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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5화 (5/127)

5화

“쿠,에에에엑!”

브라가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목덜미를 짓누르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린다.

바닥으로 착지하자마자 숨 고를 틈도 없이 조금 거리를 벌려 브라가를 올려다보았다. 가슴 정중앙을 관통한 은색의 검날이 눈에 띄었다. 입에서 피를 울컥 토하고는 그대로 앞으로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 뒤엔 리헤로스가 서 있었다.

‘스킬 사용하기 직전이었는데, 다행이네. 한쪽으로만 시선이 쏠리면 처치할 수 있는 거였는데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다행히도 스킬이 시전 되기 직전에 스킬 대상이 사망하여 발동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정체가 들통나나 싶었는데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어쩐지 내가 바라는 대로 이 세계가 흘러가는 느낌도 들고 웃음이 나왔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리헤로스는 내가 죽는 것을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크리스…!”

“절체절명의 순간 용사 등장이라니. 멋있는데?”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자니 멋쩍어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웃음기는커녕 브라가 몸통에 박힌 검을 회수하는 것도 잊고 내게 달려왔다.

“괜찮아? 어디 다쳤는지 봐봐.”

“어어 괜찮아. 아무 데도 안 다쳤어. 봐, 쌩쌩하잖아.”

너무 걱정하기에 적당한 말을 돌려주었다. 내 말에도 리헤로스는 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 했다. 손자국이 파랗게 난 내 목덜미를 연신 쓰다듬다가 다른 상처가 있는지 살피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고른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부도덕한 자에게는 무자비한 것, 그 차이점에서 오는 묘한 신선함.

‘정말 극적이네.’

그렇게 여러 번 살피고 난 후에도 반복문 연산을 하는 컴퓨터처럼 계속해서 괜찮냐고 물었다. 대꾸하기도 지쳐 그를 팔꿈치로 살짝 툭 밀어 지나쳐왔고 떨어트렸던 무기를 주워들었다.

‘원거리 무기도 좋지만, 단검 정도는 소지해야겠는데…. 근접 대처에 취약해.“

─끼익

일순간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곧바로 활시위를 당겨 놓았다.

─콱

나무 선반 아래쪽에 박힌 화살이 반동으로 인해 잘게 흔들렸다. 그 옆엔 의문의 더벅머리 남자가 엉거주춤한 사족보행 자세로 굳어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앞치마를 두른 꼴을 보아하니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 같다. 남자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삐거덕대는 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우리 쪽을 올려다본다.

“사, 살려주세요…!”

“동물의 목숨은 하찮아도 네 목숨은 소중한가 봐?”

“그,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 그냥 일개 조수일 뿐이에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더벅머리 남자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동료들이 몰살당한 현장에서 그 누가 자신이 가담자라고 술술 불겠나. 이 이상 귀에 담기에도 성가셔서 화살을 뽑아 놈에게 겨누려는 찰나 리헤로스가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무슨 짓이냐는 물음 대신 눈썹을 삐죽 올리니 내 어깨를 천천히 도닥인다.

“잠깐만, 아크리스.”

“왜?”

“억울한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들어보자.”

“이런 데에서 일하는 놈이 거기서 거기지. 들을 필요가 있어?”

질질 짜던 남자는 리헤로스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숨도 안 쉬고 말을 우다다 늘어놓는다.

“흐으윽! 요, 용사님! 저는 인신매매 당한 후 이곳에서 보수는커녕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원치 않은 일을 한 거예요. 이대로 억울하게 죽을 순 없습니다…!”

“….”

“…하아.”

오늘 안타까운 사연의 날인가? 현실에서 플레이할 당시엔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놀라웠다. 어쩌면 히든 퀘스트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당장 검증할 길은 없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착취를 당하던 억울한 사람을 죽일 뻔했던 것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욱하는 나에게 가끔은 이런 리헤로스의 공감을 잘하는 면이 필요했다.

“…후우. 결백을 증명하고 싶으면 도망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도망가는 거 들켰다간 머리통을 화살로 장식해 줄 테니까. …리헤로스, 나랑 얘기 좀 하자.”

화살을 도로 집어넣고서 리헤로스의 팔을 잡아채 질질 끌어왔다. 그의 바짓단을 붙들고 있던 남자는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 쪽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떻게 할 계획이야?”

“….”

“흐응?”

답을 재촉하자 그는 고민에 잠겼다. 피바다에서 굴렀음에도 여전히 맑고 파란 눈동자를 움직이던 그는 결심한 듯 초점이 돌아왔고, 내 손끝을 슬며시 잡는다.

“이 근방에 작은 마을이 있었지.”

“그랬지.”

“그곳 경비대에게 인도하자. 정말 납치된 건지 불법행위를 저지른 건지 사실 여부도 확실하지 않고, 범죄의 경중을 우리 선에서 판단할 수 없으니까.”

사연을 듣고 동정심에 풀어주자 든가 모르는 척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하긴 우리의 목표는 조직을 토벌하는 것이었고 그 안에서 발생한 2차 피해자가 무고한 지 아닌지는 국가 차원에서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보다는 감탄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오오 의왼데?”

“왜?”

