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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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베테랑에다 연기로는 알아 주는 사람이라 그런지 표정 쓰는 것부터 달랐다. 냉한 분위기의 얼굴 안에 도회적인 이미지가 강한 것도 마음에 들고 무척 세련된 느낌이 드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잘하네. 간만에 전부 마음에 들어.”
“괜히 톱티어가 아니지.”
“안 그래도 누나가 엄청 칭찬했거든. 전에 백화점 모델할 때 몇 번 봤는데 엄청 깔끔하다고.”
한참을 만족스럽게 보던 권태정은 잠시 주어진 휴식 시간에 서정원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커피를 든 채였다. 간만에 마음에 든 깔끔한 사람이라 뭔가 이야기를 더 나눠 보고 싶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아, 네.”
대기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서정원이 느릿하게 일어나 권태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으로 자리 잡았다.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둘 중 그걸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자꾸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적당히 봤으면 가야 하는데 오늘 촬영하시는 거 보니까 너무 만족도가 높아서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거.”
커피를 서정원의 앞으로 놓아 준 권태정이 웃음 지었다. 서정원도 그런 권태정을 보며 배우답게 적당히 만들어진 웃음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저도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저랑 같은 해에 결혼하셔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 네. 결혼도 같은 해에 했고, 아이도 몇 달 차이 안 나게 태어난 걸로 아는데 그래서 그런지 괜히 더 반갑네요.”
결혼과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누그러지는 서정원의 얼굴을 보며 웃은 권태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랑꾼 이미지가 됐다더니 이미지가 된 게 아니라 정말 엄청난 사랑꾼인 모양이었다. 물론 저만은 못하겠지만.
그렇다면 아무래도 서정원이 더 누그러지고 공감할 수 있는 결혼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저와 서정원 사이에 엄청난 공통점이니까. 그러면서도 너무 사적이지 않고 선을 넘지 않게 이야기를 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권태정은 서정원이 언젠가 결혼과 사랑에 대해 인터뷰해서 화제가 됐던 것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 인터뷰 하셨던 거 저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저랑 비슷하셔서 궁금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좋네요.”
“아, 그걸 보셨을 줄은 몰랐는데.”
“그때 워낙 화제였잖아요. 사랑꾼이시라고 기사도 매일 나고. 저도 궁금해져서 봤는데 정말 그런 기사 날만 하던데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는 제 인생의 가치관이나 중심… 같은 것들이 바뀌게 된 가장 중요한 때였어요.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 둔 것 같아서 드물게 제가 좋아하는 인터뷰이기도 합니다.”
“순간을 남긴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하는 게 요즘은 하루하루가 지나는 게 참 아깝게 느껴져서 저도 그 순간을 자주 남기게 되더라구요. 아이 영상도 남기게 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오늘을 남기게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일분일초까지도 전부 눈에 담고 싶어요.”
서정원도 공감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권태정은 확실히 성격이 별로네, 이기적이네 하는 말들이 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평가에서 나온 거라는 걸 느꼈다. 대화를 많이 나눈 건 아니지만, 한마디만 나누어 봐도 상대를 알 수 있었다.
“저도 시간이 날 때마다 기록해 두려고 합니다. 일도 요즘은 조절해 가면서 하려고 하고…. 저도 대부분 일을 밖에서 하지만, 연준이도…. 아, 이름 부르는 게 습관이 돼서.”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너무 보기 좋은데요.”
“요즘 대학을 다니느라 바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다 같이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해졌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흘러가는 일분일초가 아까울 만큼이요.”
“배우님이랑 저랑 통하는 것도 많고, 비슷한 상황도 많아 그런지 언제 한번 정식으로 자리 마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찬찬히 나눠 보고 싶은데 어떠세요?”
“아….”
잠시 고민하던 서정원이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적으로 근래에 만난 사람 중 가장 상식적이고 말이 통하는 정상인이라고 느낀 이유였다.
“좋습니다. 언제든 연락 주세요.”
“네. 쉬시는데 방해한 건 아닐지 걱정이네요.”
“아닙니다. 방해로 느껴졌다면 그렇다고 말씀드렸을 거예요. 제가 참고 듣고 있는 성격이 아니라.”
“아, 그것도 저랑 생각이 같으시네요. 아시겠지만, 저도 싫은 걸 잘 참는 성격이 아니라.”
대화의 끝자락에서야 서로를 향한 경계심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만들어 낸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을 머금은 서정원과 즐겁게 악수를 나눈 권태정이 남은 촬영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대기실을 나섰다.
온갖 개소리를 해 대는 사람에게 개소리 좀 하지 말라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런 말을 면전에서 듣고 쪽팔린 놈들이 싸가지가 없다고 업계에 소문을 내고 다녔을 거라 생각한 권태정이 다시 스튜디오로 나갔다.
“어?”
스튜디오에는 언제 왔는지 백 비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겸이 있었다. 놀란 권태정이 얼른 이겸에게 다가갔다.
“자기야, 언제 왔어. 전화를 하지.”
“조금 전에요. 도착해서 전화하려는데 백 비서님이랑 만나서 같이 들어왔어요. 실장님 배우분이랑 말씀 나누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고 있었어? 누구 거가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해.”
백 비서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걸 슬쩍 확인한 이겸이 저를 향해 고개를 숙여 귀를 대 주는 권태정에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 속삭였다.
“실장님 거….”
