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크리스!”
“어, 이쪽이야.”
각기 다른 공간에서 목소리만 교환한다. 드문드문 좁은 통로가 보이지만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곳 흔히 미로라고 말하는 형태의 던전이다. 목소리의 크기를 가늠해 보니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갈래 길이 나왔는데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르겠어. 아, 네가 망토 두고 간 곳이야.”
“거기라면… 오른쪽으로 돌기만 하면 돼.”
특유의 성큼성큼 걷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모퉁이에서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금발 머리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다. 익숙한 얼굴을 보니 반가운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길 찾기 표식으로 뒀었던 망토를 건네주었다.
“안 잃어버리고 잘 왔네.”
“네 덕분이지.”
리헤로스는 길 찾기만 못할 뿐 이해 능력은 좋다.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눈치껏 금세 알아듣고 행동한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기업의 인재상 그 자체 아닐까. 그가 현실의 사람이었다면 협업하기 좋은 사람일 거라고 장담했다.
“미로를 이렇게 빨리 간파하다니, 아크리스는 길을 잘 찾는 것 같아.”
“뭐 그런 편이지.”
사실 이곳은 현실에서 직접 플레이해봐서 어렵지도 않았다. 일정 시간마다 길이 변하는 미로 형식의 던전인데, 처음에는 불규칙적인 구조인 줄로만 알고 초반 지역 퀘스트임에도 악명이 자자했다. 하지만 불굴의 K-게이머들은 머리를 모아 며칠 밤을 새우며 유저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수집했고 가짓 수가 많긴 하지만, 일정한 규칙에 따라 동작함을 알아내게 된다. 이 구간에서 오래 헤맸기 때문에 온종일 유저들이 만들어놓은 공략 페이지를 정독하다 못해 외우는 지경에 이르러서 수월했다. 더 지체할 것도 없이 녹이 잔뜩 낀 철제문을 당기자 온갖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이 던전의 테마는 '알리엔토 대륙 내 보호받는 희귀종을 무단으로 포획, 거래, 취식하는 암시장 소탕' 퀘스트다. 뒷세계에서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그런 은밀한 공간이라는 설정으로 일반 용병이나 주민을 통해 받는 게 아니라 왕실에서 내려온 지령 퀘스트라서 클리어했을 때 보상이 매우 짭짤하다. 주점에서 듣기론 귀족들도 암암리에 먹으러 온다던데… 귀족들부터 조지면 안 되나? 귀족들에게 혁명의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어진다.
하여튼, 이 퀘스트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암거래상과 불법 음식 제조업자들 처치하기
두 번째, 포획된 동물들 탈출시키기
보통 업자들을 처치한 후, 동물을 느긋하게 탈출 시키는 게 편할 거라 생각하지만, 오산이다. 동물들을 먼저 풀어주지 않으면 타임 어택이 발생하는데, 1분 지연마다 업자가 한 명씩 던전을 탈출해서 동물을 들고 도망치는 필수 연출이 있다. 그렇게 일정 마릿수가 빼돌려지면 그 수량만큼 퀘스트 보상이 줄어들기에 꽤 까다로웠던 기억이 있다.
‘이미 아니까 두세 번 트라이 안 해도 돼서 너무 좋네.’
인기척이 느껴지자 동물들은 맹렬히 짖어댔지만, 겁에 질려 구석에 몸을 말고 있는 동물도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을 목도한 리헤로스는 잠시간 넋이 나간 듯하다 금세 앞장서 빗살이 걸려있는 철장들을 열었다. 그리고 난 후, 열린 철장을 살피며 겁에 질려 빠져나가지 못한 동물이 있으면 손수 밖으로 옮겨 방생했다.
“후우, 드디어 허리를 펴보네.”
거진 100평가량 되는 공간을 모두 확인하고 숨을 돌렸다. 이제 더 큰일이 남아있으니 서둘러 리헤로스를 찾았다. 그는 품에 무언가 끌어안은 채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아크리스, 여기 봐.”
“어?”
루푸스니스의 새끼였다. 현실로 치면 늑대개인데, 알리엔토 사가 내의 설정으론 피와 심장을 요리해서 먹으면 루푸스니스의 기개와 용맹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미신이 대대로 내려져 오는 바람에 닥치는 대로 잡아먹혀 멸종 위기가 된 종이었다. 이렇게 작은 새끼까지 포획하다니 인간 말종이 틀림없다. 리헤로스의 망토에 폭 둘러싸여서는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다리를 다친 것 같아. 이대로는 멀리 못 갈 거야.”
“…그럼? 어쩌려고?”
설마 하는 얼굴로 팔짱을 껴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너 하나 데리고 다니기에도 빡빡한데 짐승까지 덤으로? 절대 안 돼. 미간을 구겨 완고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아크리스. 부탁이야. 우리가 데려가자.”
“끙, 낑 끼잉….”
애절한 표정을 짓는 거구의 남성이며 품에 안겨 낑낑대는 새끼 루푸스니스가 모진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진짜 못 산다 내가.’
“…근처에 마차 있던데 거기에 두고 와. 임무 끝나면 데려가게.”
“정말?”
“이대로 야생에 풀어두면 얼마 못 살 거 아냐. 회복되는 대로 방생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고마워. 아크리스.”
“알았으면 빨리 갔다 와. 일 마무리 지으러 가야지.”
밝아진 얼굴의 리헤로스는 그 핏덩이를 소중히 끌어안고 마차를 찾으러 나갔다.
