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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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실장님처럼 멋있는 어른을 본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모습이 멋있는 어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대고 싶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말해도 될 것 같고, 이유 없이 펑펑 울고 싶은 날 자꾸 생각이 나는 그런 어른이었어요.”
깡패라서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권태정을 향하던 시선과 걸음을 이겸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보다 권태정에게 젖었던 그날의 떨림과 도저히 멈출 수 없던 마음을.
“전 지금도…. 제가 만든 다 식은 핫초코를 맛있다고 끝까지 마셔 주시던 실장님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설레요. 그날… 솔직히 많이 떨리고, 설렜거든요.”
“정말 맛있었어. 내 생각 하면서 만들어 준 거잖아.”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따뜻한 사람이라고.”
“…….”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안아 줘, 이겸아.”
커다란 몸이 안겨 드는 것에 잠시 뒤로 밀린 이겸이 웃으며 중심을 잡고 너른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우리 이겸이한테는 괜찮은 어른이어서.”
“괜찮은 게 아니라 너무너무 좋고, 멋있고… 또 귀엽고 사랑하는 어른이에요.”
“좋아라.”
그제야 웃은 권태정이 이겸의 몸을 안아 들어 제 다리 위로 앉혔다. 그리고 더 편히 몸을 맞대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까 네가 서정원 보는데 우울해서 약속 취소하려고 했어.”
“약속이요?”
“아…. 서정원이랑 잠깐 얘기해 보니까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더라고.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하고, 아들 하나 있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다음에 식사 한번 하자 그랬거든.”
안겨 있던 몸을 뗀 이겸이 가만히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저도 질투 나요….”
“응?”
“…실장님이 먼저 식사 약속도 잡으신 거면…. 대화 나눈 게 정말 좋으셨다는 거잖아요.”
“아…. 그렇다기 보다는 여태까지 배우들 만나면서 별로 좋은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거든. 그런데 서정원은 성질이 별로라고 보고를 받았는데 얘기해 보니까 그냥 나랑 비슷한 성격인 것 같아서 뭔가 오해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
갑자기 완전히 뒤바뀐 상황에 권태정이 진땀을 흘리며 시선을 떨군 채 가만히 있는 이겸을 달래려 애썼다.
“그냥 정말 알아 두면 일적으로 좋지 않을까 해서 한 제안이야. 말이 잘 통해 봤자 자기만 하겠어? 우리 이겸이랑은 말도 잘 통하고, 마음도 잘 통하고, 응? 진짜 안 통하는 게 없는데.”
“…….”
“내가 우리 이겸이고, 우리 이겸이가 나잖아.”
권태정의 말에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린 이겸이 두 팔로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장난이에요. 실장님 마음 다 알아요.”
“놀래라.”
겨우 안도한 권태정이 이겸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연약한 복숭아 향이 폴폴 나는 목덜미에 입술을 누른 채 얼굴을 파묻었다.
“힘들면 천천히 표현해도 돼. 그리고 지금도 많이 해 주는데.”
“…….”
“자기 전에 이렇게 매일 안아 주고, 새벽에 뒤척이다 깨면 늘 먼저 와서 뽀뽀도 해 주고, 다시 잠들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해 주잖아.”
“사랑한다고 한 건 기억이 나는데…. 제가 뽀뽀도 했어요?”
“응. 안기면서 나한테 꼭 뽀뽀해. 잠결에 그러는 거라 이겸이 넌 기억 못 해도 난 자주 보고 들으니까 다 기억하거든.”
“…….”
“잠결에도 고백해 주는 지금이 너무 좋아. 나도 우리 이겸이가 사랑한다고, 멋있다고 고백해 줄 때마다 늘 설레고, 행복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
평온한 숨소리가 뒤섞였다. 권태정은 제 품에 완전히 들어온 행복을 가득 안은 채 미소 지었다.
“사랑해요, 실장님. 세상에서 제일 많이….”
“응, 나도 우리 이겸이 제일 많이 사랑해. 뽀뽀.”
“뽀뽀….”
포개진 몸이 살짝 떨어지고 그 자리를 채우며 두 입술이 마주했다. 고요한 차 안으로 쪽, 쪽 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그 간지러운 소리 사이로 다정한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질투라는 단어는 이미 흐릿해져 두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뒤였다.
* * *
이겸이 흐릿해진 질투라는 단어를 다시 강하게 떠올리게 된 것은 여느 때처럼 하루를 재우고 산책 데이트를 하러 나갔을 때였다.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늘 가는 카페에 들어간 이겸은 테이블에 묻어 있던 시럽이 손에 묻어 화장실로 향했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나와 다시 자리로 가려 고개를 든 순간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웃으며 권태정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권태정이 받지 않으니 그의 앞에 놓인 진동벨 옆으로 놓고 다시 눈을 맞췄다. 권태정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여자와 눈을 맞추고는 있었다.
“…….”
순간 심장 안쪽이 찌르르 울리며 일렁였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하는 건지 궁금하면서도 또 알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얼른 다가가 제 자리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발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겸은 그 자리에서 팔짱을 끼로 뒤로 기대 앉아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권태정을 계속 눈에 담았다.