“…자기야. 우리 아파트에 잠깐 들렀다 갈까. 아냐, 거기까지도 못 가겠다. 차에 갈까? 나 하고 싶어.”
“사, 사람들 많아서 안 돼요….”
잡아먹을 듯 다가오는 권태정을 잡아 살살 달랜 이겸이 그 뒤로 걸어 나오는 배우를 눈에 담았다. 연예인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서정원이 누군지는 이겸도 알고 있었다.
“우와…. 서정원….”
“응? 아….”
이겸의 시선이 저를 지나 서정원에게 닿은 것을 물끄러미 보던 권태정이 묘하게 조여드는 마음을 느꼈다. 그냥 유명인을 보는 게 신기해서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마음이 오목해졌다.
“…서정원 좋아해?”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아는 건 아닌데…. 유명한 분이잖아요. 너무 신기해요.”
“연예인 보는 거 처음이야?”
“전에 실장님이랑 만났던 연회장 아르바이트할 때 연예인 많다고 형이 알려 줬는데… 제가 연예인을 잘 몰라서 봐도 누군지 잘 몰랐거든요.”
“…잘 모르는데 서정원은 안단 거네?”
“엄청 유명하시니까….”
서정원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이겸의 눈동자도 따라 움직였다. 엄청 유명한 연예인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그런 유명한 연예인과 권태정이 같이 일을 한다는 것도 신기해서 자꾸만 그쪽으로 눈이 갔다. 정말 권태정이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고 큰일인지 실감이 나서 이런 엄청난 일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그가 더 멋있게 느껴졌다.
“같이 사진 찍거나 사인 같은 거 받고 싶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되는데.”
저를 보자마자 달려와 사랑을 쏟아 내던 때에 비교해서 묘하게 가라앉은 권태정을 느낀 이겸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시선을 내리깔고 말수가 확연히 적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에 기분이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잠시 고민하던 이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권태정을 보며 서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았다.
“학교 앞에 정거장에도 저 배우님 사진이 많이 걸려 있거든요. 매일 보는데….”
“…그랬어? 매일 본다고? 저 얼굴 보려고 일부러 서서 보는 거야?”
기분이 더 확 안 좋아지는 게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유가 서정원인 모양이었다. 이겸은 흥분한 권태정의 손을 남들이 보이지 않게 살짝 잡고는 흔들었다.
“실장님, 여기 더 계셔야 해요?”
“…아니. 이제 가도 돼.”
“그럼 우리… 얼른 여기서 나가요.”
“…….”
“둘이서만 있고 싶어요….”
“…가자.”
조금의 머뭇댐도 없이 이겸의 손을 잡고 일어난 권태정이 부탁한다는 듯 백 비서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저 먼저 퇴근합니다, 백 비서님.”
“네, 들어가세요. 실장님. 이겸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백 비서에게 꾸벅 인사한 이겸이 얼른 권태정을 따라 스튜디오를 나섰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손만 잡은 채 주차장으로 간 이겸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권태정을 보다가 문을 닫고 뒷좌석 문을 열어 안으로 올랐다. 그리고 가만히 보는 권태정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실장님….”
“…….”
“자기야….”
손을 잡고 살살 흔드니 그제야 권태정의 고개가 돌아왔다. 이겸은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아 뺨을 매만져 주었다.
“학교 오가면서 광고에서도 보고, 또 연예인 잘 모르는 저도 알 만큼 유명한 분이니까 그냥 신기해서 본 거예요.”
“…알아. 아는데 그래도 네 눈이 내가 아니라 다른 데를 보고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어.”
“…….”
“질투 나고 싫었어.”
시트로 몸을 푹 묻고 고개를 젖힌 권태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은 채 넥타이까지 느슨하게 푸는 권태정을 보며 이겸은 왠지 모르게 두근두근한 마음을 꾹 눌렀다.
“전에는 이럴 때 그냥 저 새끼 보지 말라 말하고 서정원이고 뭐고 다 없애 버리면 됐는데 이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결혼도 하고 하루도 있는데 이렇게 내 감정이 바로 태도로 이어지면 안 되는 거고…. 아빠도 늘 그걸 강조하시는데, 어려워.”
“…….”
“어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봐, 이겸아.”
권태정의 얼굴을 다시 살살 문지른 이겸이 저를 보는 얼굴로 다가가 가만히 입술을 마주 댔다. 그리고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실장님께서 감정을 솔직하게 다 보이시고 내보인 감정에 충실하시다는 게 참 좋았어요. 여유 있는 어른이라서 그럴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저도 실장님처럼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도 했어요.”
“…….”
“그래서 요즘 실장님을 따라서 저도 더 많이 제 마음을, 감정을 보이려고 노력 중이에요. 생각만큼 쉽지가 않더라구요….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부끄러워서 쉽지가 않고, 실장님이 너무 좋아서 뽀뽀하고 싶은데… 또 부끄러워서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차 안으로 나지막이 울리는 다정한 이겸의 목소리에 권태정이 손이 움직였다. 아까부터 만지고 싶던 뺨을 지금 느끼는 감정처럼 부드럽게 문지르자 이겸이 살포시 웃었다. 혹시나 이겸의 고백을 방해할까 싶어 권태정은 터져 나오려는 저의 고백들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실장님께서는 좋다고, 예쁘다고… 또 사랑한다고 다 말씀해 주시고 보여 주시잖아요.”
“…….”
“백 번을 들어도 백 번 다 엄청 떨리고… 좋아요. 처음에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