

그렇게 선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작은 동굴 앞에서 끊겨 있다. 크기를 보아하니 산적들의 은신처는 아닌 것 같고 어쩌면 루미가 도망쳐서 은신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과 동시에 그렇게 된다면 역시 리키가 놈들과 한 패거리였을 수도 있단 추측은 기정사실로 되는 것이다. 물론 둘 다 도망쳐 나왔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겠지만. 몸을 숙여 오리걸음 체벌 당하는 것처럼 일렬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크윽, 좁네.”

“발 조심해 아크리스.”

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가장 끄트머리에 당도하자 입구보다는 넓은 공간이 나와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는데 웬 수상한 그림자가 황급히 구석으로 숨는 게 보였다.

“누구야? 나와!”

신중히 살피는 리헤로스와 달리 성질이 급해 냅다 고함을 질렀다. 검은 그림자가 궁지에 몰린 초식동물처럼 가늘게 떨리며 모습을 조금씩 드러냈다.

“리키?”

“요, 용사님…? 아크리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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