권태정이 뭐라고 말을 짧게 하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린 얼굴을 한 권태정을 보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뭐라 말한 여자가 자리로 돌아갔다. 이겸은 그제야 걸음을 옮겨 자리로 돌아가 진동벨 옆에 놓인 메모를 집어 들었다. 메모에는 낯선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저 안쪽으로 자리 옮기자. 시럽도 묻어 있더니 별 이상한 게 다 꼬여. 자리가 별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겸이 들고 있는 메모를 받아 든 권태정이 한 손으로 사정없이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마침 울리는 진동벨을 픽업데스크에 내고 따뜻한 밀크티 두 잔을 들었다.
권태정을 따라 카페 안쪽 조용한 자리로 가 앉은 이겸은 말없이 밀크티를 호오 불어 한 모금 목 뒤로 넘겼다. 평소엔 그렇게 달콤하던 밀크티가 오늘따라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누구예요?”
“어? 아…. 몰라. 갑자기 오더니 연락하자 그래서 결혼했다고 하니까 자꾸 거짓말 하지 말라고 그러잖아.”
“…….”
“그래서 꺼지랬더니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 보자는 거야. 욕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또 내일 욕설 논란 이 지랄로 기사 뜰 수도 있어서 그냥 그럴 생각 없다고 보냈어.”
“아….”
귀찮다는 듯 옷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권태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겸은 권태정의 어깨 너머에서 계속 닿아 오는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 권태정에게 번호를 준 사람이 일행과 이쪽을 한 번씩 흘끗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그 분이 자꾸 이쪽 보시는 것 같아요….”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뒤를 돌아본 권태정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겸의 손을 잡았다.
“집 가서 정원에서 마시자. 날도 좋은데.”
“네….”
이겸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은 권태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다른 카페를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밀크티가 싱거운 것 같기도 하고, 또 별 거지 같은 귀찮은 일까지 생겨 카페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자기야. 아까 그거 신경 쓰는 거 아니지?”
“신경….”
안 써요, 아닌 거 아니까 괜찮아요. 원래라면 그렇게 말했겠지만, 어쩐지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조금….”
“조금 쓰여?”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한 이겸이 몸을 기울여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조금 좋아 보였다.
“아, 내가 좋아하면 안 되는데 자기가 질투하는 거 보니까 너무 귀여워서.”
“…다음에는 저기 말고… 다른 카페 가고 싶어요….”
“응, 나도. 뭔가 밀크티도 좀 밍밍하지 않아? 변했어.”
또 고개를 끄덕끄덕한 이겸이 길에서 쪽 입을 맞추는 권태정을 말리려다가 그냥 놔두었다. 그냥 지금은 이렇게라도 권태정과 남들보다 가까이 있고 싶기 때문이었다. 유치한 생각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권태정과 딱 달라붙어 걸은 이겸은 벨을 누르려는 권태정의 손을 잡아 말렸다. 대신 전자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집이 아니라 하루가 태어난 기념으로 만든 온실 쪽으로 권태정을 이끌었다.
“…….”
권태정은 제 손을 잡고 저를 끌고 가는 이겸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질투가 나서 신경이 쓰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만으로도 귀엽고 야한데 가족 몰래 문을 열고 저를 끌고 가기까지 하다니…. 심장과 아랫배가 동시에 마구 울렁였다.
“이겸아. 여긴 왜 왔어? 꽃 보고 싶었어?”
새하얗고 예쁜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겸을 따라 얌전히 걸음을 옮긴 권태정이 뒤로 문을 꽉 닫으며 모르는 척 물었다. 제 물음 하나에도 목덜미가 빨개지고, 꽃향기보다 더 달콤한 복숭아 향이 폴폴 나는 이겸의 대답이 궁금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응, 들어가기 전에?”
권태정을 돌아본 이겸의 발꿈치와 턱이 들렸다. 저에게 가까워지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은 기꺼이 고개를 숙여 이겸이 닿는 것을 도왔다.
“…키스… 하고 싶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말하는 이겸이 사랑스러웠다. 여기까지 저를 끌고 왔으면서 키스 소리 하나에 새빨개지는 이겸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뭐든 좋으니 얼른 이겸에게 잔뜩 당하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얼른 해 줘.”
“…….”
“함부로 굴어도 되니까…. 하고 싶은 대로.”
온실 안에 있는 티 테이블로 권태정을 데려간 이겸이 팔걸이가 없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잔뜩 불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권태정의 다리 위로 올라 앉았다. 바지 아래로 벌써 단단해진 권태정의 것이 느껴졌다. 그 느낌만으로도 제 성기에도 힘이 들어갔다. 이겸은 저를 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권태정의 목에 먼저 팔을 감고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마주했다.
키스도 해 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걱정과는 달리 입술이 벌어지자 자연스럽게 혀가 얽혀들었다. 권태정의 혀를 문지르고 빨기만 하는데도 숨이 차고 몸에 열기가 퍼졌다. 이겸은 엉덩이 아래 닿는 권태정의 것이 더 커진 것을 느꼈다. 그걸 느끼는 순간 속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 단단하고 큰 것을 몸에 넣을 거라 예상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