“왜냐니, 아까 강아지 주운 것처럼 저 남자도 데려가 키우자고 할 줄 알았지.”

“…뭐?! 절대 아니야!”

소스라치게 놀란 리헤로스를 보면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첫인상이 워낙 강렬했던지라 그를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 정도로 생각했기에 객관적으로 명쾌한 답이 나올 줄 몰랐다. 이 세계의 악당들은 리헤로스라는 용사를 만나서 다행인 줄로 알아야 한다. 나였으면 벌써 몰살 엔딩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으니 리헤로스는 손끝만 잡고 있던 모양새에서 내 손을 감싸듯 잡더니 저도 씩 미소 짓는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데려가 키우는 거?”

“그럴 리가! 경비대에 인도하기.”

“하하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까지 조금 전까지 포악한 던전 보스를 썰어버리던 용사가 맞나 싶다. 별수 있겠어. 이 세계의 주인공은 용사님이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 줘야지. 웃을 만큼 다 웃고 나서야 그가 여태껏 붙잡고 있던 손에서 빠져나와 눈물 자국 범벅인 더벅머리 남자에게 다가갔다.

“손.”

“…네, 네?”

그렇게 말했지만, 남자가 손을 내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휙 낚아챘다. 허리에 매달린 가방에서 로프를 꺼내었고 그의 팔목에 단단히 감았다.

“아크리스?”

“이렇든 저렇든 아직까진 혐의를 벗지 못한 용의자니까. 묶어둘게. 말로는 도망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이, 이렇게 해서 저를 믿어주신다면 기꺼이요!”

리헤로스는 안도의 한숨인지, 여전히 불신이 큰 내 모습을 못마땅해서 낸 것인지 모를 조용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상하고 포용력이 넘치는 스타일이라면 나는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당장은 안전할지 몰라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내가 예측해서 위험요소를 줄여야 했다.

’이런 면에서 기획자 직업병이 도지는 것 같네. 예측, 예방, 대처는 필수지.‘

유*브 알고리즘에 뜨길래 무의식중에 봤던 ‘풀리지 않게 로프 묶기’ 영상을 떠올리며 남자의 양손을 옴짝달싹 못 하게 포박하고, 길게 줄을 늘어뜨려 잡고 다니기 편하게 포승줄 형식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더불어 착한 리헤로스가 대신 악독한 내가 잡아끌고 가기로 했다. 누가 봐도 범죄자를 인도하는 모양새임에도 더벅머리 남자는 큰 불만 없었고 처음 마주했을 때에 비해 얼굴이 많이 피어있었다.

“자, 일어나봐.”

“넷, 네에.”

더벅머리 남자는 줄을 잡아당기자 천천히 일어났고, 그가 일어난 자리 뒤편 선반에 투박한 모양의 상자가 보였다. 이 던전의 퀘스트가 완전히 종료된 것을 알리는 듯, 찰그랑 소리가 나더니 상자가 입을 쩍 벌렸다. 어두침침한 실내에서 찬란히 자태를 뽐내는 금은보화들이 시야를 빙글빙글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눈부셨다.

‘보상 상자!’

“아크리스, 상자가 있어.”

“어. 나도 보여.”

“이렇게 많은 금화는 처음인데, 이것도 혹시 도난품일까?”

“엑, 그럴 리….”

“저건 이 주방 수익금이에요. 범죄자들에게 돌려줄 게 아니라면 용사님이 가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말?”

겁에 질려있던 남자는 어디로 가고 기계적으로 또박또박 대꾸했다. NPC가 말해 주는 확실한 보상 상자였다.

“그럼 우리가 좋은 일에 쓰는 게 좋겠네. 그렇지 리헤로스?”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예요. 이놈들 더럽게 번 돈인데 선량하신 분들께 돌아가니 오히려 제 속이 더 시원하네요!”

“내가 말했지. 네가 무보수로 일을 하면 다른 모험가들이 무보수로 일하게 될 거라고. 이것도 네 업적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억지로 빼앗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응. 알겠어.”

그는 주인 없는 돈을 습득한다는 지점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신 앞장서 보상을 내 가방에 옮겨 담았다. 이러면 네 마음이 좀 편해질까? 하는 얼굴로 그를 삐죽하게 쳐다보니 미안한 듯 눈썹을 구부려 미소 짓는다. 하여튼, 죄지은 강아지 같은 표정은 잘 지어요. 이 도덕적인 남자는 언제쯤 게임 속의 보상 체계를 학습하게 될까.

“이제 가보자. 루푸스니스는 잘 버티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맞다. 서둘러 가자.”

“히이이 그 무서운 루푸스니스가 있나요? 물지 않아요?”

“아, 아직 새끼야. 엄청 귀여워.”

“새, 새끼군요. 그래도 엄청 사납다고 하던데….”

어쨌든, 탈출 못 한 동물도 없고 암거래 상도 모두 처치 완료했기에 보상이 매우 쏠쏠했다. 슬라임 덩이 따위를 주워다 팔지 않아도 포근한 여관에서 묵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게 했다. 그러던 중 리헤로스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도 비로소 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먹을 입이 둘이나 늘었었지만─ 이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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