아니, 생각해 보니 본인이 데리고 있고 싶든 키우고 싶든 자기 마음 아닌가? 내 눈치를 슬슬 보면서 허락 맡는 꼴이 비 오는 날 강아지를 주워온 자식을 보는 듯했다. 이마를 짚으며 이 관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되돌아보았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기도 줬지만 과하게 의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다가 내가 떠난다고 하면 펑펑 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금발의 장신 남성의 눈물이라니 상상해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리헤로스를 상상 속에서 잔뜩 울리고 나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크리스?”
“어, 왔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웃으면서 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우는 걸 상상해 봤다고 말할 순 없으니 대충 얼버무리자 더 캐묻지 않았다. 그와는 시답잖게 말꼬리를 물고 무는 짓을 하지 않으니 좋았다.
“가자.”
“알았어.”
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아까는 리헤로스가 반대편에서 버튼을 눌러줘야 지름길이 열리는 퍼즐이 있어 각자 들어왔지만, 암시장으로 가는 길은 특별한 장치가 없어서 발을 맞춰 걸었다. 리헤로스가 미로 중간마다 보초 서는 암거래상을 베면, 그의 뒤를 엄호하며 나아갔다.
“여기야.”
입구에 다다르자 문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괴상한 향료 섞인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문 앞에서 리헤로스의 수신호를 기다렸고 신호를 내리자마자 박차고 들어갔다.
─쾅!
“뭐야? 컥…!”
적이 소란의 근원을 확인하기도 전에 리헤로스는 정확히 명치를 겨누어 찔렀다.
검을 뽑아내자 선혈이 솟구쳤다.
그 모습을 본 장 내의 인간들은 무기를 들고 우르르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화살을 세 개를 쏘아 한 번에 세 명을 처리했다.
‘남은 것은 여덟.’
리헤로스의 눈은 어둠 속 맹수처럼 빛났다. 서슬 퍼런 검날에 피가 응고되기도 전에 계속 베고 찔렀다. 졸개들은 온 힘을 실어 오함마를 휘둘렀지만, 그것을 맞아줄 여유도 없이 급소를 끊어냈다. 입구에서부터 들어가는 구조였는데 감사하게도 차례대로 덤벼 들어주어 한 놈씩 차근차근 처치해나갔다.
“하아… 후우….”
더는 덤벼오는 놈들이 없자 그는 낮게 숨을 몰아쉰다. 눈 깜짝할 새, 초주검이 된 주변을 둘러보니 그가 괜히 용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 아니구나 싶었다.
“끝났나?”
리헤로스가 금기어를 꺼내기가 무섭게 지저분한 앞치마를 둘러맨 거대한 남자가 큰 식도를 양손에 쥐고 주방에서 나온다.
“쥐새끼들, 스튜로 만들어주마.”
─띵.
[던전] 시궁의 주방 : 주방장 브라가
[시스템]
입장 인원이 권장 인원 수보다 많아 몬스터의 공격력과 전투 반응 속도가 상향 조정됩니다.
(권장 인원 : 1인)
‘상향 조정? 진짜 너무하네.’
리헤로스가 크게 베는 동작으로 파고 들어가는 동시에 나는 화살을 쏘았다.
왼손에 들린 칼로 화살을 튕겨내더니 오른손으로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리헤로스의 검까지 방어한다. 생긴 것과 달리 날렵한 편이었다.
─카랑!
힘을 실은 두 검의 날이 맞부딪혀 스파크가 얕게 튀었다.
금속이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자 리헤로스의 자세가 약간 흐트러졌다. 그것을 눈치챈 브라가는 반대편 손으로 내려찍으려 했다.
‘위험해.’
한 개씩 쏘는 것으로는 놈의 집중력을 흩트릴 수 없을 것 같아 화살을 다섯 개를 뭉쳐서 쐈다. 브라가는 리헤로스를 향해 내려찍으려고 했던 팔을 방향을 돌려 날아오는 화살을 방어했지만, 몇 개는 튕겨내지 못하고 팔에 박혔다.
"크아악!"
꽂힌 화살을 억지로 뽑아내려 하다가 우두둑 부서진다.
짐승을 넘어서 몬스터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리헤로스를 발로 차 멀리 넘어트리더니 내게 돌진해 목덜미를 낚아챈다. 목이 눌린 상태로 등이 벽에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손에 힘이 풀렸다. 들고 있던 활과 화살들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브라가는 2m는 가볍게 넘는 거구이기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번쩍 들어 올렸다.
살기, 광기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사냥감을 주시하는 몬스터 그 자체였다.
두꺼운 손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며 목울대를 짓눌러오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이대로 목을 꺾어버릴 기세였다. 분명 HP는 우월하게 높지만 정말 죽는 거 아닌가 하는 낯선 두려움에 잠식되었다.
‘…크윽, 귀찮게… 그냥 눈 딱 감고 스킬로 날려버려?’
생각하는 대로 스킬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캐릭터 스킬]
오르쿠스 | 각성기(광역) | 쿨타임 250초
케르베로스 | 일반(소환) | 쿨타임 120초
데스데모나 | 일반(단일) | 쿨타임 160초
…더보기
리헤로스가 모르게 암살할 수 있는 스킬을 찾지만, 모두 노출되기 딱 좋은 크고 과한 스킬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죽으면 신분을 숨기는 게 무슨 소용일까. 리헤로스야 용사니까 부활할 수 있었지만, 나는 NPC에다가 심지어 ‘마왕’이다. 여기에서 죽으면 이 세계에 들어온 목적을 완수하지 못하는데도 괜찮나? 그리고 제대로 된 엔딩으로 향할 수 있을까? 일단 죽으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냐? 아니다, 오히려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지도 모른다. 프렉탈 소프트 놈들의 마음에 드는 엔딩이 아니면 안 될지도 몰라. 주마등 대신 기나긴 질문이 뇌리를 스쳤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 일단 살고 보자.’
“…데스…데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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